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화/중국의 무술

일대종사: 예원(葉問)의 본모습

중은우시 2013. 2. 4. 20:13

글: 남경일보 

 

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의 <일대종사>가 전국에서 인기리에 상영되어,  다시 한번 일대무술종사 예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예원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자질이 뛰어났으나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았다. 7살때 불산(佛山)의 영춘원(詠春拳) 종사인 양찬(梁贊)의 제자인 진화순(陳華順)은 상원(桑園)을 임대하여 무관을 차리고 제자를 거두었다. 예원은 그 때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영춘권을 배운다.

 

당시 진화순은 이미 나이가 많았고, 이 어린 제자를 아주 아꼈다. 예원을 제자로 받아들인 후 그는 더 이상 제자를 받지 않는다. 에원은 진화순의 관문제자(關門弟子)가 된다. 진화순이 사망한 후, 예원은 다시 사형인 오중소(吳仲素)에게서 영춘권을 배운다.

 

1917년, 예원은 불산을 떠나 홍콩으로 가서 외국어를 배운다. 그때 양찬의 아들인 양벽(梁璧)에게 3년간 무술을 배운다. 그리하여 양찬의 제자들 중 남은 몇 안되는 정수를 그는 모두 익힌다. 그가 다시 불산으로 돌아왔을 때는 오중소를 포함한 동문의 여러 제자들은 모두 이미 그에 훨씬 못미치게 되었다.

 

민국의 정국이 안정된 후 예원은 홍콩에서 불산으로 다시 되돌아온다. 먼저 불산정집대대(偵緝大隊)의 서기를 맡고, 나중에 오번(吳蕃)을 따라 광동방무계사장(防務稽査長)을 맡는다. 그동안 친구와 부하들에게 영춘권을 가르쳐 불산에 이름을 떨친다.

 

당시 불산에서는 매년 "추색(秋色)" 행사가 유행했고, 매년 특수한 민족의 수예를 전시한다. 매년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외지에서 온 관광객도 많았다. 한번은 "추색" 행사때, 예원이 사촌여동생 몇 명과 함께 "추색"을 구경하러 갔다. 그런데 한 사복경찰이 그의 사촌여동생을 건드리려 해서, 예원은 보통 쓰는 영춘권의 수법으로 막았고, 상대방은 그 자리에서 땅바닥에 쓰러진다. 상대방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몸을 일으키며 총을 뽑았다. 예원은 몸을 돌려 상대방의 왼손 권총을 잡고 엄지손가락의 힘으로 권총을 눌러 권총이 발사될 수 없도록 하였다. 이 일은 당시에 미담으로 전해진다.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군이 1938년 불산을 점령한다. 예원의 뛰어난 쿵후에 대하여 일찌감치 일본헌병대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헌병대의 중국무술교관으로 모시려 했다. 민족정의를 지켜오던 예원은 일본헌병대의 요청을 거절한다. 일본헌병대는 화가난 나머지, 무술고수를 보내어 예원과 비무하도록 한다. 예원이 지면 요청하는대로 따르라고 말했다. 거절할 수 없는 상황하에서 예원은 비무를 받아들인다. 예원은 영춘권을 써서 상대방이 중심을 잃게 만든다. 상대방은 수법에 당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패색을 드러냈다. 그러나 예원은 적시에 비무를 그만두고 비무장을 떠난다.

 

비무후의 예원은 일본군벌을 화나게 했을 것이 겁이나 불산을 잠시 떠나서, 암암리에 항전에 종사한다. TV드라마나 영화에서 묘사된 예원이 외국인을 혼내주는 이야기는 예원의 아들인 예준(葉準)의 회고에 따르면, "진실한 역사에서 부친은 일본인과 접촉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서양인을 이긴 것도 사실이아니다. 부친은 생전에 항상 가능하면 무력으로 상대하는 것을 피하려 했다."

 

당시 예원이 일본과 협력하지 아니함에 따라, 집안생활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1941-1943년 사이에 불산의 영안로에서 "연창(聯倡)"화사점(花紗店)을 연다. 저녁에는 친구와 아랫사람들에게 영춘권을 가리켜 제자들을 거두었다. 항전후기, "연창"은 문을 닫고, 예원은 제자 곽부(郭富)의 집으로 옮겨 거주한다.

 

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예원은 무공을 지니고 있었으나 무관을 열어 제자를 거두지 않고, 불산에서 경찰국 형경대대장을 지낸다. 나중에 경찰장, 대리국장으로 승진하고, 불산사방의 강도사건을 해결한다. 그리고 승평로 승평극원내의 인질강도사건도 해결한다. 그리하여 상사의 인정을 받아 광주시에서 남구순라대장의 직도 지낸다.

 

1949년, 예원은 마카오를 거쳐 홍콩의 사촌누나집으로 간다. 홍콩에 도착한 후, 친구의 소개로 무술애호가인 양상(梁相)을 만난다. 양상은 즉시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무술을 배운다. 그리고 예원에게 구룡의 심수보 항구반점 직공총회에서 공개적으로 무술을 전수하도록 어레인지한다. 당시에 무술을 배우는 사람은 10명도 되지 않았다. 나중에 예원의 명성이 갈수록 높아지자, 영춘권을 배우려고 찾아오는 사람이 늘었다. 예원은 구룡이달가, 이정옥촌, 구룡흥업대하로 계속 장소를 바꾸었다. 저녁의 약간 시간을 내서는 홍콩 하리활도에서 가리켰다. 이리하여 영춘권은 홍콩의 골목마다 모두 퍼지게 된다. 여러 제자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유명한 쿵후영화배우인 이소룡이다. 1954년 이소룡은 이달가무관내에서 예원을 스승으로 모시고 무술을 배운다.

 

무술에 정통한 예원은 싸움을 좋아하지 않았고, 명리에 담백했다. 쉬는 시간이면 차를 마시고, 마작을 즐겼다. 그리고 귀뚜라미싸움, 개싸움을 좋아했다. 그는 평상인의 생활을 즐기다가, 1972년 12월 홍콩에서 병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