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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황위계승전: 주고치(朱高熾) vs. 주고후(朱高煦)

by 중은우시 2014. 8. 27.
글: 두문자(杜文子)

누가 황위를 계승하느냐는 문제는 영락제 주체(朱棣)에게 처음부터 골치거리였다.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하나는 큰아들 주고치이고, 다른 하나는 둘째아들 주고후이다. 이치대로라면 장유유서의 관념이 강했던 고대에 큰아들이 원래 합법적인 법정승계인이다. 그러나 주고치는 신체적 조건이 좋지 않았고, 태어나면서부터 장애인이었다. 그리고 머리도 그다지 총명하지 못하여 주체와 비교하면 차이가 컸다.

둘째 주고후는 당연히 불만이었다. 주고희는 용모로 보나, 군사모략으로 보나, 모두 주고치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리고, 정난지역(靖難之役, 영락제 주체가 조카 건문제와의 사리에 벌인 황위다툼전쟁)때 주고후는 많은 전공을 세운다. 그리고 주체의 목숨을 구해준 바도 있다.

주고후는 주체와 마찬가지로 문무에 뛰어나고, 용맹하고 모략이 있어, 주체가 그를 아주 아꼈다. 이와 반대로 주고치는 장애인일뿐아니라, 심지어 의지도 박약했다. 그래서 주체는 주고치를 더욱 싫어했다. 주고치는 너무나 인애지심(仁愛之心)을 지녔다. 남경에 진입한 후, 주체는 사람을 많이 죽인다. 주고치는 대국을 고려하지 않고 주체에게 너무 죽이지 말라고 극력 간언한다. 주체는 천추위업을 세우고자 갈망했으므로 아주 강인한 후계자가 필요했다. 주고치는 이처럼 문약하니, 자연히 주체가 좋아할 리 없다. 그러나, 황위는 일반적으로 장남에게 승계된다,  만일 후계자문제를 잘 처리하지 못하면, 주체가 고생하여 얻어낸 천하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태자를 세우는 문제에서 설사 영명과단한 주체라 하더라도 역시 쉽지 않았다. 자신이 결정하기 어렵자, 주체는 신하들에게 묻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런 골치아픈 문제에 대하여 군신들마저도 두 파로 나뉘게 된다. 한파는 무장이고 다른 한파는 문신이다. 무장들 중에서는 대다수가 정난지역때의 공신이므로 주고후가 남경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만일 무공을 좋아하는 사람이 황위를 승계하면 주체가 시행한 '군사귀족'제도가 계속될 터였다. 심지어 더욱 발전시킬 수도 있었다. 반대로 만일 문약한 주고치가 황위를 계승하게 되면, 문관의 지위가 올라가고, 무장의 중요성은 약화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무력을 동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고치를 지지하는 문관은 해진(解縉), 양사기(楊士奇), 양영(楊榮)과 양부(楊溥)등이 앞장섰다. 그들은 전통관념이 아주 강했고, 자고이래로 황위는 장남이 승계해야한다고 믿었다. 만일 장남을 버리면 관례에 맞지 않을 뿐아니라, 심지어 국가내란을 불러올 수도 있다고 보았다. 이들 문신은 대부분 정난지역에 고초를 겪었고, 그들은 더 이상 황위를 차지하기 위한 전란을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주고치의 인의지심은 바로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형세하에서 필요한 것이었다. 이렇게 고귀한 품성은 주체나 주고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주고치는 문신의 지지를 받고, 주고후는 무장의 지지를 받았다. 그리하여 피차 세력이 대등했다. 손바닥이나 손등이나 모두 내 살이다. 주체로서는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주고치는 장점이 전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태조 주원장은 주고치를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성격이 온화하고, 정치에도 흥미가 있었다. 재능이 출중할 뿐아니라, 행정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정난지역때, 주고치의 수하는 겨우 1만의 사병뿐이었는데, 교묘하게 성방어전을 조직하여 이경륭(李景隆)의 강력한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이를 보면 주고치는 고지식한 사람이 아니었다. 중요한 순간에 그는 중임을 담당했고, 무기를 꺼내 용감하게 싸웠다. 정난지역때, 주고희는 선봉으로 공로가 적지 않았지만, 주고치가 후방을 지켜준 역할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 외에, 주고치는 승리의 히든카드를 쥐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아들 주첨기(朱瞻基)였다. 주첨기는 문무를 겸비하여, 주체가 아주 총애했다. 주체가 최종적으로 주고치를 태자로 낙점한 것은 장래 이 손자가 대통을 승계할 것을 고려하였기 때문이다. 주고치는 그저 과도로 여긴 것이다.

태자자리를 향한 싸움이 끝났다. 그러나 그것으로 황위를 향한 싸움이 끝났다고 할 수는 없다.

주고후는 운남으로 보내어져 변방을 지키도록 명을 받는다. 그는 마음 속으로 원한을 품었다. 그는 스스로 비범한 운명을 타고 났다고 믿었다. 원래 자신이 이길 것으로 생각했지만, 최종적으로 패배하니, 당연히 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중에 그는 주체의 앞에서 가련한 모습을 보이며 경성에 남게 해달라고 애원하여 결국 경성으로 돌아온다. 이제 그는 다시 한번 풍운을 불러올 수 있게 된 것이다.

부인할 수 없는 점은, 주고후가 사람을 치는 수단은 아주 독랄하다는 것이다. 그의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주고치는 함정에 빠진다. 한때는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태자당에 속한 사람은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하나는 주고치를 따라서 함께 감옥에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고후에게 붙는 것이다. 주고치의 가장 확실한 지지자인 해진과 '삼양'이다. 그들은 문관들 중에서 중추역량이다. 이것은 주고후로서 뚫기 힘든 난관이었다.

그러나 이 주고후는 자신을 이세민에 비유하기 좋아했고, 한때, '현무문의 변'을 발동시킬 생각까지 한다. 나중에 주체가 주고희의 야심을 눈치채고, 주체는 주고후에게 청주로 가서 지방을 지키도록 명한다. 주체의 뜻은 주고후의 반응을 보자는 것이었다. 만일 주고희가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그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가 미적거리며 경성을 떠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가 모반을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이런 소소한 시험에 주고후는 넘어간다. 그는 온갖 핑계를 대면서 경성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자 주체는 더욱 의심한다. 그리하여 결심을 내려, 주고후를 성에서 강제로 내보낸다.

주체는 주고후가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산동으로 보내버린다. 이것은 강제명령이다. 주고후가 아무리 애원해도, 반드시 가야만 했다. 가족과 시위를 데리고 주고후는 거의 매 걸음마다 뒤를 돌아보며 산동으로 간다.

그후, 주체는 주고치를 지지했다가 처벌을 받은 문관들을 사면시킨다. 그러나 주체는 황제로 너무 오래 있었다. 주고치는 황위를 승계한 후 겨우 10개월만에 죽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