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사서에서 전위(典偉)는 여포(呂布)보다 용맹하다

by 중은우시 2014. 4. 4.

글: 가동(佳桐)

 

나관중의 <삼국연의>에서 여포는 공인된 제일용장(第一勇將)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쨌든 소설이다. 그럼 사서에서는 어떨까? 당시에 더욱 용맹한 장수가 있었을까?

 

여포의 용맹함은 절대로 그냥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삼국지>의 작자인 진수(陳壽)는 이렇게 말했다: "여포는 효호지용(虓虎之勇)이 있었다"'; 삼국시대 오나라 사람이 쓴 <조만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당시의 사람이 말하기를, '인중유여포(人中有呂布), 마중유적토(馬中有赤兎)""; <삼국지.위지칠.여포장막장홍전>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포편궁마(布便弓馬), 여력과인(膐力過人), 호위비장(號爲飛璋)", 일찌기 원소에게 투신하였는데, 공을 내세워 교만하여 원소가 그를 꺼려 했다. 여포는 그래서 떠나기로 한다. "원소는 자신이 해를 입을까봐 우려하여, 장사를 보내어 밤에 몰래 여포를 죽이게 하나, 성공하지 못한다. 일이 들통나서 여포는 하내(河內)로 도망친다." 이 일은 원소를 크게 두려워하게 만든다. "사람들에게 그를 추격하게 명령하는데, 모두 여포를 두려워하여 가까이 다가가는 자가 없었다." 왕찬의 <영웅기>에는 나아가 이렇게 적었다: "원소는 신문을 한 후에 여포가 아직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성문을 닫아건다." 여포의 초인적인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원문사극(轅門射戟)"의 이야기이다. 원술이 대장 기령(紀靈)을 보내 3만의 보병,기병을 데리고 유비를 공격하게 한다. 유비는 여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후한서.여포장막장홍전>의 기록에 따르면, 여포는 "여포는 보병,기병 천며명을 이끌고 달려 갔다. 기령등은 여포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모두 병력을 거두고 멈추었다." 삼만명이 천여명에게 놀라서 공격을 멈추었다는 것을 보면 여포의 신용(神勇)함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당연히, 여포가 이번에 온 것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려는 것이 아니라, 싸우지 말라고 권하기 위한 것이었다. <삼국지.위서칠. 여포장막장홍전>의 묘사는 아주 생동감있다. "여포는 문후에게 영문의 가운데 극을 하나 세우게 했다. 그리고 여포는 말한다. '여러분은 나 여포가 극의 작은 갈래를 맞추는 것을 보십시오. 한 발에 맞추면 여러분은 공격을 멈추고 돌아가야 하고, 맞추지 못하면, 남아서 계속 싸워도 좋다.' 여포는 활을 들어 극을 향헤 쏘았으며 작은 갈래에 정통으로 맞았다. 여러 장수들은 모두 놀라서 말하기를 '장군은 하늘이 내린 인물이다." 다음 날 다시 만난 다음 서로 흩어진다."

 

이런 여포를 누가 감히 다투겠는가? 사서에는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여포와 직접 싸운 명장은 곽사(郭)뿐이다. <영웅기>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이각, 곽사가 장안을 공격할 때, "여포가 성문을 열고, 곽사를 맞이하며 말했다. '병력을 멈추어라. 직접 승부를 보자.' 곽사, 여포는 단독으로 대결을 한다. 여포는 모(矛)로 곽사를 찔렀고, 곽사의 후기(後騎)가 곽사를 구한다. 곽사와 여포는 그렇게 싸움을 끝낸다." 하후돈도 여포와 직접 싸운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위서구.제하후조전>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장막이 배반하여 여포를 맞이한다. 태조(조조)의 집은 견성에 있었다. 하후돈은 경무장한 군대를 데리고 가서 여포와 만나서, 교전을 벌인다. 여포는 물러나서 복양으로 들어간다. 하후돈의 부대의 물자를 기습한다." 이를 보면, 여포는 거짓으로 패한 척하고 물러난 다음 나중에 승리를 거두었다. 여포는 장비와도 하비에서 만났다. "여포는 문 위에 앉아 있었고, 보병, 기병이 불을 질렀고, 익덕(장비)의 병사를 크게 격파하고, 유비의 처자, 군수물자 및 부곡장리사 가족을 포로로 잡는다." 장비는 여포와 직접 몸을 부딛쳐 싸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이 전투에서 여포에게 패했다. 그렇가면, 사료에서, 여포를 두려워하지 않고, 기세에서 그를 압도한 사람이 있었을까? 있다. 그는 바로 전위이다.

 

전위는 조조휘하의 맹장이다. "형모가 괴오(魁梧)하고, 팔힘이 남달랐다. 임협에 뜻을 두었다." 그는 사마 조총의 수하로 있을 때, 군중의 아문기가 길고 컸다. 아무도 이를 세울 수 없었다. 전위는 한 팔로 그것을 높이 들었다. 전위가 들고 있는 쌍극의 무게는 놀라울 정도였다. 군대냉 이런 말이 있었다: "장하장사유전군(帳下將士有典君), 제일쌍극팔십근(提一雙戟八十斤)". 이 말은 <삼국지>에 나온다. 순수히 허구적인 관우의 팔십이근 청룡언월도와는 다르다. 당연히, 힘이 세다는 것은 단지 전위가 용맹하다는 조건일 뿐이다. 그의 전쟁터에서의 표현이야말로 진정한 설득력을 지닌다. 194년, 조조는 밤을 틈타 여포가 복양서쪽에 주둔한 기지를 기습한다. 그를 격패시키고 아직 철수하기도 전에, 여포의 구원병이 도착한다. <삼국지.위서십팔.이이장문여허전이방염전>의 기록에 따르면, 여포는 "직접 나서서 육박전을 벌인다" 새벽부터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 때까지, 수십회합을 교전하고 양군은 서로 대치하고 있었고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았다. 조조는 적진으로 돌격할 장사를 모집하는데, 전위가 앞장서서 지원했다. "모집에 응한 자가 수십인이고 모두 중무장갑옷을 입고, 방패는 버리고, 장모를 들고 극을 들었다. 그때 서쪽이 위급해져서, 전위가 나아가서 막았다. 적의 궁노가 마구 발사되어 화살이 비오듯했는데, 그는 이를 본척만척하며 사람들에게 말한다. '적이 십보를 오면 말해달라' 사람들이 '십보입니다'라고 말하기를 기다려 다시 말한다.'오보이면 얘기해달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는 급히 말한다. '적이 도착했다" 전위는 손에 십여극을 들고, 크게 소리치며 일어났다. 그의 창이 닿는 곳에는 모조리 쓰러졌다. 여포의 무리는 물러난다." 즉, 여포의 군에서 화살이 비오듯 쏟아지는데도, 전위는 전혀 두려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그저 따르는 자에게 적과의 거리를 말하라고만 한다. 적진에 뛰어든 후에는 무인지경이었고, 여포의 군대를 물리친다.

 

아마도 누군가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전위가 신용하기는 하지만, 여포와 직접 싸우지는 않은 것이 아니냐고. 자연히 상대방인 여포보다 위맹하다고 하기는 힘들다고. 그러나, 만일 여포의 개성을 분석한다면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이 때 그는 분명 전위의 기세에 놀라서 두려웠던 것이다. 여포는 일반적인 장수와는 다르다. 직접 나서서 싸우는 것이 그가 항상 하던 일이다. 여러 개의 역사적 사례가 이를 인증한다: 하나는 <후한서.여포전>으로 여포는 '상산에서 장연과 싸운다. 연나라 정예병사 만여명, 기병 수천필이었다. 여포는 항상 좋은 말을 몰았는데, 이름이 적토였고, 참호를 날아서 넘을 수 있었다. 여포는 그의 건장 성령, 위월등 수십기와 함께 연나라 진으로 뛰어든다. 하루에 혹은 서너번씩 했으며, 모두 수급을 베고서야 나왔다. 십여일을 연속으로 싸운 다음에 마침내 연나라군대를 격파한다." 이를 보면, 약간의 경기병을 이끌고 급습을 하고 친히 적장과 싸우는 것은 여포가 우연히 한번 한 것이 아니다. '하루에 서너번이나 그렇게 했다' 즉 일상사인 셈이다. 둘째는 <자치통감.권제육십이>에 있는 기록이다. 여포는 조조에게 포위된 후, 원술에게 구원을 청한다. 그러나 앞서 원씨집안과의 혼사를 거절한 적이 있어서, 여포는 원술이 딸을 보내지 않았다고 하여 구원병을 보내주지 않을까봐 우려하여, 딸의 몸을 말 위에 묶고, 밤에 스스로 딸을 내보낸다. 조조의 수비병과 서로 만나서 싸우게 되어 지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온다." 이것은 여포가 앞장서서 돌파하는 것에 익숙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딸을 보내기 위헤 포위망을 돌파할 때도, 자신의 말에 묶었지,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던 것이다.  서진의 사마표가 쓴 <구주춘추>는 더더구나 그의 부장 고순(高順)의 건의를 기록한다. 한번은 여포가 친히 출정하려 하자, "고순이 간언하여 아뢰기를 '장군은 친히 동탁을 죽여, 오랑캐들이 위세에 겁을 먹고 있어,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자연히 원근에서 찾아와 복종할 것입니다. 가볍게 나서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만일 승리하지 못하면, 명성에 손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포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므로, 복양의 전투때는 여포의 기세가 한창 높을 때이다. 어찌 전위가 혼자서 설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었겠는가? 하물며, <삼국지>, <자치통감>등 사료에서는 모두 여포가 그날 "친히 육박전을 벌였다"고 되어 있다. 어찌 몸을 웅크리고 물러났을 것인가. 필자가 감히 추측을 해보자면, 이때 여포는 확실히 평소와는 달리 퇴각한다. 전위는 혼자의 힘으로, 위급한 상황을 역전시켰다. '여포의무리가 물러났다" 이는 여포가 이번에는 진 것이다. 조조에게 진 것이다. 더욱 정확하게는 전위에게 진 것이다. 이 회합을 보면 '전위는 여포보다 위맹하다'는 것이 성립된다.

 

전위의 위맹함은 일관된다. <삼국지.위서십팔.이이장문여허전이방염전>에서는 그가 "좌우로 돌격하니, 한나라의 번쾌이다.", "전위는 장무(壯武)하며 그가 이끄는 병졸들은 고른 자들이다. 매번 전투때마다 항상 먼저 전투에 나서서 함락시킨다." 전위는 죽는 것도 장렬하고, 위맹하다. 197년, 장수는 조조가 그의 형수를 취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배반한다. 손쓸 도리가 없던 조조는 말을 타고 도망친다. "전위는 문중에서 싸웠고, 적은 들어오지 못한다. 병사들은 다른 문으로 흩어져서 들어온다. 그때 전위의 부하는 아직 십여명이 있었다.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하나같이 일당십이었다. 적은 앞뒤고 약간 많았다. 전위는 장극으로 좌우를 찌른다. 한번 찌르고 들어가면 십여개의 창이 부러졌다. 좌우의 사상자가 가득했다. 전위는 창에 수십번 찔리고, 단병접전을 벌이며 적이 앞으로 나와서 그를 공격했다. 전위는 두 적을 끼고 두 적을 격살했다. 나머지 적은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했다. 전위는 다시 앞으로 돌격하여 적 수명을 죽인다. 상처가 다시 덧나서 눈을 부릅뜨고 크게 욕설을 하며 죽었다. 적은 그제서야 앞으로 나와서 그의 수급을 취하고, 서로 전해서 수급을 구경한다. 군대를 전멸시키고 나서 비로소 그의 몸을 본다." 생각해보라. 전위가 극을 한번 휘두르자 적병의 10여개 창이 부러진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힘인가. 그리고 그는 맨손을 두 명을 끼고 두 명을 격살한다. 실로 경탄을 금치 못할 힘이다. 이처럼 위맹하여, 기식이 조그만큼만 남아 있어도, 적은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여포가 퇴피삼사(退避三舍)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