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소가노대(蕭家老大)
당나라때, 정변이라는 판도라상자를 열어제낀 사람은 당태종 이세민이다. 태자 이건성과 당시 아직 진왕(秦王)으로 있던 이세민은 서로 상극이었다. 이세민은 결국 현무문에 복병을 두고 태자 이건성과 셋째동생 이원길을 주살한 것이다. 3일후 이세민은 태자가 되고, 2달후 당고조 이연은 이세민에게 황위를 선양한다. 역사에서는 그를 당태종으로 부르고, 이번 정변을 사학자들은 "현무문사변"이라고 부른다. 이융기의 정벼노가 등극은 거의 증조부인 이세민과 닮아있다. 이를 보면, 이융기는 그의 증조부를 얼마나 존경하고 깊이 연구했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융기는 왜 제2차 현무문사변(역사에서는 "당륭지변(唐隆之變)"이라 함)을 일으켰을까? 그리고 어떻게 정변을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이제 그 역사의 덮인 안개를 걷어보기로 하자.
이융기는 역사에서 당현종이라 부른다. 당명황(唐明皇)이라고도 불린다. 그는 44년간 황제로 재위했고, "개원성세"를 창조한다. 또한 "안사의 난"도 그로 인하여 일어난다. 그는 중국역사상 지명도가 가장 높고 이야기거리가 가장 많은 황제중 하나이다. 다만 이융기는 모친의 배에서 나올 때부터 태자는 아니었다. 그의 부친 이단(李旦)은 당고종 이치의 여덟째 아들이다. 그는 이단의 여섯 아들중 셋째이다. 고대의 적장자 승계라는 일반원칙에 따르면, 이 부자 두 사람은 황제가 될 자격이 없다. 다만 사정은 기묘하다. 대당왕조는 개국때부터 시작하여 그때까지, 황장자의 신분으로 황제에 등극한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융기는 어떻게 황제가 되었는가? 이것은 "당륭지변"부터 얘기해야 한다.
신룡원년(705년), 장간지(張柬之)등이 "신룡혁명"을 일으켜서 혁주복당(革周復唐)한다. 그리고 당중종 이현을 모셔와서 황제에 다시 앉힌다. 이현은 멍청한 황제였다. 마누라를 다스리지도 못했고, 딸도 너무 사랑했다. 그래서 그녀들이 마음대로 굴도록 놔두었다. 경룡4년(710년) 육월, 이현은 여황이 되기를 꿈꾸던 처와 황태녀가 되고 싶었던 딸에게 독살당한다. 이 사건은 일찌감치 이를 못마땅히 여기고 곁에서 기회만 엿보고 있던 이융기와 그의 고모 태평공주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리하뎌 잔혹한 궁중정변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현이 죽은 후, 위후(韋后)는 16세된 이중무(李重茂)를 황태자로 앉힌다. 곧이어 다시 황제로 앉힌다. 자신은 무측천을 본받아 임조칭제(臨朝稱制)한다. 이어서 이중무를 죽을 밀모를 꾸민다. 그리고 다시 상왕(相王) 이단과 태평공주를 제거하고자 한다. 무측천이 당왕조를 주왕조로 바꾼 역사를 재현하고자 한 것이다. 위후는 스스로 인심이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5만의 병마를 동원하고 위씨일족이 나누어 지휘하게 하며 궁정을 지켰다. 바로 이 검발노장(劍拔弩張), 일촉즉발의 순간에 평소 위씨를 가까이서 따르던 병부시랑 최일용(崔日用)은 이융기가 평소에 우림군의 호걸들과 깊이 사귀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는 위후를 따라 당왕조를 뒤집으려하게 되면 큰 화가 닥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암중으로 보창사화상 보윤(普潤)으로 하여금 임차왕부로 가게 하여 이융기에게 이러한 사실을 밀고한다. 상황이 긴급해지자, 이융기는 즉시 몸을 일으키며 말한다: "일을 늦출 수가 없다. 화상은 먼저 절로 돌아가라. 그리고 최일룡에게 말하라. 즉시 행동하라고."
곧이어 이융기는 태평공주부로 간다. 비록 위씨가 경성의 경비를 엄중하게 하였지만, 이당황실의 행동까지는 감히 제한하지 못했다. 그녀가 어찌 이융기가 일찌감치 과의(果毅, 금군장령의 직책) 진현례(陳玄禮), 갈복순(葛福順), 전조의 읍위(邑衛) 유유구(劉幽求), 어원총감 종소경(鍾紹京), 장상과의(長上果毅) 마사종(麻嗣宗), 만기과의(萬騎果毅) 이선부(李仙鳧)등을 이미 포섭하을 줄을. 이융기는 태평공주와 밀모한 후, 태평공주가 아들 설숭간(薛崇簡) 및 유유구, 마사종등을 궁중으로 들여보낸다. 궁중으로 들어가기 전에, 설숭간등은 이융기에게 묻는다. "상왕에게 말씀드릴까요?" 이융기가 대답한다: "우리들이 이 일을 하는 것은 사직을 위하여 순직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이 성공하면 복은 상왕과 공주에게 돌아갈 것이고, 일이 실패하면, 내가 죽으면 되는 것이고 상왕에게까지 연루되지 않게 하겠다. 지금 상왕에게 말씀드려서 상왕이 동의하면 위험한 일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고, 동의하지 않으면 대계를 망치는 것이다."
그 때 어원총감 종소경은 어원에 있었다. 관사인이 그에게 보고하기를 "누군가 만나뵙기를 청합니다"라고 한다. 종소경은 마음 속으로 임치왕이 이미 도착했다는 것을 알고, 즉시 행동에 들어간다. 그는 오히려 주저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의 처인 허씨는 그의 모습을 보고 말한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 하면 신이 반드시 도울 것이다. 그리고 공모하여 이리 결정되였으니, 지금 하지 않더라도 화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종소경은 그제서야 확연히 깨닫고 급히 뛰어나가 이융기를 만난다.
이융기는 이때 우림의 장병이 모두 현무문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밤의 장막이 내려오자, 과의 갈복순, 이선부는 이융기가 머무는 곳으로 와서 명을 기다린다. 이경에 이르자, 읍위 유유구가 바깥에서 들어와 말한다: "천성(天星)이 비처럼 흩어져 내립니다. 하늘의 뜻이 이러하니 시기를 놓쳐서는 안됩니다1" 갈복순은 임치왕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는 것을 보고는 검을 뽑아들고 우림영으로 들어가서 먼저 위예(韋睿, 위후의 친척동생)를 죽인다. 우림군은 그 모습을 보고 갈복순을 따라 위파(韋播), 고숭(高崇, 위후의 일당)를 죽인다; 관망하던 일부 우림군 두목들에게 갈복순이 크게 소리친다: "위후는 선제를 독살했고, 그 죄는 삼족을 멸해야 한다" 우림군은 평소에 이미 위후에게 불만이 많았다. 갈복순의 그 말을 듣자, 모두 그의 명을 따른다. 그후 여러 군인들이 유유구와 함께 이융기를 모시고 어원남문을 나선다. 종소경은 이백여명의 어원의 장인을 이끌고 호위를 따라간다. 이융기는 갈복순에게 좌만기(左萬騎)를 이끌고 현덕문(玄德門)을 공격하게 하고, 이선부에게는 우만기(右萬騎)를 이끌고 백수문(百獸門)을 공격하게 한다. 그리고 능연각(凌煙閣)의 앞에서 회합하기로 약속한다. 이융기는 우림병과 금원장인을 이끌고 현무문밖으로 간다.
종루에서 삼경을 알린다. 갈복순과 이선부는 모두 이미 관문을 돌파하여 궁안으로 들어갔다. 이융기는 사람들 소리가 나는 것을 보고는 좌,우만기가 이미 돌파에 성공했다는 것을 안다. 그리하여 우림군과 금원장인을 이끌고 쳐들어간다. 중종재궁(中宗梓宮)을 지키던 위병들은 위후와 종초객(宗楚客)을 죽이라는 말을 듣고 모두 갑옷을 입고 창을 들어 호응한다.
위후는 궁밖이 시끄러운 것을 듣고, 자신을 죽이겠다고 소리치는 것을 듣고는 마음 속으로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른다. 이때, 좌우의 궁인들은 모조리 도망쳐서 흩어져 버리고, 그녀는 혼자서 황급히 비기영(飛騎營)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위후의 악명은 일찌감치 비기영에도 퍼져 있었다. 난군중 누군가 이 당중종을 모살한 여인을 보고는 칼을 들어 그녀를 죽여버린다. 그리고 수급을 베어 이융기에게 바친다. 궁중에서 마침 눈썹을 그리고 있던 안락공주(安樂公主)도 난군에 죽임을 당한다. 궁인을 이끌고 이융기를 영접한 상관완아는 이융기에 의하여 깃발 아래에서 참살을 당한다.
전조읍위 유유구는 이중무가 여전히 태극전에 있는 것을 보고는 말한다: "오늘 밤에 여러 사람들이 상왕을 황제로 모시기로 했다. 너는 어찌 아직도 가만히 있느냐" 이융기는 유유구를 제지하고, 궁중과 수문(守門)의 위씨일족과 위씨의 심복인 자를 찾아내어 모조리 죽여버리도록 명령한다. 새벽이 되자 내외가 모두 평정된다.
이융기는 이단을 만나서, 머리를 숙여 미리 고하지 못한 죄를 사죄한다. 상왕은 아들이 피곤으로 기진맥진해있으며, 옷에 피가 가득 묻어있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켜 아들을 안으며 눈물을 흘린다: "사직종묘가 땅바닥에 떨어지지 않은 것은 너의 공이로구나."
병부시랑 최일용은 당황실에 대한 충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병력을 이끌고 성남쪽의 위씨 집단주거지로 가서 위씨일족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강보에 쌓여있는 사내아이까지도 모조리 죽여서 남기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경룡4년(710년) 육월 이십일, 즉 이현이 죽은지 17일만에 발생한, 이융기가 고모인 태평공주와 연합하여 위후와 그 일당을 모조리 섬멸한 또 한번의 현무문사변이다. 괴뢰황제 이중무도 곧 물러나고, 상왕 이단이 다시 등극한다. 정변공신 이융기는 평왕(平王)에 봉해지고 전중간(殿中監),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 겸압좌우만기(兼押左右萬騎)의 직위를 받는다.
누구를 황태자로 세울 것인가에 관하여 이단은 일찌기 장남 이성기(李成器)와 셋째아들 이융기의 사이에서 망설인 바도 있었다. 왜냐하면 이성기는 일찌기 황태자에 오른 적이 있고, 자신의 모친인 무측천이 당왕조를 주왕조로 바꿀 때 교환으로 얻어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융기는 자신을 새로 황제의 자리에 앉게 해준 큰 공로가 있다. 또한 금군을 장악하고 있고, 여러 신하들의 옹호를 받고 있다. 이융기는 쇼에도 능했다. 그는 일찌기 여러 사람이 함께 잘 수 있는 큰 침대를 만든 바 있다. 이단이 그에게 무엇에 쓰려고 만들었냐고 물어보니, 그는 형제들과 술마시고 얘기하다가 밤이 늦으면 함께 자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단은 이에 대하여 칭찬을 하였을 뿐아니라, 그가 태자로 되는데 점수를 딴 것이 된다. 이성기는 스스로 이융기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으끼고, 조상의 교훈을 본받아, 재삼 태자의 자리를 양보한다. 경운원년(710년) 칠월, 셋째인 이융기는 원하는대로 황태자의 보좌에 오른다.
이융기의 정변과 그의 증조부 이세민의 정변이 다른 점이라면, 이세민은 수족상잔의 정변이므로 2개월후에 황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융기는 위후일당을 제거하는 정변이었고, 형제간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리하여 3년이 되어서야 황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융기가 황태자로 있던 2년여의 기간동안, 적지 않은 풍파가 있었다. 다행히 하눌이 보우하여, 황제에 오를 수 있었다. 선천2년(712년) 팔월, 당예종 이단은 황태자 이융기에서 황위를 넘겨준다. 그는 연호를 개원으로 바꾼다. 이때부터 여러번의 우여곡절끝에 당왕조는 제2의 치세를 열었다. 개원성세는 대당왕조를 번영창성의 전성기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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