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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초기)

청나라황실(4): 황족은 실질적으로 어떻게 구분되는가?

by 중은우시 2014. 7. 17.

글: 귤현아

 

청나라때의 종실은 제도적인 구분이 있다. 즉 각라, 종실로 나뉘고, 다시 종실은 원지종실, 근지종실, 근파종지등으로 나뉘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상의 구분은 앞에서 설명했다. 그외에 청나라황족은 실질적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아래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첫째, 소위 "세직(世職)"

 

'세직'은 실제로 '작위가 있는 종실과 각라"를 가리키다. 그 사람들의 수는 황족인구에서 아주 적은 비율을 차지한다.

종실남성가운데, 작위를 가진 사람의 비율은 6.3%에 불과했다. 각라남성중에서 작위를 가진 사람은 더욱 낮아서 3%가량일 것이다. 그리고 각라의 작위체계는 종실과 다르다.

이런 '세가(世家)'는 실제로 두 가지로 다시 나뉘어 진다. 하나는 소위 '작저(爵邸)'인데, 종실중 '친왕'에서 '봉은보국공'까지 6등급의 작위를 가진 가족은 '부저세가(府邸世家)'로 불린다. '작저'는 종실의 작위를 가진 남성중 1/4에 불과하다. 즉 총인구의 1.6%에도 못미친다. 그외의 하나는 보통의 불입팔푼(不入八分)의 작위종실 및 민작(民爵)의 각라이다.

"세가"의 황족은 경제적이든 정치적이든 모두 특수한 대우를 받았다. 특히 '작저'는 더욱 그러했다. 경제적 정치적인 특수한 대우를 받기 때문에, 귀족성이 더욱 두드러지고 문벌도 아주 높은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황족후예는 기본적으로 이 계급에 속한다. 예를 들어, 부걸, 부동, 김기수, 영생, 계공, 계종등등이다. 그들은 너무 유명해서, 많은 사람들이 황족이 전체적으로 모두 '세가'인 상황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래서 민간의 구전에서는 과장되게 전해지기도 한다. "처처시왕야(處處是王爺), 개개시패륵(個個是貝勒)"의 습관을 조성했다.

 

둘째, 소위 "관환(官宦)"

 

'관환세가'는 종실, 각라가 직책 혹은 과거를 통하여 관료로서 성공을 거두고, 자손들이 자주 관직에 나가는 가족을 말한다. 이런 관환세가는 대부분 한산종실각라 혹은 개별적인 세직세가가 변하여 형성되었다. 어떤 때에는 세직가족과 겹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계공의 가족이 분명한 예이다. 세직세가에서는 '조음(祖蔭)'으로 관직에 나가는데 반하여, 관환세가는 '진짜 실력'으로 관직에 나갔다. 그리고 그 지위는 보통세직세가와 맞설 수 있었다. 심지어 일부 과거를 통한 황족관환세가는 일시에 명문가족이 된다.

 

그러나 결국, 황족중에서 관직에 나가는 사람은 소수였다. 관환세가, 과거세가를 형성할 수 있었던 집안은 극소수이다.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다. 세직출신으로는 화친왕 갈래의 계공가족, 이친왕 갈래의 혁호가족등이 있고, 한산출신으로는 예친왕 갈래의 보희가족, 공친왕(노공친왕) 갈래의 수기가족등이 있다.

 

셋째, 소위 "한산(閑散)"

 

실제로 위의 두 경우를 제외하고 나머지 종실과 각라를 가리킨다. 그들은 약간의 일거리를 맡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관직이 없다. 매월 조정에서 지급하는 돈으로 생활한다. 이처럼 관직이 없는 사람이 종실 남성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70%가량이다. 각라는 데이타가 없지만, 분명히 종실보다 높을 것이다. 그들은 황족의 개별적인 특권이외에 생활에서는 보통의 한산기인(閑散旗人)과 다를 것이 없었다. 실제로는 '황족'의 보편적인 상태이다. 그들의 출신이 '황족'이라는 속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그들이 실제상으로는 '백성'의 속성을 지녔다고 강조하는 편이 나을 정도이다.

 

서로 다른 출신과 서로 다른 경력은 청나라 황족을 서로 다른 상황으로 만들었다. 단일한 상황으로 전체적인 상태를 나타낼 수는 없다. 황족이라고 하여 모두 왕야, 패륵은 아니다. 황족이라고 하여 매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기만 한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