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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당현종)

당현종(唐玄宗) 이융기(李隆基)는 왜 태자 이영(李瑛)을 죽였는가?

by 중은우시 2022. 1. 4.

글: 정호청천(鼎湖聽泉)

 

자고이래로 황제의 후궁은 투쟁지수가 아주 높은 곳이다. 역사의 안개를 걷어내면 당현종 이융기가 하루에 친아들 3명을 죽여버린 심층적인 원인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이익이 관련되어 있다. 내 고기를 건드리면 가까운 자라도 죽여버린다!

 

기본적으로는 이렇게 간단한 것이고,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 재수없는 세 아들이 돌연 멸정지재(滅頂之災)를 당한 것을 자세히 파악하려면, 역시 그들 부모의 사적인 관계가 좋은지 아닌지 그리고 조정의 각종 이익집단의 힘겨루기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당연히 독립적인 사건은 아니다. 감정과 정치투쟁이 가열된 결과이다. 이 세계에는 확실히 아무런 이유없는 사랑은 없다. 또한 아무런 이유없는 원한도 없다. 위인의 명언은 항상 맞아떨어진다. 천하는 모두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태자 이영의 생모는 조려비(趙麗妃)이다. 그녀는 이융기가 황제에 오른 후 후궁제도를 개혁하여 이전의 '사부인'제에서 '삼부인'제로 바꾼 적이 있는데, 명호가 비교적 독특한 여비로 책봉되었다. 원래 그녀는 노주(潞州)의 가기(歌妓)였다. "재주와 용모가 뛰어나고, 노래와 춤을 잘했다" 어쨌든 노주의 꽃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예술가인 이융기는 당시에 노주별가(潞州別駕)의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태자로서 지방의 관직을 가지고 지방의 업적을 쌓도록 해주는 것이다). 당연히 이 미모와 재주가 뛰어난 미인을 모를 수가 없다. 어쨌든 조여비는 이융기가 무혜비(武惠妃)와 양귀비(楊貴妃)를 만나기 전에 그의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든 미녀였다. 서로간의 감정을 쌓기도 전에 바로 그녀를 첩으로 들인다. 그리고 한때 엄청나게 총애한다. 그리하여 그녀의 부친 오빠등도 모두 '일인득도, 계견승천(一人得道, 鷄犬昇天)'으로 속속 큰 관직을 받는다. 그녀가 낳은 아들 이영은 후계자인 태자에 오른다. 그녀는 미색으로 군주를 모신 성공적인 모범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경쟁적수는 생기는 법이다. 특히 황제의 후궁과 같이 이익에 대한 촉각이 특별히 발달한 정치의 부중심지는 그러하다. 이건 그저 규율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모두 알다시피, 중천에 뜬 해와 같았던 조여비는 총명하고 아름다우면서 음험하고 악독한 새로운 미녀 무혜비에게 밀린다. 그리고 조여비가 총애를 잃으면서 이융기가 임치왕(臨淄王)으로 있을 떄 거두었던 총비 황보덕의(皇甫德儀, 악왕(鄂王) 이요(瑤)의 모친), 유재인(劉才人, 광왕(光王) 이거(琚)의 모친)등 세 명의 임치출신의 미인은 모조리 총애를 잃어버린다. 하늘에는 풍운을 예측할 수 없고, 화와 복은 무상한 법이다. 태자의 귀한 자리에 있는 이영도 날로 은총이 줄어든다. 이때 황제에게서 가장 총애를 받던 아들은 나중에 비극적인물이 되는 수왕(壽王) 이모(李瑁)였다.

 

이는 깊은 원한의 씨를 심은 것이다. 태자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그는 피와 살이 있고 총명한 왕자였다. 그래서 자주 '같은 천애윤락인(天涯淪落人)인 이요, 이거와 연회를 열어 함께 부친의 풍류와 박정함, 그리고 무혜비의 음험하고 독랄함을 비판하곤 했다.

 

이런 말이 있다. 천하에 새지 않는 말은 없다. 하물며 임치파인 세 왕자가 자주 시위하듯이 모여지낸다. 그들이 사적으로 무엇을 하는지는 그다지 많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무혜비는 관용인후하지도 않고 마음이 올바르지도 않다. 그녀는 머리를 굴려 자신의 아들인 수왕 이모를 태자로 앉히고 싶어했다. 그래서 이들이 자주 모이는 것은 임치파 태자당을 칠 구실과 기회가 되었다. 당시 두각을 드러내고 싶어하던 신하 이임보(李林甫)는 무혜비의 도움을 받아 실권파 재상인 장구령(張九齡)과 맞서고자 했다. 졸지에 조정의 정치형세에 풍운이 일어난다.

 

어쨌든 이것은 아주 복잡한 정치게임이다. 자칫 잘못하면 여러 명의 목숨이 날아갈 일이다.

 

과연 무혜비는 무간도를 시전하여, 사위 양회(楊洄, 그 운나쁜 수왕 이모는 바로 양회의 혼례식때 양옥환을 알게 된다)는 장모의 지시를 받아 간세가 되어 임치파의 내부로 들어가서 '유용한 정보'를 수집한다. 즉 태자가 그의 일당과 한 언행을 수집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살을 붙여서 태자를 폐위시키고 싶어하는 무혜비에게 보고한다. 그리하여 무예비는 마치 보물을 얻은 것처럼 그 내용을 황제에게 보고한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한다: "태자가 일당과 결탁하여 우리 모자를 죽이려 합니다!"

 

무혜비는 대신들의 반대로 황후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그녀는 나라를 어지럽힌 무삼사(武三思)의 갈래였다. 자신은 황후에 오르지 못했지만, 아들을 태자에 앉힌다면 '실지동우(失地東隅), 수지상유(收之桑楡)'라 할 수 있다. 당연히 그녀는 황제에게 얘기해서 황제가 태자를 폐위시키게 할 능력이 있었다.

 

이융기는 정의(情義)를 중시하는 사람이다. 그가 사랑하는 무혜비가 이렇게 말하자 당연히 태자 이영에 대한 실망이 극에 달한다. 심지어 불같이 화를 내며, 앞뒤 가리지 않고 시비도 따지지 않고 바로 그를 폐위시킨다. 무혜비는 당연히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거의 성공이 가까웠을 때, 갑자기 이를 가로막는 자가 나타난다. 그는 바로 개원시기 최후의 현상(賢相) 장구령이다.

 

무혜비의 소행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장구령은 더더구나 그녀의 야심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전에 여러번 무혜비는 그에게 수왕 이모가 태자에 오르는 것을 동의해달라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요구한 바 있다. 그러나 장구령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번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이융기에게 이렇게 말한다: "태자와 여러 왕은 매일 황상의 훈계를 잘 들어 천하가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폐하는 황위에 오른지 오래 되었고, 자손도 번성하고 있는데, 어찌 하루아침에 세 아들을 버리려 하십니까. 옛날에 진헌공(晋獻公)은 폐희(嬖姬, 총애받는 여자)의 참언에 혹하여 신생(申生)이 우울하게 죽었고, 나라는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한무제도 강충(江充)의 무고로 태자에게 화를 미쳐 경사에 피바람이 불었습니다; 진혜제에게 현명한 아들이 있는데 가후(賈后)가 참언하여 결국 죽어버립니다; 수문제도 황후의 말을 듣고 태자 용을 폐위시켜 결국 천하를 잃었습니다. 지금 태자는 아무런 잘못이 없고, 두 왕은 현명합니다. 부자의 도리는 하늘이 내린 것입니다. 비록 잘못이 있더라도 가려주어야 합니다. 폐하께서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결국 박고통금의 대학자 겸 대시인 장구령의 간언은 절대로 역사학자출신의 '간언의 신'이라 할 수 있는 위징이 전고를 들어 하는 간언보다 약하지 않았다. 이 짧은 백여자의 말 속에 여희, 강충, 가남풍, 독고황후등 4개의 전고를 들어 이융기에게 태자를 폐위시키지 말 것을 설득한다. 간명한 말 속에 이유가 충분하다. 이융기가 아무리 기분이 좋지 않더라도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무혜비는 헛고생만 한셈이다. 투계불성식파미(偸鷄不成蝕把米).

 

여희가 신생을 해친 이야기는 아주 유명하다. 무혜비의 수단과 비슷한 점이 있다. 여기서 간단히 언급해 보기로한다.

 

여희는 춘추전국시대 진헌공의 총비이다. 그녀는 무혜비와 마찬가지로 특별히 자신의 아들이 태자에 오르게 하고 싶었다. 연환계를 써서 국군으로 하여금 자신의 후계자 태자 신생을 제거한다. 이 역사드라마는 춘추시대의 부자간의 애정과 원한이야기이다.

 

먼저, 음험한 여희는 거짓으로 태자가 자신을 유혹했다고 말한다. 진헌공이 믿지 않을까 우려하여 진헌공으로 하여금 지정한 장소에서 그것을 보도록 했다. 여희는 당시 신생과 함께 산책하면서 먼저 벌꿀을 자신의 머리카라에 바른다. 그렇게 하여 벌과 나비를 불러들인다. 그리고 여희는 신생에게 벌과 나비를 쫓아달라고 부탁한다. 단순한 태자가 어찌 그것이 계략인 줄 알았으랴. 즉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에 붙어 있는 벌과 나비를 쫓아낸다. 지정된 장소에서 이 모습을 본 진헌공은 즉시 그것을 보고 분노하여 아들을 죽일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이것만으로는 진헌공이 완전히 아들을 죽이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기에는 부족했다. 왜냐하면 그도 아들이 비교적 순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부딛친 것일 뿐이라고 여긴 것이다. 어쨌든 그건 그냥 몇번의 손짓뿐이지 않는가. 그리하여 총명하고 영리한 여희는 일단 시작한 것이니 끝을 보자고 결심하여 가장 악독한 수법을 쓴다. 신생을 통해 진헌공에게 술과 음식을 보내는데, 암중으로 술과 음식에 독을 풀어놓는다. 그후에 술과 음식을 먼저 궁녀가 맛보게 한다. 궁녀는 음식을 맛보고 바로 죽는다. 그때 여희가 나타나서 신생에게 인간성이 없다고 욕을 한다. 국군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부친까지 죽이려 하다니. 예전에는 나를 희롱해서 국군이 죽여버리겠다고 했지만 내가 말렸는데, 하마터면 국군을 해칠 뻔했구나. 만일 태자가 국군이 죽기를 원한다면 내가 대신 죽을 수 있게 해달라. 그렇게 마치 나라와 국군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것처럼 연기하면서 술과 음식을 먹으려 한다. 물론 진헌공이 말려서 먹지는 않지만.

 

마지막 결과는 신생이 죽고, 나라는 혼란에 빠진다.

 

진나라의 황후 가남풍도 술을 태자에게 먹여서 취하게 만든 후,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폐하를 처리합시다'라는 친필서신을 쓰게 한다. 그리하여 태자는 폐위당한다.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후궁의 음모는 음험하다. 실로 등봉조극의 경지라 할 만하다.

 

좋다 이제 다시 무혜비가 태자를 무너뜨린 독랄한 수법을 보기로 하자. 그녀는 비록 무미낭(무측천)처럼 뛰어난 정치적지혜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음험한 수완을 쓰는데서는 노화순청의 아주 노련한 모습을 보인다. 가히 천재라 할 수 있다.

 

어쨌든 강직한 현상 장구령이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해준 덕에 태자를 폐위시키겠다는 건은 한동안 잠잠해졌다. 그러나 이임보가 강력하게 치고나오면서 조정의 풍향이 바뀌게 된다. 이영의 보호산이던 중량급정치인 장구령은 음모에 빠져 자신마저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자, 이영을 해칠 마음을 계속 품고 있던 무혜비는 더이상 참지를 못하게 된다.

 

736년, 무혜비의 적극적인 협력하에 이임보는 마침내 장구령를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다. 무혜비는 당연히 기뻣고, 즉시 태자를 제거하는 발걸음을 빠르게 한다. 나중에 여희가 신생을 모함한 것과 유사한 음모궤계를 써서, 태자와 두왕을 죽여버린다. 

 

태자 이영의 죽음에 관하여 <신당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십오년, 양회는 이영, 이요, 이거가 태자비의 오빠인 설수(薛銹)와 공모했다고 보고한다. 그리고 무혜비는 사람을 시켜 태자와 두 왕에게 알린다: "궁안에 도적이 들어왔으니 입궁해서 처리해달라!" 태자는 그녀의 말에 따랐다. 그때 무혜비는 황제에게 이렇게 말한다: "태자와 두 왕이 모반해서 무장을 하고 오고 있습니다." 황제는 사람을 시켜 살펴보게 했는데, 그 말대로였다. 그리하여 재상 이임보를 불러 상의한다. 이임보는 "폐하의 집안 일이니 신이 의견을 말씀드리기 부적절합니다." 황제는 뜻을 정하고 조서를 내린다: "태자영, 악왕요, 광왕거는 모두 죄를 범했으니,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설수는 사사한다." 

 

태자와 두 왕을 죽였으니 이제 무혜비는 만사대길하고 아무 걱정이 없게 되었을까? 정반대였다. 오히려 이 일이 있은 후 우울증에 빠져서 병석에 눕는다. 그리고 얼마후 죽는다. "평소에 나쁜 짓을 하면 밤중에 귀신이 찾아올까 겁낸다"는 말 그대로이다.

 

이 일에 관하여 <구당서>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해, 무혜비는 삼서인이 귀신이 되어 나타난 것을 여러번 보았고, 두려워하다가 병을 얻는다. 무당은 기도를 하게 하였지만, 쾌유되지 못하고 죽는다." 

 

<신당서>는 이 일에 대하여 몇 마디 덧붙였다: "무당은 태자와 두 왕을 위하여 무덤을 개장하고, 행형을 했던 자를 죽여서 배장했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다. 귀신은 여전히 나타났고, 무혜비는 이로 인하여 죽는다. 그녀가 죽은 후 귀신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궁중에서 귀신소동이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총명하기 그지없는 당현종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총애하는 무혜비가 음모를 써서 태자와 두 왕을 죽였기 때문에 의심암귀로 일어난 일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혜비를 사랑했던 당현종은 그래도 그녀의 편이었다. 그녀가 죽은 후 그는 아주 슬퍼하며 한때 여자를 끊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정순황후(貞順皇后)"라는 시호를 내린다. 이융기가 그녀에게 써준 조문은 칭찬으로 가득 차 있다: "고혜비무씨(故惠妃武氏), 소이완순(少而宛順), 장이현명(長而賢明), 행합예경(行合禮經), 언응도사(言應圖史)" (혜비 무씨는 어려서는 완순하고 자라면서 현명했다. 행동은 예와 경전에 맞고, 말은 책과 역사에 맞았다.)

 

세상의 흑과 백이 뒤바뀔 때는 여희가 신생을 죽일 때와 마찬가지로 변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두 눈 멀거니 뜨고 그저 황제가 눈이 먼 것을 원망할 수 있을 뿐이다.

 

태자와 두 왕을 제거한 후 무혜비는 원래 원했던대로 황후에 오르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녀의 아들 수왕 이모는 태자에 오르지 못했다. 오히려 이융기의 셋째아들 충왕(忠王) 이형(李亨)이 태자에 오른다(고력사가 적극 추천했다). 이 아들은 비록 현명한 신하들을 기용했지만, 도량이 좁은 인물이었다. 

 

이융기는 정의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친형제들과의 사이의 은정은 유명하다. 우애가 좋았다. 큰형인 송왕(宋王) 이성기(李成器)는 태자의 자리를 이융기에게 양보했으니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신왕(申王) 성의(成義), 기왕(岐王) 범(范), 설왕(薛王) 업(業)도 그와 사이좋게 지냈다. 어떤 자료에 따르면, 형제들이 한 이불을 덮고 잤다고 한다. 그리고 자주 연회를 베풀어 형제들과 같이 술을 마셨다. 가장 놀라운 일은 그가 전(殿)에 오위(五幃, 다섯 휘장)를 설치하여 각왕이 한명씩 그 뒤에 있게 했다. 이것은 자주 만나서 시부를 논하고, 음악회를 열고, 국가대사를 논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가족간의 정을 중시하는 사람이 왜 혈연이 더욱 가까운 직계자녀문제에서는 이렇게 냉혈한의 모습을 보였을까? 180도 다른 모습이고 전혀 다른 사람같다. 이건 인륜에도 어긋나지 않는가. 고대의 수퍼오락황제인 이융기는 얘기거리가 많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예술가적 기질때문인 것같다. 자주 상상을 초월하는 일을 벌였다. 그래서 다른 기준으로 그의 정치적 행위를 평가하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이 일에 관하여, 당연히 정성(情聖)인 황제가 사촌여동생인 무혜비에 대하여 끊임없는 사랑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심지어 기꺼이 그녀가 원하는 일을 했다. 잔인하게 자신의 친아들 셋을 처리하는 것까지. 우리가 보기에는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이융기에게 있어서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