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귤현아
각라는 속칭 '홍대자'이다. 청나라때 황족의 일부분이다. 주로 태조 누르하치의 본가 먼친척들로 구성되었다.
청나라때 각라는 모두 2개 파, 7개 갈래가 있었다. 어떤 때는 '칠각라(七覺羅)" 혹은 "각라칠가(覺羅七家)"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1파는 흥조(푸만, 福滿)의 후손들로, 태조 누르하치의 큰할아버지 및 작은할아버지의 지계(支係)이다. 모두 5개 갈래가 있다.
"일조(一祖, 大祖라고 부르기도 함)" 더스쿠(德世庫) 갈래
"이조(二祖)" 류찬(劉闡) 갈래
"삼조(三祖)" 소창아(索長阿) 갈래
"오조(五祖)" 바오랑아(包郞阿) 갈래
"육조(六祖)" 바오스(寶實) 갈래
제2파는 경조(景祖) 의 후손인 각라이다. 태조 누르하치의 큰아버지 및 작은아버지의 지계인데, 모두 두 갈래가 있다.
경조의 장남 리둔(禮敦) 갈래
다섯째 아들 타차폔구(塔察篇古) 갈래
각라는 태조 누르하치의 친척이고, 이 점은 문제가 없다. 다만 이들 친족은 누르하치에 있어서 그 영향이 자주 부정적이었다. 특히 흥조의 후손인 각라들이 그러했다.
당시 태조가 막 거병했을 때, 각라의 각 갈래는 속속 반대한다. 롱둔(龍敦, 삼조 소창아이 넷째아들)은 대조, 이조, 삼조, 육조의 후예를 모아놓고 조묘(祖廟)에서 맹세를 하여 태조를 모살하기로 약속한다. 그리고 암살등 수단을 쓴다. 그후 그들은 태조의 매부등을 모살하여, 태조에게 큰 타격을 준다. 나중에 태조의 세력이 커지자, 각라의 각 갈래는 속속 귀부(歸附)한다. 다만 여러번의 전투에서 각라의 각 장수들은 적을 두려워하며 모두 퇴각하곤 했다...
그러나, 청태종시기부터, 각라의 후예들은 관료로서 안정적이고 여러 방면에서 공헌을 하게 된다. 각라제도도 점차 확립된다.
각라의 특징은 아주 많은데 구체적으로는 다음의 몇 가지이다.
첫째, 작위가 저하된다.
많은 사람들은 친왕에서부터 봉은장군까지의 작위를 '황족작위'로 부른다. 실제로 정확한 칭호는 '종실작위'이다. 즉, 각라는 이런 작위를 받을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다.
청나라때 각라가 얻는 작위는 그저 이성(異姓)과 마찬가지로 공후백자남 내지 은기위(恩騎魏)까지이다. 그리고, 청나라때 각라의 작위는 보편적으로 저하된다. 현재 필자가 본 각라가 얻은 최고작위는 아마도 바이산(拜三)(오조 바오랑아의 증손자)의 손자 모뤄훈(莫洛渾)일 것이가. 그는 사후에 삼등백(三等伯)에 추증된다. 그외에 자작이 3,4 개 있고, 남작은 여럿 있다. 나머지는 보편적으로 한산각라이다.
청나라때 종실이 작위를 보유한 비율은 6%였다. 각라는 더욱 낮다. 아마도 2%이하일 것이다. 인터넷에서 자주 각라의 후예라는 사람들이 자신의 조상이 무슨 왕야, 패륵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조상들이 들으면 얼굴이 발개질 일이다.
2. 동북에 많이 거주했고, 촌둔(村屯)에 집단거주했다.
청나라때 종실은 양경거주제를 취한다. 즉 북경 혹은 성경에 거주했다. 그리고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없었다. 예를 들어 A가 종실인데, 그가 성경으로 이사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통일적인 계획에 따라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성안'에 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북경이면 북경성내의 동성 혹은 서성에 살아야 한다.
각라는 제도상 이런 제도를 맏들었다. 그러나 사실상, 각라는 상당한 일부분(심지어 거의 절반)이 모두 심양주변의 촌둔에 거주했다. 이런 시골에서 생활하는 특성은 종실에는 없는 것이다.
3. 보결(補缺)
청나라때 관결(官缺)은 자주 한결(漢缺, 民缺이라고도 함), 만결(滿缺, 旗缺이라고도 함)로 구분한다. 가경제 시기에 이르러 다시 '종실결"이 나온다. 각라는 확실히 종실결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저 '만결'로 보충될 수 있을 뿐이다.
4. 흠정자배를 사용할 수 없다.
원지종실과 마찬가지로, 청나라때 황실이 흠정한 "윤홍영면혁재부(胤弘永綿奕載溥)...." 이런 항열자를 사용할 권리가 없다. 선통제때 이르러 개별적으로 각라들이 스스로 흠정자배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점차 허용하게 된다. 오늘날, 많은 각라후예들은 모두 흠정자배를 사용한다. 다만 기실 그들의 조상은 이런 항열자를 사용할 수 없었다.
5. 경제대우
청나라때 각라와 종실의 성년남자는 모두 매월 섬양은(贍養銀)을 받았다. 청나라초기의 규정을 보면, 종실은 매월 은3냥, 매년 쌀 42곡2두, 각라는 매월 은2냥, 매년 쌀 21곡2두를 받았다. 여기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청나라때 각라의 대우는 이상의 여러가지 특징이 있어, 많은 글에서는 각라를 '황족'으로 보면 안된다고 말한다. 혹은 '1등황족'이 아니라, '유사황족'의 개념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확실히 청나라때 각라의 지위를 잘 말해준다고 할 것이다. 문화적으로 말하자면, 각라는 애신각라 성의 시골적인 특징을 잘 보여준다. 종실과 비교하여 말하자면, 각라지계는 풍속이 훨씬 순박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민국시기에 만주족배척의 분위기 하에서, 도시에 살던 종실각라는 속속 집단거주지를 떠나게 되고, 자신의 문화권과 거주권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시골에 거주하던 각라는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또 다른 측면으로, 시골에 거주하던 각라 자체는 상당한 지방세력이었다. 이런 상황은 지금까지도 계속된다. 그래서, 각라의 후예들은 지금도, 어느 정도 종실보다 훨씬 활성화되어 있다. 특히 동북지방에서 그리고 인터넷에서 보이는 많은 자칭 애신각라라는 사람들은 모두 각라의 후예들이다. 그 종족성은 심지어 종실보다도 높다고 할 수 있다.
청나라때 각라는 보편적으로 세력이 약했다. 그저 극히 개별적인 세직가족과 관환가족이 있을 뿐이다. 각라의 세직가족은 지명도에서 종실보다 훨씬 못했다. 만청 각라의 환관세가는 예를 들어 성윤(成允, 소창아의 후손)가족등이 있다. 비록 각라중에서 몇 개의 명문이 있지만, 뉴후루씨, 나라씨등 씨족의 세가와 비교하면, 실제로 박약하기 그지없다.
당대 각라의 후예는 아주 많다. 남녀 합쳐서 모두 이만명이 되지 않는데, 주로 동북에 집중되어 있다. 다음으로는 북경이다. 각라는 성를 조(肇)로 붙이는 것을 좋아하는데, 약 절반이상이 그러하다. 일찌기 누군가 애신각라 성씨는 성을 붙이는 규율이 있다고 하였다. "내김외조(內金外肇)", 그것도 어느 정도 이치에 맞는다. 당연히 기인(만주족)이 성을 붙이는 것은 자기 마음이다. 그래서 이것은 그저 개략적인 말일 뿐이다.
위에서 언급한 시골적인 특성으로, 각라의 후예는 요즘 오히려 청나라때보다 활발하다. 특히 동북지방에서 그리고 인터넷에서. 현재 비교적 유명한 각라의 후손으로는 종수민(鍾壽民, 삼조의 후예), 조준철(肇俊哲, 오조의 후예)등이 있다. 각 분야에도 각라의 후손으로 유명인사들이 있는데, 대만에서 유명한 김부총(金溥聰)도 오조의 후예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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