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정치/저우용캉사건

차오용정(曹永正): 저우용캉이 가장 신임한 사람

by 중은우시 2014. 8. 27.

글: 양국선(楊國選)

 

2013년 7월 1일, 베이징 허우하이(後海)의 북쪽에 있는 첸마창후통(前馬廠胡同) 60호원에 있는 베이징넨다이투자유한공사(北京年代投資有限公司, '베이징넨다이') 본사에는 대형 진베이(金杯)차량이 은밀하게 숨어있는 집으로 급히 운전해 들어갔다. 차문이 열리고, 10여명의 사복경찰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1호루에 있는 베이징넨다이 사무실로 쳐들어간다. 쓰촨 사투리를 쓰는 경찰관은 현장에 있던 30여명의 직원에게 이쪽으로 모이라고 한 다음 핸드폰을 압수했다. 이들 직원은 곧이어 2호루의 1층에 있는 다목적홀로 보내진다.

 

다목적홀에서 8시간이나 갇혀 있다가, 베이징넨다이의 동사장조리 차이홍우(蔡洪武)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직원들은 저녁이 되자 집으로 돌아가도록 허락받는다. 경찰은 그날 베이징넨다이가 보유한 1호동과 2호동을 봉쇄시키고, 하이홍우와 모든 차량을 가지고 갔다(1300만위안짜리 롤스로이스와 두 대의 BMW를 포함해서). 긜고 베이징넨다이의 은행구좌를 동결시킨다.

 

경찰의 조사를 받는 "베이징넨다이"는 2003년 3월에 설립되었다. 이 신비스러운 기업의 법정대표인은 주전화(朱振華)이다. 다만 실제지배인은 주전화의 외삼촌인 차오용정이다.

 

"서부다칭(西部大慶)"이라 불리는 샨시성(陝西省) 북부 오치(吳起)의 창칭유전(長慶油田). 4월의 행화는 섬북 우치현의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산자락에 가득 피어 있었고, 붉은 색의 석유채굴기기가 그 사이에 보였다. 이 홍색전통을 지닌 섬북의 현성은 지금 서북지박 석유중심도시이다. 계속 나오는 검은황금 석유는 현지의 경제기반을 이룬다.

 

2013년 8월말 중석유(中石油)의 반부패폭풍은 창칭유전에도 불어닥쳤다. 갈수록 많은 우치에서 일하던 유전노동자들은 '왕타이(王台)작업구"의 합작구역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일선노동자들이 귀에서 귀로 전해진 소문에 따르면, "위에서 내려온 사람"이 이곳에서 생산된 석유를 나눠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온 사람의 성이 무엇이고 이름이 무엇인지는 그들이 알지 못했다.

 

이 우치작업구와 신자이(新寨)작업구에 숨어있는 합작지역은 2006년부터 제3석유채굴창 내부의 장부에 버젓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 합작구의 88%의 석유생산수익은 '넨다이에너지개발유한회사'(이하 넨다이에너지')라는 곳으로 흘러들어간다.

 

소식통에 따르면, 왕타이합작구의 생산량이 많고, 안정적인 생산시간도 길며, 투자는 적게 하고 수익은 많이 올릴 수 있다. 2013년 8월 사건발생전까지 넨다이에너지는 모두 7억여위안의 수익을 챙겨갔다.

 

우치현의 행장관랄구내에는 우치, 신자이, 통자이의 3개 석유채굴작업구가 있다. 모두 창징유전에서 생산량이 가장 많은 제3석유채굴창의 산하이다. 제3석유채굴창의 석유채굴정은 대부분 황토고원과 고비사막에 흩어져 있어 환경이 열악하다. 다만 2012년 연말, 이 석유채굴창은 436만톤의 연간생산량으로 중석유내에서 3위의 석유채굴창이 되었다.

 

생산조건은 험난하지만, 창칭유전은 중석유가 중점적으로 개발한 '서부다칭'이다. 2003년에서 2013년까지 즉 중석유에서 낙마한 고위직 왕다오푸(王道富)와 란신췐(冉新權)이 각각 경영하던 10년간, 창칭유전은 중석유의 생산증가에서 스타였었다. 2003년에서 2007년까지 창칭유전은 연간생산량 1000만톤을 2000만톤으로 크게 늘였고, 다시 3000만톤/년 및 4000만톤/년의 고지도 넘어서는데 단지 2년이 걸렸다. 2012년, 창칭에서 생산한 석유 천연가스의 총생산량은 4,505만톤의 신기록을 세운다. 일거에 다칭유전의 4,330만톤을 넘어서서 국내에서 가장 많은 생산량을 지닌 유전이 된 것이다. 2013년 창칭유전의 석유 천연가스 생산량은 처음으로 5000만톤을 넘어섰다.

 

비록 석유,천연가스부존량과 생산량이 급속히 증가하였지만, 휘황한 실적은 많은 일선직원들의 원성 위에 세워진 것이다. 여러명의 창칭유전 직원은 이렇게 말한다. 란신췐이 경영을 맡을 때, 생산실적을 급속히 늘이기 위하여, 무절제하게 약탈식의 채굴을 진행하고, 하급노동자들의 복지는 전혀 무시했다고 한다.

 

창칭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것은 왕타이합작구와 같이 사람들이 모르는 물밑거래가 있다는 것이다. 여러 유전합작구의 이익유출은 왕다오푸와 란신췐이 낙마하는 현량지검(懸梁之劍)이 되었다.

 

우치현 북쪽교외의 허우다차오(後大橋)를 출발하여 서쪽으로 약 10킬로미터를 달리면, 양청쯔촌(楊城子村)과 왕타이촌(王台村)의 사이에 산으로 통하은 백유로(柏油路)가 있다. 이 길에는 여러 유정, 전수참(轉輸站)과 증압점(增壓點)이 연결되어 있다. 반산야오(半山腰)에 위치한 우이롄허참(吳一聯合站)(현지인들은 '우이롄'이라 부름)은 작업구에 가까운 주요한 허브이다. 신자이작업구와 우치작업구의 일부 원유의 처리 및 수송을 담당하고 있다.

 

우이롄에는 왕타이작업구에 속하는 밸브실과 계량실이 있고, 왕타이당직실이 있다. 넨다이에너지는 4명의 여자 '임시직'을 고용해서 이곳에서 돌아가며 근무하게 했다. 그녀들의 유일한 업무내용은 바로 2시간마다 한번씩 왕타이합작구의 유량계에 나타난 수치를 읽고, 매일 "창칭유전분공사원유게량인수인계증빙"이라는 문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왕타이합작구의 하루종일동안의 원유채굴창으로 송유한 양을 적는다.

 

우이롄의 직원은 왕타이합작구에서 생산되는 원유는 모두 이곳을 거치고, 전용 유량계로 각각 왕타이작업구의 유정에서 모아온 생산량을 계량한다. 이들 기름은 우이롄에서 계량된 후, 대송유관에서 더 이상 어디에서 채굴된 원유인지를 따지지 않고 외부로 수송된다.

 

우이롄에서 다시 산으로 수백미터 걸어올라가면, "치(旗)12-30"이라는 유정군이 있다. "비록 문앞에 간판을 달지는 않았지만, 이곳의 5개 유정은 모두 왕타이합작구에 속한다. 실제로, 우이롄유정구역의 12개 유정은 모두 그들의 것이다." 유정지역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해준 말이다. 왕타이작업구의 유정지역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모두 창칭유전의 직원이다. 합작당사자인 넨다이에너지는 단지 1,2명의 "교유(交油, 생산량을 체크하는 것)책임자만 두고 있다. 창칭유전 및 석유채굴창에서 정산한 후, 돈은 넨다이에너지의 계좌로 보낸다.

 

그들이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왕타이합작구의 프로젝트는 위탁관리형식이다. 작업구 책임자는 신자이작업우의 한 부책임자가 겸임하고 있다. 매년의 생산량은 십여만톤이다. "치12-30" 유정군이외에, 우치작업구의 "치4-45", "치2-45", "치6-33"유정군은 모두 왕타이합작구의 범위에 속한다.

 

창칭유전 제3원유채굴창의 생산수치를 보면, 왕타이합작구는 모두 310여개의 유정이 있고, 일일생산량은 350-450톤이다. 매일 415톤의 중간치로 계산한다면, 이 작업구의 연간생산량은 14만-15만톤에 달한다. 최근 3년의 국제원유가격수준으로 보면 왕타이합작구의 매년 석유채굴수입은 7억위안가량이다.

 

중석유의 대외합작은 통상 제품분배계약형식이다. 합작당사자가 탐사개발의 전기투자를 진행하고, 석유가 나온 후 다시 권익비율에 따라 분배하는 것이다. 중석유와 합작당사자 넨다이에너지의 분배비율은 12:88이다. 즉, 채굴한 원유는 국제유가로 중석유가 인수하고, 합작당사자는 88%의 이익을 가져가는 것이다.

 

소식통에 따르면, 넨다이에너지의 합작유정은 왕타이합작구가 성립되기 전에 이미 석유가 나오고 또한 생산량이 비교적 좋은 곳이었다. 각종 세금비용과 생산조작비용만 공제하고, 유정의 자연적인 감가상각을 보완하는 조치비용만 공제하면 되었다. 

 

"그들은 심지어 투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합작기간을 1년 앞당겨서, 1년간의 허위분배수입을 투자로 계산한 것이다. 넨다이에너지는 그저 정기적으로 돈을 챙겨가면 되었다. 주로 석유채굴3창이 관리하고 작업해주었다." 그 소식통의 말이다.

 

왕타이당직실의 직원에 따르면, 이곳에서 교유를 책임지는 4명의 직원은 모두 넨다이에너지가 채용했고, 류하이빈이라는 사람이 관리한다. 그러나 노동계약조차 체결되어 있지 않다. 류하이빈과 4명의 임시직여직원 외에 넨다이에너지의 사람은 본 적이 없다. 2013년 7월에서 11월까지, 4명의 급여를 한때 지급하지 못한 적이 있다. 그 후에 12월 창칭유전이 인수한 후 밀린 급여를 비로소 지급했다.

 

급여를 받지 못한 노동자들은 알지 못했다. 그녀들을 채용한 넨다이에너지가 작년 여름부터 불어닥친 중석유반부패의 폭풍와중에 압류당했다는 사실을.

 

공상자료를 보면, 넨다이에너지의 등록지는 신장 우루무치이고, 2006년 10월에 설립되었으며, 등록자본금은 5000만위안, 법인주주는 베이징넨다이투자유한공사(출자금3500만위안)과 쓰촨넨다이투자유한공사(출자금1500만위안)이다. 회사경영범위는 석유,천연가스의 개발채굴을 포함한 기술자문서비스, 프로젝트투자, 개발, 자문, 화물운송대리, 석탄개발기술등이다.

 

넨다이에너지의 실제지배인은 차오용정이다. 2012년 1월 회사의 법정대표자는 차오용정에서 차오용핑(曹永平)으로 변경되었는데, 차오용핑은 차오용정의 동생이고, 1965년생이다. 고등학교졸업학력에 신분증에는 거주지가 산동 칭다오로 되어 있다.

 

회사의 연도검사정보에 따르면, 넨다이에너지는 2012년말 장기투자금이 7.49억위안이고,자산초액이 13.6억위안이며, 부채는 1.82억위안이다. 미분비이윤은 11억위안이다. 2012년 누적투자수익은 2.7억위안이다.

 

한 자료에 따르면, 창칭유전과 넨다이에너지는 왕타이작업구프로젝트에 대하여 "창칭유전회사왕타이석유합작개발프로젝트연합관리위원회"를 만들었다. 2010년에 개최된 연합관리위원회 회의의 출석인원에는 차오용핑, 창칭유전회사 부총경리 리안치(李安琪), 창칭유전 대외합작부 부장 탕자칭(唐家靑), 창칭유전 규획계획처 부처장 장싱안(張興安), 창칭유전 재무자산처 부처장 차오시(曹璽), 창칭유전 제3석유채굴창 창장 정밍커(鄭明科), 제3석유채굴창 총회계사 왕칭홍(王淸洪), 제3석유채굴창 재무자산과 부과장 우즈핑(伍志萍) 등이다.

 

소식통에 따르면, 심계인원은 일찌감치 2013년 6월에 창칭유전에 진주하여 유전합작구의 문제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6월 29일, 우즈핑은 인촨(銀川)에 위치한 제3석유채굴창의 부지에서 끌려갔고, 후베이 이창(宜昌)에 수감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왕타이작업구 합작프로젝트에 깊이 관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제3석유채굴창의 부지에서 많은 직원들이 이 체포과정을 목격했다.

 

"창칭유전과 넨다이에너지가 체결한 합작계약은 우즈핑의 손을 거쳤고, 사건발생후 그녀의 집안에서 거액의 현금과 예금통장자산이 발견되었다." 소식통의 말이다.

 

위의 회의에 같이 참석했던 창칭유전 규획계획처의 부처장 장싱안은 2014년 2월중순 위하(渭河)에 투신자살한다. 자살원인은 불명이다. 이 사건은 이미 셴양(咸陽)시 공안기관에서 확인되었다. 사건발생당일 장싱안은 외지에서 비행기로 시안(西安)으로 돌아왔고, 공항고속도로 위하대교의 다리 위에서 투신했다.

 

창칭유전 규획계획처는 생산건설계획을 책임지는 직능관리부서이고,주로 회사의 생산경영 및 투자계획의 작성을 책임진다. 중대투자프로젝트의 입항, 신고, 인허가 및 수권범위내의 투자프로젝트의 심사허가, 결산정산등 업무를 담당한다.

 

현재, 중석유 부패사건의 조사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청명절 휴일기간이 끝나고 출근한 후, 중석유 대외합작경리부의 총경리 옌춘장(閻春章)은 중기위 전안조에 의해 사무실에서 끌려갔다.

 

차오용정은 1959년 산동 칭다오 태생이고, 원래 이름은 차오쩡위(曹增玉)이다. 나중에 부친이 소재한 신강건설병단 준가르분지 남쪽의 다쓰먀오(韃子廟)로 간다. 어렸을 때 부친을 따라 125단의 적은 수입으로 일가 9명의 식구가 살았고, 아주 힘든 시절을 보낸다.

 

1982년 신장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차오용정은 당교 교사, 출판사 편집을 거쳐 나중에 '특이공능'으로 이름을 날린다. 그리하여 그는 신장초월의학연구소 부소장이 된다. 1998년 공직에서 퇴직한 후, 중국서부위성TV 동사국주석, 중식산업집단 루메이크스유한공사 동사장등의 직위를 지낸다.

 

"겉모습만 보면, 차오용정은 정상인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약간 검은 피부, 약간 퉁퉁한 체격, 전형적인 산동사나이의 이미지이다. 잘 꾸미지 않는 옷을 입어 항상 사람들에게 화물차운전기사나 씨름선수를 연상케 한다. 게다가 호방하고 거친 말투로 사람들은 그가 일개 유생이라는 것을 잘 믿지 않는다." 남방주말의 보도에 따르면, 1980년대말 '기공붐'이 있을 때 그는 신장에서 '특이공능'으로 유명했고, '신장삼대선(新疆三大仙)"의 우두머리로 꼽혔다. 1990년대말, '기공붐'이 꺼진 후, 처오용정은 정,상계 및 연예계의 고위층과의 관계를 개척하여 여러 정법, 석유계통의 고관들과 깊은 우의를 맺는다. 그가 신경써서 유지한 명사권내에서 차오용정은 '국사(國師)'로 불리웠다.

 

인민일보 주임기자인 라이런츙(賴仁瓊)은 일찌기 1994년 10월 <기인차오용정(奇人曹永正)>이라는 글에서 상세히 묘사한 바 있다. 차오용정은 "시인이고, 작가이며, 의사이고, 기업가이다. 또한 사회학자이다. 그가 섭렵하고 일정한 연구깊이에 다다른 학과를 계산하면 36개에 이를 정도이다." "그는 먼저 스승없이 혼자서 독학한 의사이고, 큰 병원에서 속수무책이던 많은 난치병을 그의 손으로 고쳤다. 그는 풍수에도 정통하여, 많은 국내외 부동산업체에서 그에게 비기를 전수받고 길지를 얻어 큰 돈을 벌었다."

 

차오용정의 특이공능과 예측능력은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전설'이 전해져 온다. "한 사람을 보거나 한 살마의 사진을 보거나, 명함 한 장을 보거나 혹은 한 사람이 자주 사용하던 물건을 보면 몇초 혹은 몇십초만에 이 사람의 과거, 현재와 미래를 감지한다." 차오용정은 베이징에 정착한 후 그에게 병치료를 받거나, 예측을 받거나, 심리자문을 받는 사람이 "가장 많을 때는 1층에서 7층까지 줄을 섰다."

 

글에서는 차오용정의 여러가지 전설적인 이야기를 싣고 있다: 고등학교때 선생님이 교단에서 막 복습범위를 얘기하고나자 차오용정은 시험문제를 공표했다고 한다; 그의 누나가 결혼후 불임증으로 여러 해동안 병원을 찾았는데, 그가 어느날 돌연 '감지'한 후 과연 임신했다고 밝혀진다....등등

 

1993년, 차오용정은 홍콩에서 "세계명인강복자순구락부(世界名人康復諮詢俱樂部)"를 설립하고, 회비는 80만달러였다. 전해지는 바로는 신청자가 6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중에는 퇴임한 외국대통령, 국무장관 및 대은행가, 기업가 그리고 국제적으로 저명한 대과학자와 예술가도 있었다고 한다." 입회한 후 그들은 매3개월에 한번씩 구락부에 사진을 보내면, 차오용정은 이를 보고 그 회원의 향후 100일간의 사업과 신체의 상세한 상황을 예측해준다고 한다.

 

차오용정의 가장 많이 알려진 일은 소위 1993년 베이징의 제1차 올림픽개최신청이 실패하기 1년전에 CCTV의 인사에게 시드니가 이길 것이라는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했었다는 것이다. 그는 베이징의 이번 올림픽개최신청기간동안 거액을 투자하여 베이징에서 부동산사업을 벌이려는 상인에게, 그에게 토지매입계약금을 포기하라고 권한다. 왜냐하면 베이징이 올림픽개최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어서 투자금을 회수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상인은 그 후에 차오용정을 '구명은인'으로 여긴다.

 

창칭유전의 왕타이구역외에, 2005년, 차오용정과 전 승리유전TV방송국 국장인 왕궈쥐(王國巨)는 홍콩에 중국넨다이에너지투자유한공사(홍콩넨다이)를 설립한다. 홍콩넨다이는 중석유가 각각 2007년과 2008년 12월에 <송랴오분지양정구역석유개발및생산계약>과 <타림분지서남카슈카르북부지구천연가스탐사개발및생산계약>을 체결하여 지린유전과 타리무유전에서 합작구역을 확보했다.

 

2003년 3월, 차오용정과 왕궈쥐는 다시 합자로 쓰촨넨다이투자유한공사(쓰촨넨다이)를 설립한다. 차오용정이 670만을 출자하여 67%의 지분을 가지고, 왕궈쥐가 33%의 지분을 가졌다. 그해 7월, 두 사람은 다시 쓰촨서부넨다이영시기지건설유한공사를 설립하여, 쓰촨넨다이, 쓰촨넨다이가 지배하는 쓰촨서부영시유한회사 및 청두상보가 지배하는 청두보뤼(博瑞)부동산개발유한공사가 각각 지분을 보유했다.

 

차오용정은 전 쓰촨성위 부서기 리춘청(李春城), 전 쓰촨성 부성장 궈용샹(郭永祥)과 관계가 밀접했을 뿐아니라, 그와 사업상 연결된 한 투자계인사에 따르면, 차오용정은 그에게 베이징의 신비한 부호 저우빈(周濱)의 부친(저우용캉을 가리킴)이 일찌기 차오용정의 팔을 치면서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소개했다고 한다: "이 사람은 내가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다."

 

차오용정이 이런 신임을 얻은 최초의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2000년을 전후하여, 저우빈의 부모가 이혼을 하고 얼마후 모친이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한다. 저우빈의 동생은 이때부터 부친과 멀어진다. 저무빈의 동생은 비록 중석유집단내에서 근무하지만, 성격이 약간은 괴퍅하여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차오용정은 그에게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잘 돌보아 주어서 저우용캉이 아주 감동한다.

 

2011년, 한 문화계의 상인이 불법작품건으로 골치거리에 휘말리게 된다. 많은 돈을 들여서 꽌시를 뚫어보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절망하고 있을 때, 한 친구가 그에게 차오용정을 찾아가보라고 권한다. 차오용정은 수안통천(手眼通天)의 능력이 있으니 분명히 이 일을 잘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만나기 반시간전까지 나는 그가 거물사기꾼인줄 알았다. 거의 만나는 것을 사양할 뻔했다." 이 상인은 이렇게 회고한다. 차오용정이 입만 열면 중남해의 누구누구와 잘 안다고 하였다. 문화계 상인의 사정을 다 듣고 난 후, 차오용정은 전화기를 들어 직접 중앙정법위의 한 관리에게 전화한다. 반시간후 그 관리는 차오용정의 집에 나타난다. 그 후에 다시 그들의 앞에서 모 성시 정법위의 주임과 통화하여 이 일을 처리했다.

 

나중에 과연 이 일은 그렇게 흐지부지 끝나버린다. 차오용정은 이 문화계 상인에게 돈 한푼 받지 않았다. "이 일은 완전히 보수를 바라고 나를 도운 것이 아니다. 그는 재주있는 사람을 아끼는 것이거나 아니면 이 정도 일은 그에게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 후에 두 사람은 교류하게 되고, "차오용정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포브스 부호랭킹에 오른 그 부호들은 나의 새끼손가락만큼도 안된다."

 

남방주말의 보도에 따르면, 1992년, 차오용정의 처인 왕원친(汪文勤)이 CCTV 해외센터 프로그램부의 편도(編導)로 들어간다. 차오용정은 자칭 "CCTV특약작가"라고 했다. 부부 두 사람은 1996년응 전후하여 CCTV를 떠나고, 1997년 캐나다국적을 취득한다.

 

2005년 차오용정은 1억여위안을 투자하여, 베이징의 첸마창후통 60호원을 매입하고, 베이징넨다이의 본사로 삼는다.

 

이것은 허우하이 깊은 곳에 위치한 전아한 주택이다. 외관상으로 보면 그저 두 동의 보통 4층건물이 있다. 그러나 건물을 올라가면, 별천지임을 알 수 있다. 1호루의 3,4층에는 수십칸의 객실이 있는데, 인테리어호화정도는 5성급호텔을 넘어선다. 서비스직원들은 모두 제복을 입고 있고, 훈련을 잘 받았다. 이곳은 차오용정이 각종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이다. 그를 찾아와서 부탁하는 사람, 병이 들어 약을 구하는 사람, 형형색색의 관리 그리고 관리와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베이징넨다이"의 내부인사에 따르면, 2011년 1년동안 4명의 성장/장관급 관리가 첸마창후통 60호원을 찾아왔다고 한다. 5,6년전에 그들은 더 대단한 내력을 지닌 노인도 접대한 바 있다. "노인이 오자, 차오용정은 그를 안마해주었다." 이 차오용정의 옛날 부하는 이렇게 말한다. 차오용정은 중의안마를 많이 연구했고, '점'을 잘 쳤다. "이때는 그가 쉽게 점을 쳐주지 않았다. 최소한 일반사람의 점은 쳐주지 않았다. 처장급이하의 간부는 심지어 직접 상대하지도 않았다."

 

첸마창후통 60호원에 사람들이 줄을 이어 찾으면서, 거의 외부인들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차오용정은 정치계,상계에 방대하고 은밀한 상업제국을 건설했고, 특이공능인사에서 수퍼부호로의 변신에 성공한다. 베이징, 쓰촨과 신장등지에서 석유, 부동산, 영시(影視) 심지어 농업까지 손을 뻗치고, 재산은 분산되고 은밀했다. "차오 라오반(사장)과 쓰촨의 관리들은 아주 잘 알았다. 은행의 캐시플로우로 보면, 그의 재산이 공개되면 분명 포스브 부호랭킹의 앞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위의 인사가 한 말이다.

 

차오용정의 딸인 차오찬(曹禪)은 뮤지컬 감독이다. 2011년에 감독한 뮤지컬 <시광당포(時光當鋪)>가 전국순회공연을 할 때 청두에서도 했다. 당시의 쓰촨성위 상위이며 청두시위 서기인 리춘청은 친히 청두예술센터로 가서 관람했다. 

 

재신망의 보도에 따르면, 2013년 7월, 경찰은 넨다이에너지의 베이징 본사를 압류하고, 은행구좌도 동결된다.

 

이때 차오용정은 타이완으로 도망쳤다. 위에서 언급한 문화계의 상인은 마침 타이완에 관광중이었고, 차오용정과 만났다. "그는 계속하여 인생을 얘기했고, 이전의 기세는 전혀 없었다." 그 상인의 회고이다. "그는 계속하여 모든 것은 공(空)이라고 하고, 회사, 재산도 모두 공이라고 했다. 그는 나에게 문학을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해 주었다."

 

상인은 당시에 기괴하게 생각했었다. 타이완에서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차오용정이 리춘청과 중석유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듣기로 이미 관련부서에 붙잡혔다고 한다."

 

소식통에 따르면, 넨다이에너지의 이익도 모두 몰수되었다고 한다: "유전뿐아니라, 차오용정의 모든 프로젝트수익은 몰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