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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호요방(胡耀邦)의 유조(遺照) 배후의 알려지지 않은 비밀

by 중은우시 2014. 1. 15.

글: 복녕객(福寧客) 

 

 

 

1989년 4월, 중남해(中南海) 담장 바깥에 호요방의 집은 중남해 동문에 붙어 있었다. 그러나 정문은 바깥의 후통으로 나 있었다. 총서기를 맡은 후, 호요방은 여전히 중남해로 이사들어오지 않았다. 업무상 편의를 위하여, 집의 뒷쪽 담장에 통로를 내서 중남해로 들어갈 수 있게 했다. 앞문은 여전히 보통백성들이 거주하는 협소한 후통으로 나 있다. 바로 이런 보통이며 특이한 집에서 호요방은 그의 마지막 세월을 보냈다.

 

두수현(杜修賢)은 1960년대부터, 주은래의 전문사진사를 맡았고, 70년대에는 다시 모택동의 사진사를 맡았다. 적지 않은 중앙지도자들은 모두 그의 카메라렌즈앞에 섰다. 당시의 호요방은 단중앙서기(團中央書記)였다. 그래서 그 개인의 신자풍운(神姿風韻)을 포착할 기회가 아주 적었다. 비록 같은 중남해에서 일하지만, 호요방을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1989년, 호요방은 총서기 직에서 떠나고, 이때 더 이상 중국도편사(中國圖片社) 부총경리의 직함을 맡지 않고 있던 두수현은 정식으로 직책을 떠나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만장이 넘는 흑백 혹은 칼라사진의 필름을 정리하였다. 그는 그것을 모아서 출판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사진집의 제목을 써달라고 할 것인가? 두수현은 호요방을 생각해낸다. 그가 일찌기 총서기의 신분이었던 것은 차치하고, 관건은 그의 인격적 매력이다. 그의 정직하고 열정적이며 협간의담(俠肝義膽)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외에 또 하나의 원인이 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의 하야에 동정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4월, 봄날씨는 따스하고 꽃은 피었다. 청멀절의 다음 날, 두수현은 친구의 추천을 받아, 호요방의 집으로 간다.

 

"노두(老杜). 난 당신을 안다. 당신은 중남해에서 유명한 사진기자가 아닌가."

 

두수현이 아직 제대로 서기도 전에 호요방이 열정적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에서는 따스함이 흘렀다. 그들 두 사람이 평등한 친구인 것처럼 느끼게 했다. 이전에, 많은 사람들은 호요방이 아주 시원시원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그래서, 두수현도 바로 주제로 들어갔고, 이번에 찾아온 목적을 얘기한다: 그에게 사진집의 표지 제목을 써줄 것을 부탁한다. 호요방인 웃으며 그를 거실로 데려간다. 두수현은 바로 가져온 30여장의 24인치로 확대한 지도자들 사진을 차례대로 거실의 카페드 위에 늘어놓는다. 모택동, 주은래, 유소기, 주덕, 등소평등 당과 국가지도자들이 있고, 진의, 서향전, 섭영진, 섭검영등 원수들도 있었다.

 

호요방은 한장 한장 자세히 보았고, 다 보고나서 허리를 펴며, 다시 한번 두수현의 손을 잡는다: "잘 찍었다. 진짜 같다."

 

호요방은 흥분하여 묻는다: "이런 사진작품에 책제목을 써주는 거야 문제없다."

 

두수현은 사진을 수습한 후, 사진집의 관련상황을 소개했다: "이들 사진은 모두 제가 이전에 찍은 작품중에서 고른 것입니다. 그중에 많은 사진은 이미 다시는 얻을 수 없는 진귀한 고품(孤品)입니다. 사진을 고를 때, 저는 여러 분의 아직 건재한 원수님들에게 글을 부탁했고, 서향전 원수는 "충실하게 역사를 재현했다."라는 글을 써주셨고, 섭영진 원수는 "역사의 견증"이라고 글을 써주셨습니다. 표지의 제목은 당신에게 남겨두었습니다."

 

호요방은 연안시기에 과감하게 직언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연안정풍운동에 대하여 이견을 제출했고, 서간부(鋤奸部)는 그의 여러번에 걸친 건의끝에 보위부(保衛部)로 개명된다. 그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것은 개혁개방초기에, 중앙조직부를 주재하는 기간동안, 등소평의 전적인 지지하에, 많은 원가착안(寃假錯案)을 친히 시정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타도되었던 많은 노간부들이 다시 정치무대에 돌아왔다. 비판받았던 오십만의 '우파"들의 반동이라는 모자를 벗겨주어, 그들에게 인간의 존엄을 돌려준다. 그가 사람들에게 또 기억되는 것은 나중에 크나큰 용기를 가지고, '실천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라는 대토론을 주재한 것이다.

 

그 자신은 업무에 잘못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용감하게 반성했고, 용감하게 감당했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그의 정직, 솔직, 무사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얻어냈다. 그의 좌우명은 "공즉명(公則明), 염칙위(廉則威). 정인선정기(正人先正己). 그렇지 않으면 윗물이 맑지 않으면 아랫물도 맑지 않다(上梁不正下糧歪)." 그는 정치를 청렴하게 했고, 일신정기(一身正氣), 양수청풍(兩袖淸風), 광명뇌락(光明磊落)했다. 그가 총서기를 맡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부는 가족회의를 개최한다. 호요방은 엄숙하게 말했다: 누구든지 그의 간판과 지위를 이용하여 밖에서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여 잘못된 일을 하거나 나쁜 일을 하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뭐라고 써주면 좋겠는가?"

 

"총서기께서 한번 봐주십시오. '영수순간(領袖瞬間)'이 어떻겠습니까?"

 

"나를 그냥 호요방이라고 불러라. 아니면 노호(老胡)도 좋고." 당시, 호요방은 이미 총서기의 직위에 있지 않았다. 그저 구체적인 업무가 없는 정치국 상임위원만 맡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렇게 친절하고 다가가기 쉬웠으며 열정적이었다. 퇴직하여 집에 있다는 것에 실의한 모습은 전혀 없었다. 이런 좋은 심리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고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직한 후, 한동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고, 마음이 텅빈 것같이 느끼는 경우가 많다. 호요방처럼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위치에서 물러나서, 이렇게 빨리 담담하게 대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예상밖이다.

 

한동안 얘기를 나누고, 담배를 피우고 차를 마셨다. 짧은 '준비운동'이 끝난 후, 호요방은 몸을 일으켜, 그의 서재로 가자고 한다. 거실을 나서니, 봄의 기운이 다가왔다. 서재는 전원(前院)에 있었다. 서재는 비록 크지 않았지만, 확실히 명실상부한 서재이다. 서가가 한 면을 꽉 차지하고 있었다. 호요방은 창쪽의 넓다란 서탁의 앞에 앉아서, 선지를 깔았고, 천천히 붓을 들어 먹을 묻힌다. 호흡을 가다듬고 붓의 감각을 찾았다. 그는 벼루의 옆에서 가볍게 붓을 잡고, 선징 잠시 머문 다음 바로 써내려 갔다.

 

호요방은 옆으로 보고 아무 말도 없이 들어서 한 켠에 둔다. 그리고 다시 한장을 쓴다. 보고는 만족스럽지 않은지 다시 썼다. 한꺼번에 6.7장을 쓴다. 그는 이리저리 고른 다음 그 중에서 2장의 비교적 만족스러운 것을 골라서 두수현에게 건네준다. "이것은 내가 처음으로 사진집에 써주는 책이름이다. 잘 쓰지 못했으니 웃지나 말라." 그는 겸허하게 웃으며 말했다.

 

서재를 나오니, 봄빛이 이미 정원에 가득했다. 호요방의 정원은 상당히 협소했다. 2,30평방미터에 불과했다. 농촌의 집보다도 작았다. 북경의 아주 보통의 사합원이었다.

 

두수현은 신속히 호요방의 반신사진을 찍는다. 호요방은 자신의 자신을 찍는다는 것을 의식하고, 입고 있던 중산장을 가다듬었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래서 두수현은 연속 몇장을 찍고서 카메라를 내려놓는다.

 

이 때, 호요방은 의외로 양복으로 바꾸어 입고 한 장을 찍자고 제안한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남다른 일이었다. 그 때, 중산장과 양복은 거의 '보수'와 '개방'의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국가지도자들이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사진은 대부분 중산장을 입은 모습이었다. 양복을 입는다면 아마도 다른 효과를 나타낼 것이다. 과연 양복을 입은 호요방이 집에서 나왔고, 사람들은 눈앞이 밝아진 것을 느낀다.

 

두수현은 급히 조리개와 촛점을 맞추고, 호요방의 포경창상(飽經滄桑), 심침응중(深沈凝重)한 순간을 담아냈다. 다만 두수현은 몰랐다. 이 사진이 호요방의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은. 이 마지막 사진 속에서, 마치 호요방의 얼굴에는 일종의 고통과 우려가 나타나 있는 것같다. 전체적인 정신상황은 아주 낙관적이었다. 3일후, 즉 4월 9일, 중남해 회인당에서 개최된 중공중앙정치국회의에서 호요방은 돌연 심장병이 발작한다.

 

입원후 4월 16일 새벽, 호요방은 간호사에게 말한다: "오늘이 16일이지. 난 몇 걸음 걸어보겠다." 간호사는 병원측에 보고하여 지시를 기다렸는데, 의사가 동의하지 않았다. 호요방은 고집을 부린다. 자신은 오늘 정신이 아주 좋으니 문제가 없을 거라고. 의사가 말렸지만 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에게 가벼운 운동을 하도록 허락한다. 7시 30분, 호요방은 세상을 떠난다.

 

호요방이 4월 9일 발병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두수현은 즉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서, 그날 사진을 찍은 카메라를 꺼낸다. 바로 도편사에 보내어 호요방을 찍은 필름을 현상한다. 16일, 불행한 소식이 흘러나왔다. 두수현은 밤을 새워 호요방의 중산복과 양복사진을 각각 24인치로 확대하여 4월 17일 오전에 호요방의 집으로 보낸다. 호요방의 집은 커다란 불행을 맞이하였고, 일반백성들의 깊은 사랑과 애도를 받았다. 노동자, 농민, 군인과 학생이 비통한 심정으로 자발적으로 호요방의 집으로 계속 찾아온다. 전원의 영당 앞에 호요방의 유상을 향하여 절을 하고 애도했다. 그리고 하얀 꽃을 한 송이씩 바쳤다. 민중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한 사람을 위하여, 민중은 진심으로 그를 기념했다.

 

호요방의 부인 이소(李昭)는 떨리는 두 손으로 호요방의 유조를 받아들었다. 그녀는 호요방의 양복을 입은 사진을 보더니 참지 못하고 두 눈에 눈물을 흘린다. 그녀는 울믐으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이 사진이 가장 그를 닮았다....만일 가능하다면, 우리 가족은 이 사진을 호요방의 유상(遺像)으로 하고 싶다..."

 

중공중앙의 연구를 거쳐 이소와 친척의 의견이 받아들여진다. 4월 22일, 중앙이 주재한 추도회에 걸린 것은 바로 이 사진이다. 이것은 국가지도자가 처음으로 칼라사진을 유상으로 사용한 경우이고, 처음으로 실외에서 찍은 자연스러운 사진을 사용한 경우이고, 처음으로 양복을 입은 유상이다. 또한 국가지도자가 처음으로 웃지 않는 얼굴사진을 유상으로 사용한 경우이다. 결론적으로 그것은 '표준유상'의 많은 개념을 돌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