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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스포츠

야오밍의 투자곤경

by 중은우시 2013. 7. 12.

글: 강소어(姜小魚) 

 

야오밍의 투자는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순수한 상업투자이고, 다른 하나는 완전히 흥취에 따른 것이다. 야오밍의 투자 속에 후자가 더욱 많다. 아주 상세한 투자분석보고서를 앞에 두고, 그는 자신이 이해하고 흥미를 느끼는 쪽을 선택했다. 그래서 2005년, 야오밍은 300만달러의 거금을 거경음악망(巨鯨音樂網)에 투자했다. 이유는 단지 그가 음악을 좋아하고 정품을 지지한다는 것때문이었다.

 

거경음악망은 2005년 9월에 창립되어, 2006년 3월 정식으로 인터넷에 올렸다. 그 비지니스모델은 세계각지의 음반회사와 협력하여, 백만곡의 정품음악을 무료로 들을 수 있고 다운로드받을 수 있게 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했다. 일찌기 2003년 NBA에서 활약하고 있던 야오밍과 "요지대(姚之隊)"의 책임자인 장밍지(章明基)가 공동으로 300만달러를 투자하여, 거경음악망의 창업자 천거(陳戈)와 합작계약을 체결했다.

 

2008년초, 거경음악망은 구글차이나와 합작한다. 후자는 거경에 700만달러를 투자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거경의 이번 자금조달에서, 야오밍도 추가투자를 했다. 장밍지가 토로한 바에 따르면, 야오밍은 하이테크와 뉴미디어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음악을 아주 좋아하고, 인터넷을 많이 사용한다. 그래서 음악망에 투자하는 것은 야오밍에게 있어서 아주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다만 나중에, 구글음악이 중국대륙에서 부득이 퇴출한다. 음악검색기능을 폐쇄한 것은 거경에 큰 충격을 주었다. 금년 4월부터, 이 잘 알려진 웹사이트는 열리지 않는다. 오랫동안 야오밍의 명성에 의존하던 거경음악망은 주주들이 투자하도록 설득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소비자들의 정품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는데는 실패했고 마침내 폐쇄했다는 소식이 들여오게 된다.

 

중도에 쓰러진 '거경"은 경솔하게 투자한 결정이었다. 이는 야오밍으로 하여금 300만의 초기투자와 수백만의 추가투자로 그의 비지니스생애에서 난감한 장면을 맞이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음미할 만한 점은 항간의 소문이다. 2003년 나중의 거경음악망의 CEO가 되는 천거는 한 동창의 소개로 "요지대"의 책임자 장밍지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2005년 거경을 창업할 때, 장밍지와 천거는 선전에서 한번 식사를 하고 바로 합작계약을 체결했다. 야오밍과 장밍지는 공동으로 300만달러를 출자하여 이를 사업준비자금으로 삼았다. 그때의 야오밍은 아직 미국 NBA에서 농구를 하고 있었다. NBA에서 가장 떠오르는 스타였다. 야오밍은 여러 장소에서 그가 투자한 음악웹사이트를 언급했고, 이 웹사이트의 창업초기에 큰 관심을 끌 수 있게 하주었다.

 

음악웹사이트에 투자하는 외에, 야오밍이 투자한 것중에 가장 먼저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야오식당"이었다. 총투자액은 약 150만달러였다. 베이징카오야, 야오마마훈둔탕, 지쓰차오멘등은 한때 인기를 끌었던 대표요리였다. 미국의 전대통령 부시등 명인들과 NBA 선수들이 와서, 야오식당은 거기서 누구나 아는 곳이 되었다.

 

다만, 실제로 야오밍 자신은 돈 한푼 내지 않았다. 식당의 대표요리에 "YAO" 및 한자 "요(姚)"를 주제로 한 중국도장은 바로 식당의 자산과 가치이다. 여기서 언급할 점은 상해에서 개업했다가 최종적으로 문을 닫은 "야오식당"은 기실 야오밍 및 그 가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야오식당"은 야오밍의 팀이 투자한 것이 아니고, 몇몇 주주가 책임지고 운영하는 것이다. 휴스턴점포의 성공후 중국내에서 복제했다. 다만, 해외음식을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상하이에서, 미국요리를 주제로 한 식당이 그다지 인기를 끌기는 어려웠다.

 

야오밍의 장부에서 최대의 구멍은 바로 그가 일했던 팀이다: 상해동방상어구락부. 야오밍이 CBA에 투자하기 전에, 이곳은 이미 그에게 수천만위안의 손실을 가져다 주었다. 야오밍의 농구팀에 대한 기획은 일류라 할 수 있지만, 완전히 프로화한 구락부는 반프로화의 CBA리그에서는 계속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상어"도 힘을 쓰지 못했다. 여기에 최근 들어, 여러 CBA의 팀들의 오너들은 큰 돈을 쏟아붓기를 꺼리지 않았다. 걸핏하면 5,6천만위안을 투입했다. 아무런 실업도 없는 야오밍이 시너지효과를 내며 발전할 수는 없었다. 그가 CBA에 투자한 최대의 약점이 바로 이것이다. 다른 구락부는 모두 실체산업에 의존한다. 그러나 야오밍은 없다. CBA에서 야오밍은 아주 독특한 별종이었다.

 

자신의 모팀에 투자하는 것은 그의 흥취에 따른 투자라고 하는 것보다는 그저 감정적인 투자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아무리 결손을 보더라도, 야오밍의 모팀에 대한 감정을 막을 수는 없다. "우리는 여전히 생각한다. 우리의 투입은 모두 충분한 수익을 얻고 있고, 모든 비용지출은 가치있는 것이다." 상하이대상어의 총경리, 요지대의 책임자인 장밍지가 하는 말이다. "야오밍은 한번도 구락부에서 돈을 쓰는 제안을 거절한 바 없다."

 

그외에 2007년, 야오밍은 "주식구매"의 형식으로 그가 광고를 했던 허중쓰좡(合衆思壯)에 투자하여, 67.5만주를 보유했다. 허중쓰좡은 2010년에 상장한 후, 주가가 급속히 올라거서 자산가치가 한때 6천만위안을 넘었다. 어떤 사람은 야오밍을 '주식의 신'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서류상의 숫자는 당초 체결한 주식계약서에서 3년내에 매각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야오밍은 그저 주가가 계속하여 내려가고 자산이 줄어드는 것을 두눈 멀거니 뜨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2011년부터, 야오밍은 PE에 발을 담근다. 먼저 황삼기금(黃衫基金)을 창립한다. 그후 홍원기금을 인수하여 PE의 새로운 거물이 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야오밍이 보유한 두 개의 기금은 총규모가 66억위안에 달한다. 이것은 아마도 야오밍이 금융업계에 깊이 발을 담그는 신호가 될 것이다. 야오밍팀의 핵심인물인 장밍지는 홍원기금의 동사장이 된다. 왜 야오밍이 투자기금관리회사를 인수했는지에 대하여 분석에 따르면, 기금회사를 설립한 것은 투자를 더욱 전문화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동시에, 야오밍은 일찌기 "캘리포니아피트니스야오밍구락부", 베이징 통저우의 태양화호텔 및 "야오가족"포도주회사등에 투자했다. 다만 상대적으로 말해서 모두 소규모였다. 그리고 수익상황도 이상적이지 못하다. 그외에 소식에 따르면, 야오밍은 상하이, 베이징에 여러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미 가격이 올라서 야오밍이 투자한 것중 보기드문 성공사례라고 말한다.

 

짧은 몇년의 기간동안, 야오밍이 투자한 분야는 식당, 부동산, 음악, 주식, 농구구락부, 영화, 쇼핑몰사이트등업종에 걸쳐 있다. 아주 광범위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직접 지분투자하거나 심지어 PE기금관리회사를 발기하는 것은 야오밍이 이미 완전히 단일프로젝트직접투자자에서 파트너의 신분으로 변신을 완성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만일, 수익결과를 보면, 야오밍은 투장서 일종의 미망, 곤혹의 상태이다. 광범위한 투자는 야오밍에게 광범위한 수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실패한 투자에 대하여, 야오밍은 솔직히 얘기한다. 자신은 경험이 비교적 적었다고 2012년 보아오아시아포럼기간동안 그는 말했다: "이전에 투자한 이들 프로젝트는 나 자신이 선수인 때여서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리고 전문적으로 공부할 수가 없어서 일부 좌절을 겪게 된 것이었다."

 

현재까지, 야오밍의 비지니스는 그가 농구를 할 때처럼 성공적이지 못하다. 관련된 분야가 지나치게 많고, 많은 경우는 그가 잘 모르는 분야였다. 어느 쪽이 인기를 끈다 싶으면 그 쪽으로 갔다. 확실히, 이것은 비지니스에서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비지니스분야에서, 스포츠스타에서 성공한 상인로 변신한 사례는 없는가? 답은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당연히 중국체조역사상 가장 휘황한 스타인 리닝(李寧, Li Ning)이다, 리닝이 은퇴한 후 비지니스에 뛰어들었고 10년도 되지 않는 기간에 그는 중국스포츠산업발전의 여러 기적을 창조했다. 그의 이름으로 명명된 시리즈스포츠제품은 중국에서 누구나 아는 유명브랜드가 되었다.

 

지금 국제화노선을 걷고 있는 리닝의 스폰서를 받는 곳은 이미 이신바에바, 오닐, 스페인 남자농구등 일련의 국제스포츠계의 명성이 있는 선수와 팀들이 있다.  그의 성공모델은 비지니스에 종사하기를 원하는 스포츠스타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그외에, 리샤오쐉은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부터 이름을 날렸고, 체조경기에서 금메달 은메달을 많이 따냈다. 1997년 복숭아뼈 부상으로 그는 경기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퇴역후의 리샤오쐉은 사업을 선택한다. 형인 리다쐉과 함께 베이징리샤오쐉스포츠용품유한공사를 설립하여, 의류, 신발, 기자재등 스포츠용품을 취급한다. 12의 추종자만을 가졌다가 지금은 300명이 직원을 가진 오너로 되었다. 이들 체조경기장의 쌍동이 스타는 180도 변신한 후 이미 새로운 여정을 착실하게 걸어가고 있다.

 

분석에 따르면, 야오밍은 먼저 자신이 잘 아는 업종부터 시작했어야 한다고 말한다. 야오밍은 농구계에서 영향력이 크다. NBA는 중국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보는 경기중 하나이다. 작년 야오밍과 NBA 차이나는 처음으로 합작했다. 2012년 10월 11일과 14일, 마이마이 히트와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는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NBA 중국경기를 펼쳤다.

 

"요지대"는 야오밍의 브랜드구축에 성공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다만 야오밍의 상업가치를 깊이있게 개발하는데는 더 노력이 필요하다. 야오밍의 정확한 가치의 소재를 명확히 해야 한다. 동시에, 야오밍은 가장 잘 알고 가장 성공할 수 있는 업종에 주력해야 한다. 흥미에 따라 광범위하게 일을 벌여서는 안된다. 경솔하게 잘 모르는 업종에 뛰어들어도 안된다.

 

"흥취만 따르거나, 유행만 따르는 것은 퇴역한 스포츠스타들이 실패를 겪는 가장 큰 원인이다." 브랜드연구전문가이자 마케팅기획자인 왕신예의 말이다. 스타들의 사업은 모두 자신의 팀에 의존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팀은 스포츠와 문예권 중개에는 익숙하다. 다만 비지니스분야는 비전문가이다.

 

"야오밍팀의 가치는 스포츠선수의 신분인 야오밍에 대하여 상업가치를 개발하고 발굴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상업투자와 운영에서 성공했다고 하기 어렵다." 야오밍과 그 팀을 잘 아는 인사의 말이다. 왕신예가 보기에, 많은 스타의 사업은 퇴역시 축적된 인기를 소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기가 점차 약화된 후, 합리적인 모델과 방향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

 

야오밍 및 그 배후의 팀에 있어서, 어떻게 투자분야에서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을지가 시급한 일이다. 확실히, 이것은 야오밍 및 그의 팀이 자신이 잘 아는 업종부터 시작하여야 할 뿐아니라, 관련투자와 비지니스에 대한 지식을 배워서 익혀야 한다. 그리고 풍부한 투자경험과 인간관계를 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