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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초기)

살이호전투(사르후전투): 만력제의 조종(弔鐘)

by 중은우시 2014. 10. 5.

글: 양청균(楊淸筠)

 

 

 

 

이 때는 이미 만력46년이다. 휘황찬란한 만력삼대정(萬歷三大征)이 끝난지 이미 20여년이 지났다. 당시 장거정(張居正)의 개혁이 남겨준 중흥의 여휘(餘暉)도 기본적으로 모두 사라진 상태이다. 당시에 그 가득했던 국고는 이미 해마다 이어지는 전투로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나중에 다시 채워넣은 것은 천하백성의 통한과 저주가 섞인 가렴주구의 재물들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자금성의 화려하기 그지없는 기왓장과 처마, 대명황릉의 전석과 초목에 들어갔다. 당시 전투력이 아직 괜찮았던 명나라군대는 이때 이미 부패가 극심하여 군심은 하나로 되지 못하고, 역량도 피폐해졌다. 당시 막북을 종횡하고, 조선에 원정가고, 천검(사천,귀주)를 소탕하던 용맹한 장수들은 전사한 사람도 있고 이미 늙어 은퇴한 사람도 있다. 만일 신경써서 살펴보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는 명신종의 48년통치가 끝나는 때로부터 겨우 2년이 남겨져 있을 뿐이다. 여진의 동탕은 만력의 집정생애에 어떤 결말을 준비하고 있었을까?

 

비록 적이 강대하더라도 강경한 대명왕조는 여전히 죽어도 고개는 숙이지 않는다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만력제가 누르하치에게 대답한 것은 "돈이나 재물을 꿈도 꾸지 말아라"는 과단함이었다. 그는 아마도 예전의 발배를 평정한 것처럼 이 기세등등한 누르하치를 평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발배가 아니었고, 만력도 그때의 만력이 아니었다.

 

먼저, 가장 중요한 주장(主將)이 골치거리였다. 삼군을 얻는 것은 쉬워도 장수 하나를 구하는 것은 어렵다. 이렇게 여러 해가 지났지만, 대명제국에 그럴듯한 장수가 더 이상 나오지 않은 것이다. 이번에 요동에 출병하면서 만력제는 자신이 가진 파견가능한 장수들을 놓고 고심했다. 마지막에는 결국 임진왜란에 참전한 바 있는 전 병부시랑 양호(楊鎬)였다. 비록 그는 임진왜란때 무슨 재능을 발휘하지는 못했고, 순전히 운이 좋아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급사하는 바람에 그는 그 기회를 틈타서 추격하여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전쟁터에서 칼을 휘둘러 본 사람이다. 다시 그를 써보자. 이 노인네는 이미 고희(70세)가 넘었는데, 그의 수준이 여전히 낮을까? 만력제는 어찌해야할지를 잘 몰랐다.

 

양호는 노구를 이끌고 다시 전쟁터에 나선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게을러빠진 형편없는 요동군이었다. 그럴 듯한 선봉부대 하나도 뽑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전국에서 병력을 모집한다. 감숙에서 절강까지, 섬서에서 산서까지 명군은 천리먼길을 걸어와서 요동의 전장으로 간다. 양호장군은 기세에서 커다란 에너지를 충전했다. 그외에 이전에 대명으로부터 큰 원조를 받은 바 있는 조선측에서도 명나라를 도와 여진을 토벌할 원군을 보내온다. 큰형님의 전선으로 달려온 것이다. 만력제는 양호에게 상방보검도 내린다. 그에게 '장수는 바깥에 나가면 군왕의 명도 받들지 않을 수 있다"는 특권으로 안위시킨다. 전투에 나갈 장수들을 배치했는데, 대부분은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예를 들어 평양혈전때 성의 서쪽을 점령한 이여송(李如松)의 동생 이여백(李如柏), 예를 들어 북상하여 일본과 싸우고 남하하여 양응룡(楊應龍)과 싸웠던 대장 유정(劉綎), 대명명장의 후예인 마림(馬林)등. 진용은 겉으로 보기에 강대했고, 그저 일전만 기다리는 것같았다.

 

만력47년 이월, 대명이 누르하치를 토벌하기 위하여 모은 대군이 정식으로 행군을 시작한다. 40만이라고 칭했으나 실제로는 20만도 되지 않는 인원으로 여진의 본거지로 진격한다. 양호는 이렇게 준비한다. 병력을 4로로 나눈다:

 

북로군대, 개략 1만5천, 개원총병 마림이 이끌고 주로 북쪽을 공격한다.

남로군다, 개략 1만, 요양총병 유정이 이끌고, 동남쪽을 주로 공격한다.

중로군좌익, 주력군대이다. 당시 산해관총병을 맡고 있던 두송(杜松)이 이끌며 서쪽으로 진격한다.

중로군우익, 요동통병 이여백이 이끌며, 남쪽으로 진격한다.

 

이 4로군대는 각각 4개방향에서 누르하치의 본거지로 진군한다. 각각 치고 들어간 후 이도관(二道關)에서 회합하여. 그 후에 일거에 진격하여 공동으로 최후의 소굴인 허투라라(赫圖阿拉)를 점령할 예정이었다. 이 계획은 겉으로 보기에는 멋지다. 그러나 실제로는 헛점이 아주 많았다. 첫째, 4로군대가 각각 진격하는데 인원수가 서로 다르고 수준이 같지 않았다. 진격로에서 서로 다른 상황을 맞이하였을 때 대처하기 쉽지 않다. 임시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둘째, 이번에는 각자 따로 싸우는 것이다. 어떻게 정확하게 4로군대가 동일한 시간에 이도관에 도착한다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셋째, 몇 명이 길을 가더라도 이런저런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들은 요란스럽게 누르하치의 심장지역으로 들어가는데 팔기군들은 그들이 고속도로를 달리듯 순조롭게 지나가도록 놔둘 것인가? 만일 어느 1로의 부대가 전멸한다면 어떡할 것인가. 그렇게 되면 한 곳에 헛점이 발생하여 아주 골치아프게 될 것이다. 양호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필자조차도 알 수 있는 실행하기 어려운 계획을 당당한 총지휘관이 생각지 못했을까? 전투에서 가장 꺼려야 할 점은 분산이고, 탁상공론이고, 변수다발인데, 여기에서는 그 모든 것이 나타난다. 명군은 근본적으로 운에 기대는 것이다. 많은 약점들이 노출되어 있어 누르하치의 각개격파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회합하기로 말은 잘 했는데 그게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

 

이월 이십구일, 명군의 주력이 출전한다. 두송은 중로군 일로를 이끌고 이도관 부근의 살이호(薩爾滸, 사르푸)에 도착한다. 중로군은 역량이 가장 강했고 가장 자신감이 있었다. 오로지 적을 더 많이 죽일 것만 생각했다. 살이호산의 동쪽에는 소자하(蘇子河)라는 강이 흐른다. 소자하의 건너편에는 계범산(界凡山)이 있다. 계범산의 위는 바로 여진의 부대 하나가 있어 방어공사를 해놓았다. 두송은 적군을 보자 아주 흥분한다. 그는 계범산을 함락시켜 군영을 설치하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이 용감한 장수는 2만명을 이끌고 소자하를 지나 계범산을 공격할 준비를 한다. 남은 사병은 살이호에 주둔하며 수시로 출병하여 선봉부대를 지원하는 것을 기다렸다.

 

양호의 4로부대에 대하여 노르하치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즉시 두송이 이끄는 중로좌익군을 주목한다. 거기가 이번 출전의 주력이라고 이해한다. 두송이 인원을 이끌고 계범산을 공격할 때, 누르하치는 정예부대를 보내어 그가 살이호이 남겨둔 후속부대를 습격한다. 얼마후 명나라군대는 궤멸해버린다. 그리하여 두송의 퇴로는 차단된다. 두송은 이를 보자 조급해져서, 하루빨리 계범산을 함락시켜 쉬면서 정비하려고 한다. 그러나 여진군이 뒤에서 협공하고, 산위의 적군은 지형의 우세를 빌어 명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두송은 앞뒤로 적을 맞이하며 완강하게 버텼으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전선이 궤멸된다. 청사에 이름을 남긴 우수한 장수인 그는 살이호에서 금과철마(金戈鐵馬)의 전설적인 인생을 끝마친다.

 

두송이 대패하자, 이어서 도착한 것은 마림이었다. 이때 두송장군이 전멸하였다는 소식이 아마도 이미 전해졌을 것이다. 마림은 겁을 먹는다. 그는 먼저 조정하기로 결정한다. 아마도 원군이 오기를 기다리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누르하치가 그에게 시간을 주겠는가? 여기서 양호가 병력배치를 하면서 얼마나 멍청했는지가 드러난다. 왜냐하면 거리가 서로 다른 상황임에도 몇 로의 군대가 도착한 시간의 차이는 팔기군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하나하나 죽이는" 마림은 원래의 장소에서 방어하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누르하치는 이미 금방 두송을 궤멸시킨 부대를 이끌고 신속하게 그의 면전에 집결한다. 그는 어쩔 줄을 몰랐다. 마림은 낭패하기 그지없이 겨우 포위망으 뚫고 개원의 고향집으로 도망친다. 북로군도 이렇게 끝장난다.

 

양호는 심양에 앉아서 승리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연이어 두송, 마림이 패전한 비보가 전해진다. 그는 급히 사람을 보내어 유정과 이여백에게 멈추고 명령을 조심스럽게 기다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핸드폰이 없었다. 전보도 없었다. 유정은 이 중요한 지령을 받지 못하고, 이 조선과 파주(播州)에서 모두 혁혁한 전공을 세운 노장은 적의 함정에 빠진다. 그것은 평양전투에서 이여송이 일찌기 쓴 바 있는 수법이다. 아주 간단했다. 속이는 것이다. 누르하치는 두송을 칠 때 포로로 잡은 명군을 가지고, 여진사병을 두송의 부하로 위장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두송의 영전(令箭)을 갖고 유정을 찾아가게 한다. 그리고는 유정에게 말한다. 그들 부대와 회합을 기다리고 있으며, 원군이 바로 앞에 있다고. 유정은 두송이 이미 패배하여 전사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한마음으로 하루빨리 부대가 회합하기를 기다렸고, 하루빨리 원군을 만나길 고대했다. 이번 전투에서 그의 부대는 이미 피로에 지쳐 있었다.  용맹하기 그지없어 아주 무서운 사패륵 홍타이시도 그에게 여러번 격퇴당하였다. 두송이 전면에서 그를 기다린다는 말을 듣자, 유정은 사기가 크게 올랐다. 과연 얼마 가지 않아서 '두송'의 부대가 맞이하러 나온다. 명군은 기쁨에 넘쳐서 우군과 포옹하려고 하였는데, 그제서야 그들이 여진이 위장한 것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졸지에 군심이 크게 흐트러지고, 도망치는 자들이 많아진다. 혼란의 와중에 팔기군에게 전멸당한다. 유정도 죽어라 싸우다가 용맹하게 전사한다. 또 한 명의 장수가 죽은 것이다. 오호 애재라. 누르하치라는 이 늙고 교활한 우두머리는 사기수단을 쓰는 것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무순성에서도 그러했고, 살이호에서도 그러했다. 그러나 병불염사. 전쟁에 속이는 것을 꺼려서는 안된다. 유정이라는 백전노장이 이렇게 조심성없이 당하다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마지막 일로인 이여백은 유정과 반대였다. 그는 아주 조심성이 많았다. 그래서 미리 만나기로 예정한 날짜보다 3,4일을 늦게 간다. 천천히 가다보니 양호로부터 진군을 정지하라는 명령도 받는다. 그는 바로 뒤돌아 철수한다. 이렇게 군사력을 유지하려고 한 것이다. 이여백의 살이호에서의 행동에 관하여 많은 사람들은 그의 초심을 의심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씨집안은 대대로 요동에 주둔하면서 아마도 누르하치와는 깊은 우의를 맺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떤 사람은 그의 부친 이성량이 요동에서 누르하치가 발전하는 것을 못본척 눈감아주었다고 본다.  비록 처음에는 그가 대명강산을 뒤집어버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여진이 강대해지는데 공헌을 했다. 이여백이 이번에 천천히 진군하여 누르하치에게 시간을 벌어주고, 동료우군에 원군을 보내지 않은 것이다. 도대체 진상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저 추정해볼 수밖에 없다. 추측해보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 터무니없어진다.  사람의 말이라는게 무섭다. 이여백은 마지막에 2년후에 핍박을 못이겨 한을 품고 자결한다. 고의로 누르하치를 도와준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일대의 충심이 가득한 부친과 형이 나라를 위해 일생을 바친 장수집안의 후예로서, 돌연 적군과 내통하여 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불명예를 뒤집어쓰다니, 어찌 그런 것을 견딜 수 있을 것인가?

 

다시 전쟁으로 되돌아가보자. 현재 우리는 보았다. 양호의 살기등등한 4로군은 모조리 궤멸했다. 두 명의 주장은 전사했다. 살이호전투는 기실 1주일도 지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망과 손실은 아주 참중했다. <삼조요사실록>의 록에 따르면, "...여병(麗兵, 조선지원병)을 제외하고, 출전한 관군은 모두 8만8천5백5십명이다. 사망한 도진부협참유도사통판수비중군천바기등 관이 모두 310여명, 인신 1개, 사망한 군사 4만5천8백7십여명..."이 숫자는 무서울 정도이다. 왜냐하면 도와주러 온 조선군과 예허여진부락은 그저 인원수를 채운 것인데, 명군의 본부병력에서 사망자가 반이 넘는다. 짧은 며칠만에, 대명은 손발을 어찌해야할지 모르는 난감한 국면에 처한 것이다. 살이호의 전투는 누르하치가 일거에 성공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대명이 만주와의 전쟁에서 존망흥쇠를 결정짓게 된다.

 

만력삼대정의 휘황한 배후의 상처를 대명제국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요동전투에서 그것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래고 재정적으로 이미 돈이 없었다. 만력은 더 이상 계속 이전의 성취에 도취하여 있을 수가 없었다. 그와 그의 관리들, 그의 방대한 제국의 상하는 모두 깜짝 놀란다. 여진의 손에 이렇게 참혹하게 패배하다니. 패전한 총지휘관 양호는 감옥에 들어간다. 이 칠십여세의 노인은 결국 살이호에서 패주하면서 말년의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청사에 치욕적인 흔적을 남기게 된다. 무수한 연구자들은 모두 이해를 하지 못한다. 양호가 정말 그렇게 멍청한가. 4로군대를 이끌고 거의 불가능한 회합에 승부를 걸었는가. 어떤 학자는 그가 아마도 고의로 이 계획을 털어놓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실제로는 두송과 마림이 이도관으로 진격하게 하고, 이여백과 유정은 직접 허루하라를 급습하게 보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계획이 그러하다고 하더라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그는 그렇게 백치가 아니라는 것뿐이지, 살이호에서 만회불가능한 상처를 입은 것은 역사에서 고칠 수 없는 사실이다.

 

누르하치의 팔기군은 저무는 대명정부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그들은 '칠대한'을 가지고 무한한 용기를 고취시켰고, 상하가 한 마음이 되었다. 그리고 후고지우(後顧之憂)가 없었다. 소위 맨팔 맨발로 덤비면 신발신은 사림이 겁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진군대는 전쟁에서 커다란 우세를 보인다.

 

다시 대명정부를 되돌아보자. 한 무리의 언관들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어떻게 적군을 대해야 할지를 모른다. 그저 계속하여 회의를 열 뿐이다. 살이호전투전에 그들은 상의하고 토론한 회의는 백번이 넘는다. 그러나 그저 양호의 엉터리같은 아이디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양호는 늙었는데 아직도 밥은 잘 먹는가"라고 물어본 사람도 없었다. 더욱 가소로운 것은 명군이 막 요동전장에 도착했을 때, 중앙에서는 양호에게 급히 전투를 개시하라고 재촉할 뿐이었다. 이것은 급히 우환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나 설마 용병을 급하게 하여서는 안되고 시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려야 된다는 이치를 몰랐단 말인가. 이런 후방은 실로 좋은 작용을 하지 못한다.

 

살이호전투가 패배한 때는 이미 만력47년이다. 이후 누르하치는 더더욱 거리낌이 없었다. 요동을 무인지경처럼 휩쓴다. 그가 이후 대명왕조를 무너뜨리는 서막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명신종 만력제에게 사망의 조종이 울린 것이다. 황제의 자리에 48년간이나 앉아있던 황제는 이미 생명의 끝자락에 이르렀다. 살이호는 그가 본 마지막 저명한 전투이다. 동남에서 서북까지, 동북에서 서남까지, 척계광의 왜구와의 싸움에서 이여송의 달단과의 전투, 임진왜란원병에서 파주반란진압까지,  만력제는 여러 전투를 겪었다. 그는 신성한 중화의 위엄을 성취한 바 있다. 그리고 무상한 영광의 제왕으로서의 명예를 얻은 바 있다. 그러나 생명의 마지막에, 여진 누르하치의 팔기군에게 상승의 존엄은 완전히 짓밟힌다. 이 평범하지만 특수한 산에서 이 황제는 씻어버릴 수 없는 실망과 유감을 남긴다. 얼마후 그는 세상을 떠난다. 다시는 그의 대명의 깃발아래에서 대군이 위세를 떨치는 장면을 볼 수 없게 된다. 촛불이 남은 밤에 그는 누구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