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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당현종)

이융기(李隆基)가 상관완아(上官婉兒)를 살해한 역사진상

by 중은우시 2013. 4. 13.

글: 중천비홍(中天飛鴻) 

 

상관완아는 당고종때 조정중신인 상관의(上官儀)의 손녀이다. 14살때 총혜선문(聰慧善文)으로 일대여황 무측천에게 중용되어, 궁중의 문서업무를 여러해동안 관장하며, "건괵재상(巾幗宰相)"으로 불린다. 당중종때, 소용(昭容)에 봉해지고, 권세가 중천에 뜬 해와 같았다. 당시의 정단, 문단에서 모두 혁혁한 지위를 누렸고, 일찌기 널리 서관을 확대하고, 학사를 증설하도록 건의한다.이 기간동안 풍아를 주재하여, 조정을 대신하여 천하의 시눔을 품평했고, 일시간에 사신들이 그의 문하에 많이 모였다. 710년, 임치왕 이융기, 즉 나중의 당현종이 거병하여 '당융정변(唐隆政變)"을 일으킨다. 상관완아와 위후(韋后)가 동시에 피살된다. 위후의 피살은 스스로 잘못한 때문이다. 그러나 상관완아의 죽음은 후세인들이 안타까워하여 마지않는다.

 

당고종 인덕원년, 즉 664년, 재상의 지위에 있던 상관의는 당고종 이치를 대신하여 무측천을 폐위시키는 조서를 초안하였다가, 무측천에게 죽임을 당한다. 아직 강보에 쌓여 있던 상관완아와 그녀의 모친 정씨는 궁중에 배속된다. 정씨가 정성스럽게 길러주어 상관완아는 시서를 읽을 수 있게 된다. 시문을 암송할 수 있을 뿐아니라, 관료업무에 익숙해지고, 아주 총명했다. 14살이 되었을 때, 상관완아는 이미 아름답고 스스로 풍모를 갖춘다. 여기에 천성적으로 총명하고 한번 보면 잊지 않았으며, 글이 뛰어났다.

 

의풍2년, 677년, 상관완아는 무측천이 불러 궁중으로 들어간다. 그 자리에서 제목을 주고 글을 쓰러고 한다. 상관완아는 그 자리에서 고치지도 않고 순식간에 완성한다. 글은 아름답고 앞뒤의 조화가 맞았다. 특히 그녀의 서에는 아릅다워서 옥잠화와 같았다. 무측천은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그녀의 노비신분을 면해주고, 그녀에게 궁중의 조서를 관장하게 한다. 그후 무측천의 모든 제고(制誥)은 상관완아의 손에서 나온다. 얼마후, 상관완아는 무측천의 뜻에 거슬려 사형을 받는다. 그러나 무측천이 그녀의 재주를 아껴서 특별히 사면한다. 단지 경면(黥面)했을 뿐이다. 그후 상관완아는 정성을 다하여 무측천을 모시고, 무측천의 뜻에 영합하여 더욱 무측천의 환심을 산다.

 

통천원년 죽, 696년부터, 무측천은 그녀에게 백관의 상소문을 처리하게 하고 정무에 참여하게 하니, 그녀의 권세가 날로 강해진다. 신룡원년 즉 705년, 당중종 이현이 복위한 후, 다시 상관완아에게 조서의 초안을 관장하게 하고, 깊이 신임받고 소용이 된다. 그녀의 모친 정씨는 패국부인이 된다. 다음 해, 무삼사(武三思)는 위후와 안락공주등의 지지를 받아 연이어 장간지, 환언범, 경휘, 원서기 및 최현위등 오왕(五王)을 죽인다. 그는 한때 권세가 커서 황제보다 대단하였고, 불가일세한다. 상관완아는 그와 사통하며 모든 조서를 초안하면서 자주 무씨를 숭상하고 활실(이씨)를 폄하한다. 그리하여 태자 이중준(李重俊)의 분노를 산다.

 

경룡원년, 즉 707년 7월, 이중준은 좌우림대장군 아다조등과 조서를 위조하여 우림군 삼백명을 동원하여 무삼사, 무숭훈을 그의 집에서 죽이고, 그의 일당 십여명도 주살한다. 또한 병력을 이끌고 숙장문으로 쳐들어온다. 각문을 두드리고, 상관완아를 수색하여 체포하고자 한다. 상관완아는 급히 당중종과 위후가 있는 곳으로 도망쳐서 말한다: "태자의 뜻을 보니, 먼저 상관완아를 살해하고, 그 후에 다시 차례로 황후와 폐하를 살해하고자 하는 것같습니다." 위후와 당중종은 대노하여, 상관완아와 안락공주를 데리고 현무문으로 올라가서 화를 피하고, 우림군대장군 유경인에게 명하여 비기(飛騎) 이천여명을 이끌고, 태극전 앞에 머물며, 문을 걸어잠그고 방어한다. 태자 이중준은 패배하여 피살당한다.

 

상관완아는 태자 이중준의 정변위기에서 살아남고 그 이후에는 조정을 보좌하는데 더욱 힘을 기울인다. 수문관을 설립하여, 당시 조정의 사학지신들이 몰려든다. 이는 정치적 지혜가 풍부한 수단이었다. <대당신어>의 기록에 따르면, 상관완아는 "남긴 글들을 대거 수집하고, 사방의 선비들중에 응하는 자들이 만명이 되었다." 이는 자신의 정치역량을 확충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조치는 중종조정의 시창작이 날로 번성하는 국면이 형성되었다. <경룡관문기>는 이럴게 상관완아를 평가한다. "유구는 영준하고 욱흥은 글이 좋다. 국가에 글을 좋아한느 선비가 있고, 조정에 학식이 없는 신하가 없었다. 이십년간 재야에 재주있는 사람이 남아있지 않앗으니, 이것은 그녀의 힘이다." 혁혁한 정치적 지위를 활용하여 통천원년이후 궁정문단에서 상관완아는 절대적인 대권을 장악한다. 장열의 <당소용상관씨문집서>에는 이렇게 말한다: "양조전미(兩朝全美)" 이 글자는 상관완아가 무측천과 당중종 두 황제때 혁혁한 지위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수문관을 설립한 시기에 천하시문재자는 경사로 모여든다. 상관완아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 수문관에 간다. 여러번 연회를 베풀고 시를 지어 화답하면서 밤늦게까지 하고, 취하여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상관완아는 매번 당중종, 위후와 안락공주를 대신하여 여러 수를 같이 지었는데, 싯구가 아름다워 당시 사람들이 많이 전송했다. 문신재자들이 지은 시에 대하여 당중종은 상관완아로 하여금 평가하게 했고, 1위로 선정된 자에 대하여는 상을 내렸다. 당시 조야상하에서 시를 짓고 부를 짓는 것이 유행한다. 위후는 원래 시를 지을 줄 몰랐다. 상관완아가 대필하여 문신재자들도 황제와 황후의 글이 아님을 알았지만 그 자리에서는 그녀가 스스로 만든 것이라고 인정해주고 칭송했다. 그래서 위후는 상관완아를 더욱 총애한다. 그리하여 상관완아는 이 기회를 틈타, 자신보다 6살어린 병부시랑 최식(崔湜)을 자신의 면수(面首, 남총)로 삼는다.

 

최식은 정주 사람이고 그는 시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여본연조인(余本燕趙人), 병심우차직(秉心愚且直)"(나는 본래 연조 지방 사람이어서, 성격이 우직하다) 그러나, 그가 일생동안 한 행위를 보면 전혀 우직하지 않았다. 멍청하지도 곧지도 않았다. 재주는 있지만 덕은 없었다. 그의 품행은 두 가지 성어로 개괄할 수 있다. 하나는 견풍사타(見風使舵, 바람부는대로 방향을 돌린다), 다른 하나는 탐득무염(貪得無厭, 욕심이 끝이 없다). 최식은 38수의 시를 남겼다. 많은 것은 말 위에서 읊은 것이다. 매번 조회가 끝나면 말을 타고 단문을 나서는데, 그는 집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말을 타고 천천히 가면서 시를 읊었다. 시가로 긴장된 신경을 풀려 한 것이다.

 

당시 최식은 젊은 나이에 재주가 많았다. 상관완아와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지금 그들은 부부로 엮여졌으나 상관완아는 만족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최식은 궁밖에 있고, 그녀는 궁내에 있으며, 궁안은 금지이므로 출입이 불편했다. 그리하여 상관완아는 궁밖에 집을 두기를 청하였다. 당중종은 사람을 보내어 상관완아의 별원을 지어주고, 연못을 파고, 돌을 쌓고, 조각과 장식을 해준다. 집안에는 누각과 정자를 두고 정원과 회랑도 만든다. 없는 것이 없었고, 아주 운치가 있었다. 당시 낙양제일가였다. 상관완아와 최식은 이때부터 매일 원앙희욕(鴛鴦戱浴)한다. 최식의 형제인 최리(崔莅), 최액(崔液), 최탁(崔濯)도 모두 잘생신 청년들이었다. 최식은 그들을 궁중으로 끌어들여 같이 상관완아와 밀회를 즐겼다. 얼마후, 최식은 다시 관리선발때 잘못한 일이 많아서, 어사 이상은에게 탄핵을 받아 외주사마로 좌천된다. 상관완아와 안락공주가 중간에 도와주어서 관직은 원래의 직위를 유지한다.

 

경룡4년, 즉 기원710년, 태평공주의 세력이 커진다. 상관완아는 다시 태평공주에 붙는다. 6월, 당중종은 위후와 안락공주에 독살당한다. 상관완아와 태평공주는 함께 유조를 초안하여, 온왕(溫王) 이중무(李重茂)를 황태자로 하고, 위후를 지정사로, 상왕(相王) 이단(李旦)은 참결정무(參決政務)로 한다. 7월, 임치왕 이융기가 우림군 장병을 이끌고 궁중에 들어간다. 위후와 그 일당을 죽인다. 상관완아는 초를 들고 궁인들을 데리고 맞이한다. 그리고 그녀와 태평공주가 초안한 유조를 유유구(劉幽求)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이융기에게 전해주고 죽음을 면하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유유구는 그녀가 완곡하게 말하고, 가련해 보이는 것을 보자 그렇게 하겠다고 응락한다. 바로 이때 이융기가 입궁하고, 유유구는 유조 초안을 바친다. 그리고 상관완아를 대신하여 봐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이융기는 이렇게 말한다: "이 비녀는 요망하고 음탕하여 궁정을 어지럽혔다. 어찌 가볍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오늘 주살하지 않으면 후회막급할 것이다." 그리고 상관완아를 주살한다. 그렇다면, 이융기는 왜 상관완아를 반드시 죽이려 했을까? 단순히 그 자신이 말한 것처럼, "이 비녀는 요망하고 음탕하여 궁정을 어지렵혔기" 때문일까? 이융기가 상관완아를 죽인 배후에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 것일까?

 

상관완아의 일생을 살펴보면, 비록 다채롭기는 하고, 기복이 있고, 설명화염이 있을 뿐아니라 재화횡일도 있다. <경룡문관기>에 따르면, 상관완아는 천성과 자질이 총명하고 기민하여, 어렸을 때 궁중에서 두드러졌다. 그녀는 총명하고 기민하여 재화가 남달랐다. 무측천이 그 소문을 듣고 시험을 해보았더니 붓을 들어 바로 글을 이루었다. 상관완아는 글을 잘 썼을 뿐아니라 관료업무도 잘 알았다. 그리하여 무측천의 신임을 점차 얻는다. 그리하여 상소문의 검토와 정령의 초안에 관여한다. 이렇게 무측천의 무주왕조의 핵심인물이 된다. 당중종 이현이 복위한 후에도 여전히 상관완아의 정치적 능력을 활용했다. 그리하여 다시 황제의 문서를 만들며 깊이 신임을 받고, 소용에 봉해진다. 소용은 구빈중 하나이다. 당시 후궁의 지위는 황후의 바로 아래였다. 상관완아는 이때부터 황비의 신분으로 내정과 외조의 정령문고를 관장한다. 그녀의 정치지위는 무측천시대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확실히 그녀 정치생활의 최전성기를 맞이한 것이다.

 

<구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관례에 따라, 조정의 글은 모두 유학자가 초안한다. 무덕, 정관연간에는 온대아, 위징, 이백약, 잠문본, 허경종, 저수량이, 영휘연간에는 허경종, 상관의가 모두 불려가서 초안했다. 건봉연간에는 유의지, 유위지, 주사무, 원만경, 범리빙이 모두 불려가서 조서를 썼다. 이들은 자주 북문에서 불려 들어가기를 기다렸고, 그리하여 북문학사로 불린다. 무측천이 집권했을 때는 소미도, 위승경이 모두 궁중에 불려다녔다. 당중종때는 상관소용이 혼자서 이 직을 담당한다. 위에 열거한 사람들은 모두 조정의 중신들이고 일대의 문종이다. 이와 비교하면 상관완아는 혼자의 힘으로 사방의 상소문을 검토하고, 조정의 정령을 초안했다. 그녀의 정채적 재주와 문학적 수양은 이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상관완아가 그녀의 총명한 재지를 가지고, 무씨, 위씨, 이씨등 각대 정치세력이 사이를 오갔고, 이를 통하여 국가대권을 장악했지만, 그녀는 어쨌든 자잘한 소용에 불과했고, 자신의 세력은 없었다. 조정에서의 정세변화는 그녀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경룡4년 즉 710년 5월, 당중종이 돌연 사망한다. 이는 상관완아로 하여금 위기를 느끼게 만들었다. 위후는 대권을 독단하고자 했고, 상관완아로 하여금 유조를 초안하게 한다. 첫째, 16세된 이중무로 하여금 황제를 계승하게 한다. 둘째, 위후로 하여금 보정하게 한다. 이는 당년의 무측천과 마찬가지로 군국대사를 재결하는 권한을 가지는 것이다.

 

다만, 상관완아는 위후가 대국을 장악할 충분한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이당황족의 역량은 여전히 강대했다. 이중준의 정변은 이미 그녀에게 충분한 경고를 했다. 그래서 상관완아는 태평공주와 연락한다. 이때의 태평공주는 조정에서 이미 거족경중(擧足輕重)의 지위를 가졌다. 그녀도 상관완아와의 합작을 기꺼이 원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밤을 세워 위후가 상관완아에게 초안하게 한 유조와는 다른 내용의 유조를 초안한다. 이 유조의 중점은 3가지 내용이다. 제1조, 온왕 이중무를 황태자로 한다. 제2조, 위황후는 지정사(知政事)로 한다. 셋째, 상왕 이단을 참모정사(參謀政事)로 한다. 그러나 위후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녀는 무측천을 본받아 황제가 되고 싶었다. 그녀는 내각의 요직, 내외의 병권 그리고 중앙금군등 모든 요직에 자신의 일족과 심복을 앉힌다. 이는 이당황실로 하여금 거대한 위기의식을 느끼게 만들었다. 태평공주와 임치왕 이융기는 먼저 손을 쓰기로 결정한다.

 

그해 7월 21일, 이융기는 병력을 이끌고 내궁으로 들어간다. "위씨가 선제를 독살하여, 사직을 위기에 빠뜨려서, 오늘 저녁에 여러 위씨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대부분의 우림군은 창끝을 거꾸로 돌려 위후일당은 미처 대비할 수가 없었고, 모조리 주살당한다. 이것이 역사상의 '당륭정변'이다. 위후와 관계가 밀접했던 상관완아도 주살당하는 대열에 낀다. 상관완아는 초를 들고 궁인을 이끌고 영접했고, 그녀와 태평공주가 함께 초안한 조서를 유유구에게 보여주며 자신은 이당황실편이라고 얘기한다. 유유구도 유조를 이융기에게 보여주며 은혜를 베풀어줄 것을 간청한다. 그러나 이융기는 상관완아를 용서하지 않았다.

 

당시 이융기의 명령에 우림군장병들은 신속이 명을 따른다. 궁성의 방어는 공격하기도 전에 스스로 무너졌다. 위후와 안락공주는 모두 피살되었다. 기실 이융기의 이번 정변에서 죽이고자 한 세번째 사람이 바로 상관완아이다. 다만, 상관완아는 위기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이라는 소리가 들려오는 와중에도 자신은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엇다. 그리고 궁녀들에게 줄을 맞추어 서라고 지시하고 조용히 촛불을 들고 유유구를 맞이한다. 이 광경에 유유구는 깜짝 놀란다. 다만 지자천려, 필유일실이다. 원래 당초 초안한 그 조서가 자신과 위후는 공모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조서는 그녀의 살신지화를 부른다. 왜냐하면 이융기는 자신의 부친 상왕 이단을 황제로 올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관완아가 초안한 조서에는 상왕이단이 단지 '참모정사'였다. 비록 유유구가 간청했지만, 이융기는 필살령을 내린다. 일대재녀 상관완아는 이렇게 이융기에게 죽임을 당한다.

 

기실, 상관완아는 정변에서의 계획이 아주 주도면밀했다. 그녀는 일찌감치 태평공주에게 연략했다. 그러나, 그녀는 병력을 이끌고 궁중에 들어와서 살벌하게 처단하는 이융기를 생각지 못했다. 이융기는 비록 태평공주와 같이 위후를 상대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외에, 상관완아는 계속되는 정치투쟁때 양편에 줄을 대었다. 이는 그녀의 총명함을 보여주고, 심기가 뛰어남을 보여준다. 다만 이는 그녀의 정치도덕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낸다. 그녀는 정치적인 지조나 입장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번 정변에서 상관완아는 스스로의 총명함에 스스로를 망친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유조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는 구명도초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목에 들이댄 날카로운 검이 되어 버린다.

 

상관완아의 기복있는 인생궤적을 보면, 그녀가 권력을 무한숭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바로 권력이 그녀의 일생을 망쳤다. 상관완아는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할아버지 상관의사건에 연루되어, 부측천에 의하여 강제로 궁중에 노비로 들어간다. 그녀는 만인지하의 노비가 된 것이다. 나중에 무측천의 인정을 받아 만인지상의 일대여황의 심복이 된다. 이러한 경력은 그녀에게 하나의 이치를 깨닫게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권력이 자신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것이다. 권력은 사람에게 부귀영화도 주고, 사람을 비명에 죽게도 만든다. 이런 권력에 대한 숭배는 혈해심구를 지니고 있던 상관완아로 하여금 무측천이 자신의 부친을 죽인 원수라는 것도 잊게 만든다. 그리고 기꺼이 그녀를 위하여 죽어라 일한다. 상관완아는 무측천의 사후에 당중종 이현에 의탁한다. 그리고 정치생애의 최고봉에 오른다. 이것은 상관완아가 험악한 정치투쟁에서 생존철학을 익혔다고 볼 수 있지만, 그녀 정치생활에서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상관완아의 시작인 "세세년년상호필(歲歲年年相扈蹕), 장장구구낙승평(長長久久樂承平)"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권력투쟁의 소용돌이에 들어간 일대재녀의 내심은 평정한 생활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생활에서의 험악함은 상관완아로 하여금 그 속에 끌려들어가 발을 뺄 수 없게 만들었다.

 

당연히 동탕의 시대에 승평상화의 즐거운 일은 있을 수 없다. 한때 잘나가던 홍매화도 시들 때가 있는 법이다. 궁중이 생활은 비록 풍광이 무한하지만, 세월은 쉽게 흘러가고 홍안은 쉽게 늙는다. 꽃과 같이 아름답던 미인도 인노주황의 날이 오는 법이다. 성공한 자에게도 실패한 때가 오는 법이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상관완아는 비록 실패자이지만 적지 않은 동정을 받았다. 그녀가 죽은 다음 해에 상관소용의 신분은 회복된다. 그리고 '혜문'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이융기가 즉위한 후 여전히 그녀의 문재를 그리워하여 널리 그녀의 시문작품을 모집하여 문집 이십권으로 편찬한다. 이렇게 하여 일대의 광세재녀는 역사의 긴 강에 묻히지 않을 수 있었다. 당덕종 정원 연간에 여온은 일찌기 <상관소용서루가>를 만들어 이 재능이 뛰어난 '건괵재상'의 문학생활의 편단을 보여주었다. 상관완아는 당나라역사에서 아주 매력있는 여성이다. 비록 그녀도 한때 영화부귀와 무상권력을 누렸지만, 그녀는 여전히 황제, 황후 내지 공주의 뜻에 영합해야 했다. 그 배후의 고생은 아마 그녀 자신만이 알 것이다. 일대의 총명하기 그지없는 광세재녀가 궁중투쟁의 와중에 비명에 죽을 액운을 지녔다 이는 사람들이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