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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일본인은 청일전쟁을 어떻게 보는가?

by 중은우시 2014. 6. 23.

글: 장풍(蔣豊)

 

세월이 흘러서 다시 갑오년이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갑오전쟁)이 발발할 때, 일본국민들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들은 왜 제자인 일본이 자신의 스승인 중국에 칼을 겨누고 덤벼드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명치대정견문록>의 기술에 따르면, 청일전쟁이 개전되는 초기에, 죠슈(上州, 지금의 군마현) 누마다(沼田)에 사는 우부카타 툐시로(生方敏郞)는 나이 12살이었다. 그의 집안에는 보물로 여겨지던 중국병풍이 하나 있었다. 그의 고향에서 1년에 1번 행해지는 여름제사의 수레에는 유방, 항우등 중국호걸의 등신상이 높이 서 있었다. 그는 부모와 선생이 가르쳐주는 한문전적을 공부했다. 그는 일본이 왜 이런 국가와 적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의 일본인은 누구도 감히 스스로 중국인과 비교할 수 있다고 자부심을 가질 수 없었고, 우리는 그저 중국보다 많이 낙후되지만 않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도쿄에서 출생한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회고록 <유소시대>에서 이렇게 썼다: "하루는 내가 식탁에서 부친에게 왜 일본이 중국에 전쟁을 시작했는지 물었다. 부친은 한편으로 술을 마시켠서 한편으로 길게 설명을 해주셨다. 그러나 부친이 뭐라고 말하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청일전쟁후, 일본인의 의식형태는 크게 변화한다. 겸비, 자긍이 점차 오만, 자대로 팽창한다. 중국, 조선에 대하여 차별하는 심리가 나타난다. 일본 사회주의운동의 선구자이며 평론가인 아라하타 칸손(荒畑寒村)은 <한촌자전>에서 이렇게 적었다: "청일전쟁전에 일본에 사는 중국인들은 현지에서 환영을 받았다. 요코하마에서 의복을 파는 중국에서 온 사람은 요코하마에서 약을 파는 도야마에서 온 일본인보다 더 우대를 받았다." 그러나 전쟁중에, "각지에서 일어난 청일전쟁 연극에서, 중국사병을 연기하는 일본배우가 무대에 등장하기만 하면  관중들이 땅콩껍질이나 귤껍질을 집어던진다. 어떤 배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무대에서 관중들에게 고함을 지르기도 한다. '나도 애국하는 마음을 가득 품은 일본인이야'"

 

일본 메이지시기의 유명한 기독교사상가 우치무라 간조(內村鑒三)는 <일청전쟁지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본과 중국은 각각 '신문명을 대표하는 소국'과 '구문명을 대표하는 대국'이다" 그가 보기에, 일본이 청일전쟁을 발동한 목적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지나(중국)을 일깨워주기 위함'이고, 둘째는 '지나로 하여금 일본의 천직을 알게 하기 위함'이고, 셋째는 '지나로 하여금 일본과 동양의 개혁에 합작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일찌기 일본외상을 지낸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는 <건건록(蹇蹇錄)>에서 이렇게 말했다; 개전후 일본의 각 대형신문은 모두 앞다투어 전쟁에 관한 보도를 실었다. 이들 보도에는 과장되게 대청국 관민의 단점을 지적하며, 욕하고 비방하는 내용들이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문구로 이홍장의 신분을 폄훼했다." 일본 매체의 이러한 방식은 일본국민의 전쟁에 대한 열정을 고취시키려는 것이고, 민족편견을 조장하는 것이다.

 

시노부 세이자부로(信夫淸三郞)는 <일본정치사>라는 책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청일전쟁은 마침내 일본의 국민을 통일시켰다; "청일전쟁은 천황이 '모든 국민의 마음 속에 군림하게 만드는' 동시에, '모든 국민의 마음 속에' '신민(臣民)'의 식을 확정시켰다. 삼국간섭은 국민의 통일을 더욱 강화시킨다." 확실히 청일전쟁이후, 근대일본은 신민의 방식으로 '국민'을 형성한다.

 

저명한 역사학자인 도오야마 시케키(遠山茂樹)는 <일본근대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청일전쟁은 일본제국주의의 모순이 폭발한 전쟁이 아니다. 다만 제국주의세계체제를 완성하고 일본제국주의의 형성과정을 시작하는 획기적인 것이다."

 

가와하라 히로시(河原宏)는 <근대일본의 아시아인식>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의 조야는 중국이 더 이상 일본근대화의 경쟁상대방이 아니라고 여긴다. 그래서 중국과 조선에 있어서, 문명측면이나, 군사장비측면에서 일본은 모두 숭배하고 탄복해야할 '선진대국'이 되었다. 일본은 그후 동양의 맹주가 된다."

 

저명한 사상사학자 야록정직(野鹿正直)은 <사상사논집>에서 이렇게 말한다: 청일전쟁후, 일본국민은 원래의 '극단적 자비'에서 '극단적 자부'로 바뀌고, 일종의 '강국'으로 자처하는 '대국민' '대민족'의식이 나타난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하여, 막부말기이래 지식계층에만 존재하던 중국멸시의식이 이미 완전히 일반국민에게도 삼투되었다."

 

1930년대 상하이에서 장사를 여러해동안 하고 노신과도 교분이 깊은 우치야마 간조(內山完造)는 청일전쟁후 일본사회의 '중국멸시관'을 이렇게 총괄했다: "일본인들은 중국에 대한 상식을 얘기할 때면 바로: 중국은 국가개념이 없고, 중국인은 지저분하며, 중국인은 아무런 일도 아닌 듯이 남의 물건을 훔치고, 중국인들은 거짓말을 잘하고, 중국인은 비겁하며, 중국인은 미신을 믿고, 중국인은 돈을 생명보다 중시하며, 중국인은 도박을 좋아하고, 중국인은 처를 여럿 둔다고 떠올린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번에 '노대국'을 쓰러뜨린 청일전쟁이 일본인의 소위 '애국심'에 불을 붙였다. 그리하여 천황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 무상의 영광으로 여기게 된다. 나중에 군사적 확대와 침략전쟁에 정신적 아편과 재정적 수입을 제공하게 된다.

 

일본 보수파인사이며 <청일전쟁에서 배운다>는 책의 작자인 곡구광덕(谷口光德)이 말한 것처럼, "현대일본을 구축하는데 대하여 말하자면, 청일전쟁의 작용은 러일전쟁보다 크다."

 

그렇다면, 중일 양국관계가 바닥인 현단계에서 중일양국 국민간에는 모두 이런 목소리가 있다: 다시 한번 '청일전쟁'이 일어날 것같은 현재, 일본의 각계인사들은 이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전 일본요코하마시립대학 총장, 도류문과대학 총장이며 역사학자인 가토 유조(加藤祐三)는 중일양국이 역사배경에서 분석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청일전쟁을 얘기하려면, 중일양국의 '개국'부터 얘기해야 한다. 1840년, 중국은 영국이 일으킨 아편전쟁으로 국문을 열게 된다. 1853년, 일본은 미국의 '흑선'이 와서 어쩔 수 없이 국문을 열게 된다. 표면적으로 보면, 중일양국은 모두 서방열강에 의하여 강제로 국문이 열리게 된다. 다만 실제로, 본질적인 차이점이 있다. 중국과 영국간에 체결된 <난징조약>은 '패전조약'이고, '징벌조약'이어서 중국에 영토할양, 배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후 중국과 외국이 체결한 조약은 모두 '패전조약'이다. 그중에는 최고금액의 배상금을 지급한 <시모노세키조약>도 포함된다. 그러나 페리제독과 일본이 체결한 <일미우호조약>은 미국과 일본이 교섭을 거친 후에 체결한 '교섭조약'이다. 전쟁을 거치지 않은 조약이다. 비록 중일양국은 모두 영국,미국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지만, 이런 본질적인 차이로 인하여, 중일양국의 근대사상 운명은 갈리게 된다.

 

가토 유조는 또한 이렇게 지적한다: 영국과 중국은 해양국가와 대륙국가의 싸움이다. 그러나 일본과 미국은 해양국가간의 싸움이다. 조절, 교섭이 비교적 용이했다. 상선이 무역을 담당하고, 군함이 군사력을 지탱하던 시대에, 해양국가는 발전에 더욱 유리했다. 중일양국의 정치체제를 분석하면, 일본은 당시 막부시대에서 메이지시대로 전환하는 시기이다. 서방국가의 발전목표와 일치했다. 그러나 중국은 황제제도하에서 여러 민족과 여러 책봉체제하에서 탄생한 번속국이 있었다. 1894년의 중국프랑스전쟁은 프랑스가중국으로부터 베트남이라는 번속국을 빼앗아간 전쟁이다. 이 전쟁은 일본에 큰 참고의미가 있었다. 1894년이 되어,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번속국 조선을 '독립'시키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번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주식회사 BBT의 회장 겸 CEO이고, 게이오의숙대학의 환경정보학부 특별초빙교수인 후지와라 히요시(藤原洋)는 과학기술의 진보라는 각도에서 청일전쟁의 결과를 분석한다. 그는 일본은 일찌감치 도쿠가와 막부시대에 이미 산업혁명을 시작한다. 특히 주철등 분야에서 그러하다. 일본은 구미와 전면적인 무력충돌을 피했으므로, 구미의 과학기술을 도입할 수 있어 당시의 중국보다 선진적이었다. 일본은 과학기술발전의 성과를 군사력증강에 썼고,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중국을 이길 수 있었다.

 

재단법인 국어작문교육연구소 소장이며 북경대학 및 남개대학의 객원교수인 미야가와 도시히코(宮川俊彦)는 대외관계분야에서 청일전쟁을 분석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청일전쟁은 일본이 승리한 것이 아리나, 청나라가 패배한 것이다. 만일 당시 청나라가 2,3년만 버틸 수 있었다면, 일본은 엉망으로 패배했을 것이다. 그는 지적한다. 중국은 청일전쟁을 대외관계분야의 한 가지 사건으로 처리했지, 전력을 다하여 대응하지 않았다. 일본은 그러나 거국적인 역량으로 중국에 대응했고, 이것을 문명과 야만의 전쟁으로 보았다. 미야가와 도시히코는 특별히 이렇게 지적한다. 자칭 문명국가라는 국가가 다른 국가에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기실 야만국가라는 것이다.

 

오에 요헤이법률사무소의 대표인 오에 요헤이(大江洋平)은 일본인의 의식변화로 청일전쟁을 인식한다. 그는 말한다. 메이지유신까지, 일본인은 중국을 '성인군자의 나라'로 인식했다. 청일전쟁은 '문명의 전쟁'이라고 칭한다. 다만, 이번 '문명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일본인은 스스로를 문명인이라 자부하는 동시에, 중국을 경시하기 시작한다. 중국은 야만을 대표한다고 보는 것이다. 당시 일본의 지식인을 대표하는 우치무라 간조도 이렇게 중국을 보았다. 다만 현재, 일본인의 '중국관'은 바뀌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중국의 경제가 신속히 발전하면서, 일본인들은 중국을 아주 중시하기 시작한다. 아픙로 중일양국의 교류에 발맞추어, 일본인은 갈수록 중국을 존중하게 될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당대 일본인들이 청일전쟁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이다. 필자는 일부 일본의 일반백성들을 인터뷰해 보았다. 그들중 어떤 사람은 '겸손하게' 말했다. "나의 역사지식은 부족하다. 잘 모르겠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120여년전의 일이다. 누가 아직도 기억하겠는가?" 도쿄의 도고신사안에 전시한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의 사적에서, 청일전쟁은 아예 언급되고 있지 않다. 한 일본매체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다. 그래서 일본은 너무 많이 언급하려 하지 않는다. 중국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지난 일은 연기와 같다. 지금, 중국은 굴기하고 있다. 일본은 더 이상 '소일본'이 아니다. 꿈에서 누가 먼저 깨어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