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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문혁때 자살한 여류명인

by 중은우시 2014. 10. 6.

글: 노리람사(老李覽史)

 

1. 상관운주(上官雲珠, 1920. 3. 2. - 1968. 11. 23.)

 

강소 강음 장경진 사람. 여성, 이름은 균락(均犖). 자는 초군(超群). 아명은 아제(亞弟) 위아군(韋亞君)이라고도 함. 중국의 저명한 영화예술가. 중국영화협회 회원, 상해영화협회 상무이사, 상해시 정협 제1기, 제2기 위원 제3기, 제4기 상무위원, 1968년 투신자살.

 

2. 언혜주(言慧珠)

 

언혜주는 성격이 솔직하고 생각이 단순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찌 생각했으랴 당의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호소에 응하여 솔직하게 말했다가. '우파'의 죄상을 뒤집어 쓰게 된다. 그리하여 공격을 받는다. 친구나 아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가담하여 그녀를 공격했다. 그녀가 언제 이런 기세를 본 적이 있겠는가. 다만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몰랐다. 그녀는 어떻게 반성해야할 지도 몰랐다. 결국 허인(許寅)이 몰래 그녀를 도와주어 '심각하게 반성문'을 쓴다. 유아때로부터 현재까지 스스로를 책망하고 스스로를 욕한다. 그리하여 비로소 관대하게 '우파'의 모자를 벗을 수 있었다. 1966년 9월 11일 언혜주는 목을 매어 자결한다.

 

3. 조혜심(趙慧深).

 

1911년생. 사천 의빈 사람. 저명한 공연예술가. 무대극 <뇌우>에서 성공적으로 번의를 연기하여 유명해진다. '문혁'때 영화극분 <귀신을 무서워하지 않는 이야기>로 가정성분이 좋지 않다고 하여 '삼반분자'로 몰려서 비투(批鬪)를 당한다. 그리고 <마로천사>에서 기녀 소운을 연기한 거으로 조반파의 조롱과 모욕을 받는다. 1967년 12월 4일 그녀는 한을 품고 자결한다.

 

4. 엄봉영(嚴鳳英)

 

1968년 4월 7일 저녁, 엄보영은 조반파에게 재판을 받는다. 그리고 죄를 인정하라고 강요당한다. 그녀는 이치를 따지면서 반박한다. 그날 밤, 엄봉영은 대량의 수면제를 먹는다. 남긴 유서에서 이렇게 썼다: "나 엄봉영은 당을 열렬히 사랑하고 모주석을 열렬히 사랑한다. 나는 반당이 아니다. 반모주석이 아니다! 나는 태어나면서 모주석의 사람이다. 죽어서도 모주석의 귀신이다..."엄보영은 병원에 보내어진다. 그러나, '현행반혁명자살반당"이고 직장의 소개서도 없어서 병원에서는 진료를 거부한다. 1968년 4월 8일 새벽 5시 25본, 엄봉영은 한을 품고 죽는다. 이때는 그녀의 38세 생일이 되기까지 1달 16일이 남은 날이었다.

 

5. 고성영(顧聖嬰)

 

1937년생. 강소 무석 사람. 저명한 여성 피아니스트. 1958년 제네바 제14회 국제음악경연에 참가하여 여자피아노 최고상을 받는다. 같은 해 중앙음악학원 명예졸업증서를 받는다. 1964년 벨기에 피아노대회에서 다시 대상을 획득한다. 1967년 1월 31일 모친, 남동생과 함께 가스를 틀어놓고 일가족이 자살한다.

 

6. 소백옥상(小白玉霜).

 

원명은 이재문(李再雯). 아명은 복자(福子). 조적은 산동. 5살때 부친을 따라 천진에서 북경으로 간다. 부모는 그녀를 기를 수가 없어 그녀를 저명한 평극배우 백파창시자 백옥상에게 팔아서 그의 양녀가 된다. 1950년 전국제1차정협회의에서 모택동주석이 친히 그녀를 접견한다. '사인방'의 박해를 받아 얻어맞은 후 수면제를 마시고 자살할 때 그녀의 나이는 45세였다(시간은 불명)

 

7. 장금추(張琴秋)

 

학명은 장오(張悟). 저명한 홍군여장군. 장정기간 일찌기 홍사방면군의 정치부주임, 중공중앙서북국위원등 중요직무를 역임한다. 건국후에는 방직공업부 당조부서기, 부부장을 지낸다; <중국군사대백과전서>는 장금추를 홍군의 유일한 여장군이라고 부른다. 1968년 잔혹한 박해를 받아 1968년 4월 22일 반도로 무고당한 후 투신자살한다.

 

8. 양필(楊必)

 

1922년생, 강소 무석사람. 전종서의 부인 양강(楊絳)의 여동생. 일찌기 진단여자문리학원을 졸업하고, 학교에 남아서 교편을 잡았다. 대학조정후 상해복단대학 외문계의 부교수를 지낸다. 세계문학명작인 <허영의 시장(Vanity Fair)>를 중문으로 번역한 사람이다. 1968년 계급대오정리때 박해를 받아 자살한다.

 

9. 서수문(舒繡文)

 

여자영화배우, 1968년 감옥에서 자살한다.

 

10. 주매복(朱梅馥)

 

부뢰(傅雷)의 처. 1966년 그녀는 남편과 집에서 담담하게 죽는다. 향년 53세.

 

11. 진련(陳璉)

 

1919년생, 절강 자계현 사람 장개석의 고급막료중 '문담(文膽)'이라 칭하는 진포뢰(陳布雷)의 딸. 1939년 입당, 해방후 임업부 교육사 부사장, 전국부련 집행위원을 지냈다. 문혁이 시작된 후, 조반파는 그녀를 반도, 특무라고 모멸한다. 그리고 그녀의 당적을 박탈하겠다고 말한다. 1967년 11월 19일, 48세의 진련은 11층건물에서 투신자살한다.

 

12. 이취정(李翠貞)

 

상해교외 남회현 사람. 문혁때 큰 모욕을 받는다. 홍위병을 그녀를 땅에서 기어 탁의(卓椅)로 올라가게 한다. 그리고 먹으로 얼굴을 검게 칠한다. 이 고귀한 여인은 치욕을 참지 못하고 고아한 방식으로 자신의 생명을 끊는다. 그녀는 가장 예쁜 옷을 꺼내어 입고, 정성들여 화장을 한 후, 가스관을 연다.

 

13. 오소언(吳小彦, 1954년 0 1976년 9월 23일)

 

저명한 역사학자 오함(吳含)의 양녀이다. 1966년 오함이 비판을 받아 흑방(黑幇)이 된 후 모친 원진(袁震)은 노동개조소에 들어가서 두 다리를 못쓰게 된다. 오소언은 나이 겨우 12살로, 혼자서 병든 모친과 동생을 보살피는 책임을 부담한다. 흑방의 자녀여서 생황에서도 곤란을 겪고 정신적으로도 고초를 당한다. 그리하여 1973년 정신분열증에 걸린다. 1975년 가을 북경공안국에 체포되어 간수소에서 비인간적인 댕를 받아 정신병이 가중된다. 심신이 지치고 더 이상 길이 없다고 보고 문혁이 끝나기 전날 정신병원에서 자살한다.

 

14. 증소율(曾昭燏)

 

고고학자, 박물관학자. 문학가. 호남성 쌍봉현 하엽진 만의당 사람. 청나라말기 기유년(1909년)에 서향세가에서 출생한다. 민국3년(1914년) 증씨가숙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일지기 증소병(曾篠屛)에게 <십삼경>을 사사한다. 민국10년 당자(堂姉) 증보손(曾寶蓀)이 창립한 장사예방여자학교에 들어간다. 민국18년 국립중앙대학(지금의 남경대학) 국문과에 들어가고 민국22년 졸업하여 문학학사학위를 받는다. 증소율은 호소석을 스승으로 모신다. 민국24년 영국런던대학으로 가서 고고학을 배우고 2년후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그후에 독일박물관에서 실습한다. 증소율은 런던대학에서 조교를 지낸 바 있다. 민국27년(1938년) 중앙박물관 전문설계위원, 총간사가 된다. 1950년 2월 남경박물원 부원장이 되고, 1954년 9월에는 남경박물원 원장이 된다. 1964년 영곡사에서 투신자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