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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저우용캉사건

다음 차례는 저우용캉인가?

by 중은우시 2013. 9. 15.

글: 왕해도(汪海濤)

 

8월 26일 오후 보시라이사건은 5일간의 재판이 끝났다. 보시라이는 즉시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여전히 진성감옥(秦城監獄)에 갇혔다. 법정은 앞으로 일자를 정해서 판결을 선고할 것이다. 인터넷에서는 11월 중공 제18기 3중전회이전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동시에, 국신판(國信辦)은 매체에 보시라이사건에 관하여 담화(淡化) 처리할 것을 요구했고, 인터넷에서 추적 평론하는 글을 싣지 말도록 요구했다.

 

판결선고전에, 중공은 아마도 맹렬한 선전공세를 펼칠 것이다. 중기위는 보시라이의 도덕적 문제있는 일부 자료를 공개할 것이고, 여론은 철저히 보시라이의 이미지를 악화시킬 것이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보시라이를 재판정으로 보낸 것은 그가 부정부패하고 뇌물수수하고, 권력을 남용하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대권을 쟁탈하려는 권력투쟁때문이다. 마오쩌둥시대에, 권력투쟁은 계급투쟁, 노선투쟁의 명목으로 해결되었다. 포스트마오쩌둥시대에는 부패단속을 도구로 삼았다. 즉, 장쩌민이 말하는 "정치문제를 경제로 처리하는 것"이다. 이번의 보시라이재판은 비록 비정치적으로 처리하고 있고, 사안을 엄격하게 경제와 직권남용부분에 제한하고 있지만, 이 사건은 여전히 권력투쟁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왕리쥔이 도망친 후 보시라이는 베이징이 상사에게 "6개항 지시"를 받았다는 것 등이다. 보편적으로 이 상사는 보시라이의 동맹자인 전 정법위서기 저우용캉이라고 보고 있다.

 

보시라이사건 개정전에, 저우용캉이 법에 따라 처벌받을 것이라는 소식은 이미 인터넷에 널리 퍼져 있었다. 저우용캉의 심복들이 속속 낙마하고, 심지어 그의 아들 저우빈(周斌)이 해외로 도망쳤다는 말까지 나왔다. 최근 소식은 홍콩의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지는 8월 30일 보도에서, 저우용캉이 부패로 조사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고, 저우용캉의 조사는 앞으로 저우용캉 및 그 가족이 석유 및 부동산거래에서 얻은 이익에 주력하게 될 것이다. 저우용캉과 관계가 밀접한 국자위주임 장제민이 조사를 받고, 며칠전 중국공산당은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4명의 중석유 경영진이 낙마하고 조사를 받고 있다고. 그중 중석유천연가스집단공사 부총경리 리화린(李華林)은 저우용캉의 비서를 지낸 적이 있다. 금년 2월 6일, 인권변호사 푸즈창(浦志强)은 저우용캉을 실명으로 고발했다. 아직까지 이것때문에 저우용캉이 골치아프다는 소식은 없지만 전 중공정법위서기는 이미 세력을 잃은 것같다.

 

보시라이사건에서, 가장 신비스러운 부분은 왕리쥔이 미국총영사관으로 들어간 것이다. 비록 왕리쥔은 이로 인하여 이미 형을 받았지만, 보시라이가 왕리쥔을 핍박하여 떠나가게 한 것이 그의 권한남용죄를 구성하는 것으로 되었지만, 왕리쥔, 보시라이 두 사람의 사건은 모두 이 부분을 명확히 얘기하지 않고 있다. 당시 보시라이가 황치판에게 지시하여 충칭의 무장경찰을 이끌고 쓰촨 청두로 법집행을 하러 가서, 미국총영사관을 포위하고, 중앙에서 파견되어온 사람들과 왕리쥔을 서로 빼앗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기소에 포함되지 않았다.

 

왕리쥔사건은 작년에 비밀리에 재판했고, 외부에서는 사건의 세부상황을 전혀 알지 못한다. 더욱 기이한 일은 이번 보시라이사건이 개정되기 전인 8월 15일, 왕리쥔사건의 재판장을 맡았던 종얼푸(鍾爾璞)가 돌연 쓰촨성 청두시 중급인민법원 부원장, 당조성원에서 면직되었다. 그가 왕리쥔사건에서 실수를 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왕리쥔사건의 재판내용을 누설한 것이 국가기밀누설이 되었는지?

 

보도에 따르면, 왕리쥔은 보시라이에게 뺨을 얻어맞았다고 한다. 공안국장에서 쫓겨난 후, 그는 일찌기 베이징의 모 인사와 논의를 했고, 지시를 받은 후, 차를 몰고 청두로 도망쳤다. 당시 왕리쥔은 한 다발의 재료를 가지고 미국총영사관으로 들어갔는데, 구카이라이가 영국상인 닐 헤이우드를 살해한 증거외에, 왕리쥔이 암중으로 수집한 보시라이에 관한 자료도 있다고 한다. 이것은 그가 공을 세운 것으로 인정받아 15년형을 받은 원인이다. 프랑스국제방송국 주상하이기자에 따르면, 충칭 고위층으로부터 들은 소문에 따르면, 당시 충칭 공안국장 부국장 궈웨이궈(郭維國)가 충칭 무경총대의 반테러돌격팀의 저격수를 영사관부근에 배치하여 왕리쥔을 사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일은 무경이 상부에 보고한 후 제지되었지만. 만일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보시라이는 살인멸구를 하려 한 것이고, 왕리쥔이 장악한 자료는 그에게 치명적인 것이다.

 

인터넷에서 이미 이렇게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왕리쥔은 평민출신이다. 그는 특권가정출신으로 겁낼 것이 없었던 보시라이에 비하여 더욱 강한 자아보호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소인물은 중공권력투쟁과정에서 지위가 아주 취약하다는 것을. 그와 같은 앞잡이식의 인물은 가장 쉽게 속죄양이 되어 희생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랴오닝이 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 바 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잘 알고 있다. 나는 관료의 입 속에 들어 있는 껌이다. 씹는 맛이 없어지면 땅바닥에 뱉어질 것이다. 누구 신발 밑창에 붙어있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왕리쥔은 권력무대에서의 자그마한 움직임에도 아주 경계심이 강했다.

 

왕리쥔은 1990년대 랴오닝 테링시에서 흑사회(조폭) 단속으로 전국에 이름을 날리면서 성공하기 시작했다. 2011년 5,6월, 왕리쥔은 보시라이를 도와 충칭이세 창홍타흑을 주도했다. 그가 한창 잘 나갈 때 돌연 그의 뒷마당에 불이 붙었다. 테링에 있는 그의 심복들, 테링시 공안국국장 궈펑제, 공안국 부국장 자오테싱등이 연이어 중기위에 끌려가서 쌍규를 당한다. 창끝이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의미심장하다. 보시라이와 왕리쥔에게 박해당해 충칭 감옥에 갇혀 있던 베이징변호사 리좡은 베이징측의 개입으로, 총칭에서 그에 대하여 기소한 것을 철회한다. 후진타오 사무실에서 친히 전화를 걸어 충칭에 사람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여 6월 11일 만기출옥후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여러가지 상황을 보면, 베이징은 이미 충칭에 대한 조치를 시작했다. 어떤 소문에 따르면, 중기위가 테링의 공안을 조사할 때, 왕리쥔이 보시라이에게 도움을 요청한 바 있다. 그러나 보시라이는 냉담했고, "테링의 일은 네 스스로 해결하라"고 한 것같다는 것이다. 왕리쥔은 간담이 서늘해진다. 보시라이가 그를 희생시킬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도 미국영사관으로 도망치기 반년전에 왕리쥔은 이미 보시라이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했던 것같다.

 

현재 인터넷에는 일종의 음모론을 퍼트리는 사람들이 있다(주로 마오파), 구카이라이가 헤이우드를 살해한 것은 보시라이부부에게 판 일종의 함정이라는 것이다. 조작인은 왕리쥔이고, 배후에는 고인이 지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음모이건 아니건, 왕리쥔은 확실히 이미 보시라이가 권력투쟁에 참여했고, 형세가 험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희생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위하여 준비를 한 것이다. 그가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보시라이부부에게 발견되었고, 결국 그와 보시라이는 등을 돌리게 되었고, 자신의 생명은 위험하게 되었다.

 

왕리쥔이 장악한 보시라이의 자료는 어떤 것일까? 사적으로 중앙지도자의 전화통화를 감청하고, 중앙지도자의 문제자료를 수집했을까? 저우용캉과 일부 군,정계의 혁명2세대들과 모의를 하였을까?

 

보시라이 재판에서 공개되지 않은 일부 최후변론은 자신에게는 리커창을 밀어내고 총리가 되려는 야심이 없었다는 변명이다. 이것은 확실히 거짓말이다. 당시 북경에는 이런 소문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가 18대에서 정법위서기를 맡아, 저우용캉의 직위를 넘겨받는다는 것이었다. 중국공산당의 방식에 따르면, 현임자에게는 후임자의 후보자를 추천할 권한이 있다. 그러므로, 보시라이가 정법위서기를 맡는다는 설은 아니땐 굴뚝의 연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우용캉이 정법위서기를 맡을 때의 권력이 다른 여덟 상임위원을 넘어서서, 정법위치국의 국면을 형성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만일 더욱 야심이 있고, 더욱 강세인 보시라이가 이 자리를 넘겨받았을 때, 다른 상임위원들은 아마도 하루하루를 지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총서기 시진핑은 아마도 자리를 보전하지 못할 수 있다. 만일 보시라이와 저우용캉이 이렇게 밀모했다면 보시라이와 시진핑간에는 너죽고 나살기식의 권력투쟁이 벌어질 것이다. 왕리쥔의 수중에는 분명히 이 분야의 증거가 있었을 것이다.

 

보시라이는 왕리쥔사건후 중앙에 패배를 인정했다. 18대에서 정치국상임위원은 바라지 않으며, 충칭에서 한번 더 일하고 싶다고. 그러나 그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당적을 지켜내지 못했을 뿐아니라, 사법재판에 회부되었다. 누군가 이렇게 추측했다. 시진핑이 이렇게 악독하게 손을 쓴 것은 아마도 보시라이가 중앙지도자를 감시했을 뿐아니라, 저우용캉과 함께 후계같은 비조직활동의 일을 안배하였거나 심지어 정변을 기도했을 수도 있다. 두 가지 사건은 지금까지도 합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고 있다. 하나는 2011년 11월 10일, 군사위주석 후진타오가 하와이에서 APEC회의에 참석하였는데, 같은 날, 청두군구 국동위 제6차전체회의에서는 군사훈련이 충칭에서 실시되었다. 국방부장 량광례를 비롯한 군대의 우두머리들이 참석했고, 진용이 방대한 것은 중공역사상 보기 드문 것이었다. 그외에 한 가지는 왕리쥔이 도망친 후, 보시라이가 윈난으로 가서 14집단군 군사진열관을 참관한 것이다. 이 집단군은 바로 그의 부친 보이보가 창건에 참여한 군대이다. 그러므로, 보시라이사건이 개정된 후, 법학자 허웨이팡(賀衛方)은 웨이보에서 보시라이가 윈난에 간 것은 어찌된 일인가라고 물은 바 있다. 만일 보시라이와 저우용캉이 정말 정변을 획책했다면, 저우용캉은 절대로 그에 대한 처벌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 두가지 사건은 정변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시진핑의 새로운 지도자집단이 들어서자마자 보시라이를 숙청할 뿐아니라, 그의 동맹과 배후까지 조사하는 것이다.

 

현재 보시라이사건은 끝나간다. 모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그의 배후인 저우용캉이 재판에 회부될 것인가의 점이다. 그리하여 그의 사건이 보시라이사건이후 또 하나의 큰 사건으로 될 것인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