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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손권이 유비에게 "차형주(借荊州)"해준 것은 부득이한 조치였다.

by 중은우시 2015. 2. 10.

글: 양민복(楊民僕)

 

 


역사상 유비는 '차형주'하였고, 한번 빌린 후에 돌려주지 않은 철두철미한 '무뢰한'이라는 견해가 있다. 손권은 부인도 주고 병사도 잃었으며, 호의를 베풀었지만 보답은 받지 못하였다고 하여 사람의 동정을 받는다.


다만 문제는 손권과 같이 총명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하수의 잘못을 저질렀을까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많은 사람들은 소위 "차형주"가 동오에서 고심끝에 만들어낸 극본이고, 자신이 억울하다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호소하여, 유비를 불의한 측으로 몰아가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유비가 보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빌린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돌려주는가? 쌍방은 무슨 차용증서를 쓴 것도 없고, 사서에서 각자 자신의 입장을 기술할 뿐이다. 그러다보니 각자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법관이 되어, 원고 손권과 피고 유비가 어떻게 자신의 입장을 변론하는지 보도록 하자.


당시 형주는 7개군이 있었다. 각각 남양, 남군, 강하, 무릉, 장사, 계양, 영릉이다. 남양은 기본적으로 조조의 손에 들어가 있었고, 강하는 기본적으로 손권이 점유했다. 남군에는 17개 성이 있는데, 주로 강북에 있으며 행정중심은 강릉(지금의 호북성 형주)에 있었다. 분쟁의 촛점은 3곳의 땅이다.


첫째 땅은 유강구(油江口). 땅은 작다. 주유가 명령을 받은 후 강릉의 장강 반대편 강안, 유강구라고 부르는 지역을 유비에게 준다. 그래서 유비는 이곳에 머물게 되고, 이름을 공안(公安, 지금의 호북성 공안)이라고 바꾼다.


원고 손권: 이는 주유가 너에게 준 땅이다. 분명히 너에게 빌려주었다.

피고 유비: 빌린 게 아니다. 내가 적벽지전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공로(功勞)는 없어도 고로(苦勞)는 있어서 강남의 작은 땅을 나눠얻은 것이다. 이는 노동의 댓가이다. 나도 투자에 참가했으므로 이 땅은 당연히 배당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둘째 땅은 형주 강남4군이다. 형주는 강남에 4개군이 있었다. 각각 무릉, 장사, 계양, 영릉이다. 적벽대전후에 유비가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원고 손권: 남방4군은 비록 네가 공격해서 얻은 것이지만 전제는 주유가 병력을 이끌고 조조와 강릉을 쟁탈했기 때문이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전쟁을 통해서 조조군의 미친듯한 진공을 막아내서 네가 순조롭게 4군을 탈취할 수 있었다. 네가 주유와 협력하여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그 기회를 틈타서 승리의 과실만 챙겼다. 내가 너에게 빌려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전부 네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냐. 이는 내가 투자를 하고, 이익은 네가 가져간 것이다. 내가 투자하지 않았더라면 너는 한 푼도 얻지 못했을 것이 아니냐.

피고 유비: 이는 내가 병력을 보내서 얻은 것이다. 너와는 전혀 관계없다. 무엇을 가지고 빌렸다고 하는가. 하물며 천하는 한나라의 것이다. 형주도 너 손권의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이 투자하여 번 돈이나 같다.


셋째 땅은 남군의 장강이북에 있는 땅이다. 주유는 1년가량의 시간을 들여서 빼앗는다. 그러나 나중에 유비의 손에 들어간다.


원고 손권: 이 땅은 분명 내 것이다. 현재 너에게 주었으니 이는 빌려준 것이다.

피고 유비: 이는 네가 스스로 나에게 준 것이다. 내가 빌렸다니, 차용증이라도 있느냐. 혹은 다른 증거라도 있으면 내놓아 봐라.


이 땅이 언제 유비의 손에 들어갔고, 어떤 방식으로 유비의 손에 들어갔는지는 역사기록이 모두 모호하다. 이는 쌍방이 명확하게 약정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유비에게 항변할 공간이 생긴 것이다.


만일 이런 주장들이 어지럽고 불분명하다고 여긴다면, 걱정할 것없다. 간단하게 계산을 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적벽대전이전에 유비는 도망병이었다. 이미 파산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손권은 주력이었고, 조조를 격파한다. 그는 주요투자자이다. 사후에 손,유는 돈을 벌었다. 최대의 이윤은 바로 형주이다. 그런데 절대다수의 지역을 유비가 가져가 버린다. 손권은 거의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이는 손권을 흥분시켰다. 그후의 태도를 보면, 유비는 도리에서 밀린다. 비록 빌렸다고 인정하지는 않지만, 계속 모호한 입장을 취한다. 돌려줄 거라고 인정하면서 시간을 계속 끄는 것이다. 만일 확실히 빌린 것이 아니라면 당당하게 거절할텐데, 유비는 확실히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주는 한 가지 의문은 손권이 왜 "차형주"와 같이 멍청한 짓을 했느냐는 것이다.


기실 손권은 전혀 멍청하지 않다. 그저 만부득이했을 뿐이다. 조조는 실력이 웅후하고, 동,서 양쪽에서 동시에 전쟁을 벌일 수 있었다. 손권은 동쪽전선에서 조조와 맞서고 있는데만 해도 절대다수의 본전을 투입해야 했다. 만일 서쪽전선에서도 조조와 맞붙어야 한다면, 자금줄이 끊어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손권은 형주의 부대를 모두 철수시키고 무상으로 유비에게 넘겨준 것이다. 즉 유비로 하여금 조조의 군대와 정면으로 싸우게 만든 것이다. 그러면 손권은 서쪽에서 안도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손권은 비록 손해를 보지만 당시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원인이다.


이는 또한 유비가 나중에 시종 돌려주지 않으려 한 원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유비도 억울하다. 만일 그가 형주를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조조에게 함락당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손권은 조조에게 돌려달라고 앵앵거릴 수 있겠는가?


유비는 처음에 비교적 저자세였다. 그는 직접적으로 형주의 1인자에 오르지 않았다. 한나라조정에 글을 올려 유표의 아들 유기(劉琦)를 형주목(荊州牧)에 앉힌다. 이런 방식은 똑똑한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장수는 모두 유기의 부하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유기가 병사하자, 유비는 스스로 형주목이 되고, 행정중심을 공안에 둔다. 그리고 유기의 역량을 모조리 거둔다. 실제로 이미 형주의 최대점유자가 된다. 손권이 그를 도와준 것에 감사하기 위하여, 유비는 글을 올려 손권을 서주목(徐州牧)에 추천함으로써 보답한다.


손권의 "차형주"에는 강력한 반대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주유이다. 다만 적벽대전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유는 병사한다. 그래서 두 집안의 표면적인 친밀한 관계에는 영향을 주지 않게 된다. 나중에 동오측의 후임자는 노숙이 되고, 그는 유비와 연맹하여 조조에 대항하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래서 빌린 것인지 아닌지의 문제는 아직 수면위로 부상하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