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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사회

푸단(復旦)독살사건: 원한은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by 중은우시 2014. 12. 12.

글: 조림(曹林)

 

2심이 시작되려 하자, 한동안 조용했던 푸단대 독살사건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어떤 매체에서는 "푸단독살사건"의 당사자 린썬하오(林森浩)가 황양(黃洋)의 부모에게 용서를 구하는 친필 사죄서신을 공개했다. 알아본 바에 따르면, 이 사죄서신은 금년 3월 14일 사죄서신의 원본이라고 한다. 황양의 부친은 이 서신을 본 적이 없다고 밝혔고, "우리 온 집안은 용서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전에 아들의 속죄를 위하여, 금년 청명절 전날 린썬하오의 부친은 두번째로 황양의 고향인 쓰촨 쯔공(自貢)으로 갔다. 그러나 황양의 부모를 만나지는 못했다. 황양의 부친은 목숨을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황양의 부모는 아들을 잃고, 영원한 고통과 원한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린씨집안의 부친은 회한에 젖어 아들의 속죄를 빌고 있다. 역시 아들을 잃는 고통에 빠질 것이다. 이것은 독살사건이 가져다준 비극의 연속이다. 황양의 가족들이 '용서할 수 없다'는 입장은 충분히 이해된다. 린썬하오의 부친이 아들의 목숨을 위하여 속죄하려는 노력도 이해가 된다. 독살사건은 두 가정에 사라지지 않을 그림자와 원한을 남겼다. 아들을 죽인 원한은 현재 한 통이 사죄서신이나 한번의 속죄방문으로 용서할 수 있을 것같지 않다.

 

이런 침중한 장면을 보면 10년전의 마자줴(馬家爵)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속죄를 위하여, 마자줴의 부모와 누나, 할머니 4명은 우저우시 데산구 샤잉진, 저우무촌으로  "윈다(雲大)살인사건"의 피해자 샤오뤼제의 가족에게 사죄하러 갔다. 다만 샤오집안은 이 돌연 찾아온 '손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샤오씨의 양친은 마씨집안사람들을 만나기를 거절한다. 마씨집안의 4명은 나이든 할머니를 포함해서 모두 비를 맞으며 1시간여를 꿇어앉아 있는다. 마침내 샤오씨집안 사람들은 정성에 감동하여 잠시 얼굴은 보기로 한다. 그러나 그들을 집안에 들이지는 않았다. 10년이 지난 지금 마씨집안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때의 피해자가족들은 또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마음 속에 쌓인 회한과 원한은 예전처럼 강렬할까? 나는 믿는다. 최소한 이제 샤오집안사람들은 마씨집안 사람들과 만날 수는 있을 것이라고. 

 

원한은 시간이 지나야 해결된다. 용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때 매체와 여론에서 두 집안에 대하여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원한을 부추길 뿐이다. 예전의 야오자신(藥家鑫)사건에서 여론의 부추김으로 피차간의 적의가 더욱 강화되고, 양가는 서로 화해하지 못할 바도 없었고, 약간의 방식으로 보완할 수도 있었는데, 변호사가 앞장서서 세몰이를 하고 여론이 불을 지르며, 인터넷에서도 분위기를 몰고 가서, "야오자신이 죽지 않으면 법률이 죽는다"는 여론재판이 되었다. '농민'과 '군인자제'라는 신분의 여론조작으로 피차간의 오해와 원한은 더욱 깊어졌고, 용서와 화해는 아예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필자의 생각으로 오늘날까지도 아마도 그들은 이를 갈며 원한을 품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독살사건의 비극에 대하여 매체는 '뉴스'가 필요하고, 인터넷에서는 '볼거리'가 필요하다. 구경꾼들에게는 재미있는 '사건'과 눈길을 끄는 '씹을 거리'만 있으면 된다. 황양의 부모의 마음 속에 용솟음치는 것은 아마도 복수충동일 것이다.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은 냉정과 이성이다. 여론은 '원한'의 소비를 자제하고 쌍방가정이 화해할 여지를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 법률은 여론의 시끄러움에서 벗어나 사실을 근거로 법률을 준거로 하여 냉정하게 판결해야 한다. 당사자들은 원한의식을 약화시키고 냉정하게 법률의 공정한 판결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음을 헤아려보면, 황양의 부모에게 용서를 강요할 수는 없다. 이때의 참회서신이나 일가족의 속죄는 그들의 아픔을 풀어줄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하나의 용서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3년여전 <중국청년보>가 보도한 이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자아냈다. 그러나 마음 속에는 따스함과 감동 그리고 영혼을 울리는 무엇이 있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 위대한 모친이다. 6년전, 장얜웨이의 아들은 견의용위(見義勇爲, 의로운 일을 용감하게 행하다)로 다른 사람에게 피살당한다. 밤낮으로 아들을 그리며 비통에 빠져있던 모친은 아들에게 6년간 편지를 써서 매일 아들의 묘 앞에서 읽어주었다. 살인범에 대하여 뼈에 사무치는 한을 풀고서 그녀는 결국 용서를 선택한다. 그리고 조정을 받아들여 살인범을 용서한다. 그 살인범도 자신의 아들과 같이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젊은이였다.

 

6년간 연속하여 쓴 2000여통의 편지는 사람을 놀라게 만든다. 이 서신은 모친의 사랑이 위대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가 용서한 것이다. 비통에 빠진 모친이 아들의 생명을 앗아간 살인범을 용서한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이 모친을 묘사했다: 그녀의 심장에는 두 개의 심방이 있다. 하나는 피가 흐르고, 하나는 용서한다. 그렇다. 감동을 받은 우리들은 모친의 그 피가 흐르는 심장을 보았다.

 

고통으로 살고싶어하지 않던 그녀는 일찌기 가족들과 법원에 "살인상명(殺人償命), 혈채혈환(血債血還)"(사람을 죽이면 목숨으로 갚고, 피의 빚은 피로 갚는다)는 플랭카드를 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고함친 바 있다. 그녀는 판사가 모친의 '피흐르는 아들을 잃은 고통'을 알아주기를 바랬다. '주범은 즉시 총살형에 처하기를' 바랬다. 그녀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은 용서였다. 그것은 아마도 시간의 힘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살인범의 할머니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손자의 목숨을 남겨달라'고 애원하던 눈빛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저승과 이승에서 아들과 교류한 감촉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느날 아들에게 편지를 쓸 때, 용서라는 생각이 불현듯 지나갔다고 한다: "만일 이 살인한 젊은이가 죽는다면, 또 한 명의 노인이 나처럼 살아도 죽은 것만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황양의 부모에게 그 모친처럼 용서해달라고 강권할 수는 없다. 감정이나 이성이나 법률이나 모두 강요할 수 없다. 이런 마음 속의 아픔을 풀고 이런 원한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적다. 시간이 아직 마음 속의 아픔을 풀어주지 못했을 때 그렇게 요구하는 것은 가혹하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들에게 안정되고, 여론의 시끄러움에서 벗어나도록 해주는 것이다. 용서는 시간이 쌓여야 비로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