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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당현종)

당현종의 비빈은 4만명인가?

by 중은우시 2014. 12. 12.

글: 지백수흑(知白守黑)

 

<신당서.환관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개원, 천보연간에 궁빈(宮嬪)이 개략 4만에 이르렀다." 개원, 천보는 당현종의 연호이다. 이러한 서술은 쉽게 사람들에게 당현종에게는 4만명의 부인이 있었다고 이해하게 만든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당현종은 78세까지 살았으니, 유아때부터 죽을 때까지 매일 밤 신랑이 되었고, 매일 장모를 바꾼다고 하더라도 그는 일생동안 겨우 2만8천명밖에 소비할 수 없다. '궁빈4만'은 그저 이를 증명한다: 그가 호색지도라는 것을. 이것은 역사상 당현종의 개인적인 이미지와도 부합한다. 그러나, '궁빈4만'이라는 말의 배후에는 신당서를 주편한 구양수의 장난이 숨어 있다.

 

당나라역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구양수의 이 문자는 <구당서>에서 따온 것이라는 것을. 표면적으로 보면, 그저 간결하게 서술한 것이나, 실질적으로 구양수는 머리를 굴린 것이다. <구당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개원, 천보연간에, 장안의 대내, 대명, 흥경의 3 궁, 황자의 십택원, 황손의 백손원이 있다. 동도의 대내, 상양양궁에는 개략 궁녀 4만명이 있다." 이 문자는 당현종시대의 궁녀의 업무장소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한 것이다. 당시의 궁녀는 당현종에게 봉사할 뿐아니라, 그의 자손에게 봉사도 한다. 이는 일목요연한 일이다. 대조해보면, <신당서>는 아주 미묘한 변화를 숨겼다. 첫째는 '궁녀(宮女)'를 '궁빈'으로 바꾸었고, 둘째는 궁녀의 업무장소를 삭제했다. 구양수가 이렇게 바꾸어 버린데에는 무슨 속셈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고대에 후궁의 여인은 '궁빈(宮嬪, 內宮)', '궁관(宮官)', 보통궁녀의 3가지 유형이 있다. 궁빈은 제왕의 시첩을 가리킨다. 즉 소위 '삼부인, 구빈, 이십칠세부, 팔십일어녀'이다. 궁관은 품계와 봉록이 있는 고급궁녀를 가리킨다. 궁위와 다른 궁녀를 관리한다. 나머지는 바로 차를 따르고 물을 긷고, 침상을 정리하고 이불과 요를 깔며, 물을 뿌리고 바닥을 청소하는 일반궁녀이다. 확실히 구양수는 궁녀를 궁빈으로 바꾸어 버렸다. 최하층의 궁녀의 신분을 끌어올려버려서 비빈의 반열에 그냥 포함시켜 버린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착각을 하게 된다. 당현종의 후궁에 있는 4만명의 여인 중에서 왕부에서 청소를 하는 궁녀이든 백손원에서 아이를 보살피는 궁녀이건 모조리 양귀비와 마찬가지로 모두 황제의 마누라로 취급된 것이다.

 

구양수가 궁녀의 근무장소를 지워버린 것도 이곡동공(異曲同工)의 묘가 있다. 특히, '황자십택원, 황손백손원"이라는 이 몇 글자의 속에는 무시할 수 없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당현종은 몸이 건장했고 질병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는 일생동안 아들 30명을 낳았다. 이는 그의 생육능력이 아주 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아들도 우수한 유전자를 이어받아, 이염은 55명의 아들을 낳았고, 이완은 아들딸 58명을 낳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당현종의 손자도 수백명에 이를 것이다. 통제와 관리를 위해서, 그는 일찌기 안국사 동쪽부근의 원성과 화청지에 '십왕택', '백손원'을 건설해서 그의 자손을 길렀다. 여기에서 먹고 마시고 싸는 것은 모두 궁녀들이 수발을 들었다.

 

<당회요>의 기록에 따르면, "십왕궁은 매원마다 사백명이었고, 백손원은 3,4십명이었다". '십왕택'에 입주한 사람은 실제로 14명의 왕이다. 궁녀는 근 6천명에 달하였다. "부인들 중 솜씨가 뛰어난 자는 액정에 들어갔다. 그들은 여러 행궁, 감, 목 및 여러 왕,공주에게 주었다." "천보7년, 황녀도사 만안공주를 금선관에 안치시키고, 노비들이 돌봐주는데, 공주의 예에 따라 제공해주었다."는 등의 문헌자료를 보면 당현종의 공주도 일정수량의 궁녀를 거느렸다 여기에 백손원과 더욱 거대한 궁녀무리를 거느리는 태자가 별원에 거주한다. 당현종의 자손들이 사용한 궁녀는 마땅히 만명이 넘을 것이다. 구양수는 자손들에게 봉사하는 만명의 궁녀를 모조리 당현종에 속하는 것으로 써버렸다. 이는 확실히 적지 않은 숫자이다. 오인혼동시키려는 혐의가 있다.

 

만명의 미녀를 소리없이 옮겨버려서, 후인들은 <신당서>를 읽을 때면 구양수가 고친 것에 따라 오인과 혼동을 느끼게 된다. 가장 먼저 구양수의 '사만명의 부인'설을 믿은 것은 송나라때의 학자 홍매(洪邁)이다. 그는 <용재오필>에서 이렇게 썼다: 당나라 명황(明皇, 당현종)때는 흥성했다. 백락천은 장한가에서 '후궁가려삼천인'이라고 했고, 두자미는 검기행에서 "선제시녀팔천인"이라고 했다. 그것은 많다는 뜻이다. 이를 보면, 홍매는 '삼천'과 '팔천'을 모두 허수라고 생각했다. 그는 구양수가 말한 것이 진실이라고 더욱 믿었던 것이다. 당연히 나중에 더 많은 사람들도 홍매와 같이 생각했다.

 

역대이래로 '사만궁빈'이라는 글자로 인하여 당현종은 영광스럽게도 역사상 마누라를 가장 많이 둔 황제에 등극한다. 사실상, 당현종은 자녀와 손자들이 사용한 만여명의 궁녀들을 제외하고 장안내외의 교방에도 1만1천4백9명의 교방기(敎坊妓)가 있었다. 이들 보통궁녀들 중에서 소수는 명문귀족의 딸이지만, 대다수는 일반선발되거나 헌상하거나, 죄를 지어 입궁한 출신미 미천한 여자였다. 보통의 근무장소에서 당현종과 그의 자손들을 위하여 전심전력으로 봉사했고, 온갖 일을 다 했다. 그녀들은 궁내의 비빈들과는 엄격한 등급의 구분이 있었다. '부인'이라는 명분과는 상당히 먼 거리가 있었다.

 

당현종의 자녀에 관한 사료기록을 보면, 그의 아들의 모친은 대부분 정식 명호를 받은 제도내의 비빈이었다. 딸들 중에는 비빈이 낳거나 요절한 경우를 제외하고 십여명은 모친의 성이 실전되었지만 이들 실전된 모친들은 당현종의 '외국귀비' 조야나희와 마찬가지로 궁내의 보통궁녀일 것이다. 이를 보면, 당현종의 재위기간동안 그와 잠자리를 같이한 궁중여자중에서 제도내의 비빈이 주요하고, 보통의 궁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이다. 당현종은 전설에 나오는 것처럼 '매일 신랑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현종의 후손은 만명도 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당서>의 주편 구양수는 왜 모호한 개념을 사용하여 당현종의 궁빈수를 과장했을까? 만일 신구당서를 대조해보면 답안이 나온다. 두 당서의 본기 혹은 전기는 일반적으로 모두 마지막에 결론을 내린다. <구당서>는 당현종의 일생에서의 득실을 종합하면서, 중시한 것은 사람을 뽑고 사람을 쓰는 것에 두었다. 개원연간에는 현신이 국정을 맡았지만, 천보연간에는 소인들이 득세를 한다. 개원성세의 공을 당현종이 현명하고 능력있는 신하를 기용한데서 찾았고, 안사의 난은 용인에서 실패한 데서 찾았다. 이런 평가는 객관적이고, 역사사실에 부합했다.

 

<신당서>는 표신입이(標新立異)하여, 개원연간 당현종의 '여정정사(勵精政事)"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과 동시에, 중점을 당현종일생의 실패는 집중적으로 여인에게 두었다. 그는 "천하의 모든 욕망을 다하고도 그의 즐거움에 부족해 했고, 그가 아주 사랑하는 것에 완전히 빠져버리고, 그것을 경계로 삼지도 않아서, 결국은 나를 잃고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여자로 인해 실패했다(敗於女子)"라는 네 글자로 당현종 일생을 개괄했다. 여자를 좋아하다가 나라를 망쳤으므로 당현종에게는 여자가 많아야 했다. 그래야 그러한 평가에 더욱 설득력이 있게 된다. 그래서 구양수는 <구당서>에 열거한 십왕택, 백손원을 몰래 없애버리고, 사만궁녀를 형식상 당현종의 궁빈으로 바꾸었다. 

 

당현종 일생의 실패는 용인부당때문이건, 여자때문이건 다 좋다 그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구양수는 당현종의 궁녀에 손을 대어 과장했는데, 사실은 실제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구양수가 이렇게 한 최종목적은 선의였다.그는 그저 후세의 관리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 식색무죄(食色無罪), 탐색오국(貪色誤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