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태감 왕진(王振)은 어떻게 국가대권을 장악했는가?

중은우시 2014. 8. 27. 00:50

글: 두문자(杜文子)

 

명나라에는 수많은 태감이 있었지만, 명성을 날린 태감들은 모두 한가지씩 재주가 있었다. 저명한 태감 왕진이 바로 그러하다. 그는 원래 하북(河北)의 한 현성에서 놀던 불량배였다. 젊었을 때는 책도 조금 읽었고, 몇번 과거에 참가했지만 모두 낙방했다. 처를 얻고 자식을 낳은 후, 현에서 교관(敎官)을 지낸다. 나중에 죄를 지어서 발배충군(發配充軍)된다. 이때 마침 조정에서 지방의 학관들중 일부를 궁중으로 불러 궁녀들을 교육시키게 한다. 이것은 원래 좋은 일이다. 다만 전제는 환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런 일이 있으면 가려는 사람이 아주 적다. 그러나 왕진은 이것이 두각을 나타낼 좋은 기회라고 여긴다. 처자식을 버리고 스스로 환관이 되어 궁으로 들어간다.

 

명선종 주첨기는 태감의 문화수준을 중시한 황제이다. 그러나 궁안의 태감들은 대부분이 학식이 없었다. 이때 글자를 아는 왕진은 태감들 중에서 두드러진 자였다. 그리하여 '왕선생'으로 존칭된다. 명선종도 그를 인재라고 여기고, 그를 태자 주기진(朱祁鎭)에게 보내어 글을 가르치게 한다.

 

이렇게 하여, 성격이 원래 교활한 왕진은 태자 주기진과 아침 저녁으로 함께 하게 된다. 각종 방법을 써서 태자의 환심과 신임을 얻어낸다. 도덕군자의 풍모를 지닌 왕진은 일약 태자의 스승이 되고, 이것은 이후 권력을 장악하는데 기초가 된다.

 

몇년이 지나지 않아 명선종이 사망하고, 주기진이 즉위한다. 그가 명영종이다. 이제 왕진은 자연히 중용된다. 왕진은 전 사례태감 김영(金英)의 자리를 차지하여 태감의 우두머리가 된다.

 

부친과 비교하면 주기진은 게으르기 그지없었다. 그는 "표의(票擬)"와 "비홍(批紅)"의 권력을 모조리 왕진에게 넘겨준다. 만일 현재라면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고 심각한 생리적인 장애가 있는 자가 일거에 국가대권을 장악한 것이다. 이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인가?

 

왕진은 황제가 자신을 신임하는 것을 기반으로 궁내에서 위세를 부린다. 나중에 그는 욕심이 커지면서 일부 군권을 장악한다. 그리고 문신을 겁주기 시작한다. 다만 왕진의 길은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명선종이 붕어하기 전에, 주기진에게 5명의 고명대신(顧命大臣)을 지명한다. 그들은 양사기, 양영, 양부, 장보(張輔)와 호형(胡瀅)이다. 즉위시 주기진은 겨우 9살이었고 친히 국가대사를 처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조모인 태황태후 장씨가 수렴청정을 한다. 장씨는 아주 현명하고 덕이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비록 정무를 보지만, 일체의 국가사무는 모조리 내각대신들에게 처리하도록 넘겼고, 자신은 절대로 관여하지 않았다.

 

장씨는 왕진이 점차 조정에 간여하려는 야심을 가진 것을 보고, 환관정치로 나라가 망하는 전조의 역사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녀는 왕진에게 겁을 주기로 결정한다. 이를 통하여 그의 야심을 꺽어놓으려는 생각이었다.

 

하루는 장씨가 궁녀에게 군복을 입게 하고 도검을 차게 하고 편전을 지키게 한다. 그 후에 5명의 고명대신을 부른다. 그들에게 어린 임금을 잘 돌보아달라고 하고, 다시 어린황제에게 국사를 다섯명의 대신과 협의하라고 당부한다.

 

얼마후, 장씨는 왕진을 대전으로 부른다. 왕진은 대전에 모두 모여있는 것을 보고는 장씨가 자신에게 중임을 맡기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속으로 득의양양했다. 그러나 장씨는 조금 전까지의 부드러운 모습을 일변하여 그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차갑게 말하고는 그가 일을 처리하면서 법도를 지키지 않으니 사사하겠다고 말한다.

 

왕진에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목에는 차가운 칼이 닿았다. 왕진은 놀라서 혼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바닥에 바짝 엎드려 목숨을 애걸했다. 주기진과 5명의 고명대신들도 깜짝 놀라서 급히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장씨에게 왕진의 목숨만 구해달라고 간청한다.

 

이런 상황을 보자, 장씨는 위협적인 말투로 왕진에게 말한다. 황제는 나이가 어리니 너같은 환관은 예로부터 국가에 해를 끼치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은 황제와 대신들의 얼굴을 봐서 죽음을 면하게 해주겠지만, 이후 절대로 조정에 관여하지 말라. 만일 이를 어기면 즉시 참수하겠다. 왕진은 그 말을 듣고는 머리를 땅에 박으며 감사인사를 하고 기어서 나갔다.

 

이번 교훈으로, 왕진은 이미 놀라서 간담이 서늘해진다. 다시는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 7년간 조용히 사례태감으로서의 직무를 다한다.

 

장씨와 5명의 대신이 오래 살았다면, 왕진은 절대로 국가대권을 장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통7년 장씨가 병사한다. 대명왕조는 왕진을 통제할 힘을 지닌 사람을 잃은 것이다. 왕진의 대권장악의 길에 가장 큰 장애가 제거된 것이다. 이때, 5명의 고명대신도 모두 늙을 사람은 늙고, 죽을 사람은 죽었다. 자리를 넘겨받은 내각대신은 경력이나 명망이 이전 대신들만 못했다. 조정의 권력은 마침 청황부접(靑黃不接)의 과도기에 접어든 것이다. 그리하여 왕진이 대권을 독점할 수 있는 시기가 성숙된다. 명영종 주기신의 총애를 가지고 왕진은 가볍게 대명왕조의 정권을 장악한다.

 

한 가지 사건은 왕진의 발호정도를 짐작하게 한다. 대명궁의 문앞에, 3척높이의 철비(鐵碑)가 서 있는데, 그것은 보통의 장식물이 아니라, 태조황제 주원장이 환관의 정치간여을 방지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그 위에는 "내신은 정사에 간여할 수 없다."(內臣不得敢於政事)라는 여덟글자를 새겼다. 전횡하던 왕진은 이 비를 없애게 한다. 다음날 아침 조당에서 아무도 왕진의 죄행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를 보면 왕진의 위세가 어느 정도로 높았는지 알 수가 있다.

 

왕진은 금의위를 장악하여, 일시에 권력이 사해를 뒤흔든다. 그외에 그는 곳곳에서 결탁하여 일부 관료들은 왕진이 대권을 장악한 것을 보자 속속 그의 밑으로 들어가서 뇌물을 바치고 아부했다.

 

왕우(王佑)라는 사람은 왕진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수염까지 깍아버린다. 왕진이 그에게 이유를 묻자, 그는 후안무치하게도 왕진을 자신의 친아버지로 여기기때문이라고 했다. 부친에게 수염이 없는데, 아들이 수염을 기를 수는 없다고 했다. 그의 후안무치한 정도는 고금에 유례가 없을 정도이다. 왕진은 그의 말을 듣고 아주 기뻐하며 즉시 그를 공부시랑에 임명한다.

 

왕진은 각종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에 반대하는 자들을 제거한다. 그리고 충신,양신을 조정에서 내보낸다. 그는 선후로 자신을 탄핵한 장환(張環)과 고충(顧忠)을 제거한다. 부마도위 석경(石璟)은 수감한다. 많은 조정신하들은 왕진에게 밉보여서 아무 이유없이 재앙을 당하였다.

 

다만 소인득지(小人得志)는 오래갈 수가 없다. 왕진의 최후는 아주 처참했다.

 

왕진은 탐욕으로, 명영종에게 몽골을 친히 정벌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명영종은 오이라트에 포로로 잡힌다. 역사상 '토목보의 변(土木堡之變)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왕진은 그에게 원한을 품은지 오래된 호국대장군 번충(樊忠)의 철추를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왕진의 일당과 가족들도 모조리 참형을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