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계흥(劉繼興)
옹동화는 청나라말기의 역사에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청나라 함풍6년(1856년)에 장원급제하여 한림원수찬이 된다. 그후에 동치제, 광서제 두 황제의 스승이 되었다. 형부,공부,호부상서, 협판대학사, 군기대신, 총리각국사무대신등의 직위를 지낸다.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인삼장원'이라고 칭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일까?
당시에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원래, 옹동화가 전시에서 1등을 하여 장원이 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진정한 학식 이외에 그가 몸에 휴대하고 갔던 두 뿌리의 인삼의 공로도 적지 않다고 한다.
여기에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사람은 손육문(孫毓汶)이다. 자는 내산(萊山)이고, 산동 제녕 사람이다. 그는 옹동화와 함께 함풍6년의 과거에서 진사가 되었는데, 더욱 특수한 점은 옹동화가 1등인 장원을 했고, 그는 바로 그 다음인 방안(榜眼)이 된 것이다.
손육문의 집안은 대단하다. 그의 조부인 손옥정(孫玉庭)은 대학사를 지냈고, 부친 손서진(孫瑞珍)은 상서를 지냈으며, 형인 손육계(孫毓桂)는 도광20년(1840년)의 장원이다.
옹동화의 집안내력은 손육문과 비교하면 더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았다. 옹동화의 부친인 옹심존(翁心存)은 관직이 체인각대학사에 이른다. 나중에 동치제의 스승이 된다. 옹동화의 큰형인 옹동서(翁同書)는 청나라 도광20년(1840년) 진사가 되어 한림원 편수가 되며, 일찌기 안휘순무를 지낸다; 옹동화의 둘째형인 옹동작(翁同爵)은 일찌기 섬서순무, 호북순무를 지낸다. 당시 옹씨집안은 "일문사진사(一門四進士), 일문삼순무(一門三巡撫)"; 부자대학사(父子大學士), 부자상서(父子尙書), 부자제사(父子帝師)로 유명했다.
옹동서와 손육문은 모두 재주가 아주 뛰어났으며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함풍6년의 전시에서 장원을 경쟁할 사람은 기실 옹동화와 손육문 두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장원을 차지할 뜻을 굳혔다. 손씨집안은 손육문이 두각을 드러내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형과 함께 '형제장원'을 만들어 명성을 후세에 남기고 싶어했다. 다만 옹동화가 장원을 빼앗아갈 것이 우려되어 한 가지 아이디어를 낸다.
당시, 전시를 보기 위하여 조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 사람은 전시 전날, 궁문의 부근에 투숙했다. 옹,손 두 집안은 모두 고관대작집안이고, 대대로 교분이 있었다. 손씨의 저택은 황성 부근에 있었으나, 옹씨의 저택은 황성에서 멀리 있었다.
전시 전날, 손씨집안에서는 특별히 옹동화를 자신의 집에서 자도록 한다. 저녁식사후, 손육문의 부친 손서진은 아들 손육문에게 일찍 자도록 당부한다. 다음 날 맑은 정신으로 전시에 참가하게 하기 위하여이다. 그리고 자신은 웃사람의 신분으로 옹동화를 접대하며 계속 술을 권했다. 주석이 끝난 후 손서진은 다시 옹동화를 그의 서재로 불러, 전시의 규칙을 자세하게 귀찮을 정도로 일러주었다. 깊은 밤이 되어서야 옹동화가 방으로 돌아가서 쉴 수 있게 한다. 이때, 손육문은 일찌감치 잠이 들어 꿈나라에 들어 있었다.
옹정화가 침대에 들어가자마자, 손서진은 다시 암중으로 사람을 보내어 옹동화가 거처하는 방의 사방에서 폭죽을 떠트린다. 새벽까지 계속 그러했다. 옹동화는 밤에 한 잠도 자지 못한다. 다음 날 과거시험장에 들어가는데, 옹동화는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잠을 자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마음 속으로 이번 전시에서 장원을 차지하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몸에 인삼 두 뿌리를 가져온 것을 기억해내고, 즉시 입에 넣고 씹었다. 옹동화는 졸지에 정신이 맑아졌다. 그는 붓을 들어 일필휘지로 써내려갔고, 잘못된 부분은 전혀 없었다. 다행히 두 뿌리의 인삼 덕분에 정신을 차려서, 장원을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옹동화를 '인삼장원'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인삼은 자고이래로 사람들에게 건강의 진품으로 여겨진다. 인삼은 여러가지 기능이 있는데, 원기를 보충해주고, 보신조양(補腎助陽), 생진지갈(生津止渴), 보비익폐(補脾益肺), 익심복맥(益心復脈), 익지건뇌(益智健腦)등의 기능이 있다. <신농본초경>의 기록에 따르면, 인삼은 "주보오장(主補五臟), 안정신(安精神), 정백혼(定魄魂), 제사기(除邪氣), 명목개심익지(明目開心益智), 구복경신연년(久服輕身延年)"한다고 적어놓았다. 그래서 예로부터 인삼을 주요 성분으로 하는 약제가 치료에서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는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어, 독삼탕(獨蔘蕩), 삼부탕(蔘附蕩), 생맥산(生脈散)등등이 있다.
옹동화와 손육문은 나중에 모두 고관이 된다. 그러나 최후는 모두 좋지 않았다.
옹동화는 함풍8년(1858년)에 섬감학정이 된다. 동치4년(1866년), 그는 홍덕전행주(동치제가 독서하는 곳)이 되어 어린 황제의 스승이 된다. 동치13년에는 이미 매각학사 겸 시랑이 된다. 광서 초년, 그는 도찰원 좌도어사로 승진하고, 형부상서, 군기대신이 된다. 광서제의 서재에서 '총사부'가 되어 신하로서 최고의 지위에 오른 황제스승이 된다.
손육문은 편수가 된 후 함풍8년 부친상으로 고향에 돌아가서 3년상을 지낸다. 고향에서 단련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승거린친(僧格林沁)의 미움을 사 신강으로 유배를 간다. 광서원년(187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북경으로 돌아와서 내각학사, 공부좌시랑이 된다.
광서10년, 중국-프랑스전쟁이 발발한다. 당시 조정의 청류당 사람들은 공친왕이 국정을 주재하면서 하나도 좋은 정책을 쓰지 않았다고 비난한다. 서태후도 공친왕에게 불만이 있어, 이 기회에 공친왕의 모든 직위를 박탈한다. 그리고 공친왕과 같이 일했던 이홍조, 옹동화도 삭탈관직시킨다.
사람이 가면 다시 사람이 온다. 공친왕이 떠나니 순친왕이 왔다. 손육문은 순친왕의 심복이다. 그래서 그가 득세를 한다. 군기처에 들어가 총리각국사무대신이 된다.
손육문이 군기처에 들어간 후, 10년간 국정을 좌지우지하여 조야에 권력을 뒤흔든다. 순친왕은 광서16년(1890년)에 죽는다. 그후에도 그는 여전히 서태후의 신임을 받는다. 갑오년(광서20년, 1894년)에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조정의 내외에서는 그에 대한 불만이 최고조에 달한다. 문정식과 같은 사람은 손육문의 집으로 찾아가서 문생첩을 반납한다. 그 의미는 더 이상 손육문을 자신의 스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손육문은 관료사회에서 평가가 아주 나빴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손육문은 서태후의 '가장 신임하는 사람으로, 이연영과는 결의형제를 맺고, 황제(광서제)와 관련된 소식을 정탐하여 서태후에게 보고한다. 그는 황상을 허수아비로 여겼다."
또 하나의 사례도 손육문이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지를 말해준다. 귀주번사 왕덕방이 북경에 왔을 때, 손육문을 찾아간다. 손육문은 그에게 문턱을 넘는 비용으로 백금천냥을 요구한다. 왕번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내가 관직에 있는 것은 너희 손씨집안의 관직이 아니다. 네가 뭐 대단하다고 뇌물을 달라고 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는 떠난다. 나중에 마침 순무 자리가 비게 되었는데, 손육문은 황제에게 왕덕방은 글을 몰라서 한 지방의 최고관리가 되기에 부적절하다고 말하여 결국 왕덕방이 그 일을 맡지 못하게 된다. 나중에 왕덕방은 그 일을 알고는 화가나서 죽는다.
1894년 십월, 전선에서 패전보가 계속 들려온다. 서태후는 부득이하게 나이 육순을 넘긴 공친왕을 다시 부른다. 그리고 그에게 외교업무를 맡고, 군사업무를 처리하도록 한다. 반달 후, 손육문은 광서제에게 모든 직위를 박탈당한다.
얼마후, 공친왕이 병사한다. 옹동화는 광서제의 지지하에 조정신하의 영수가 된다. 청일전쟁의 침패는 직접적으로 무술변법을 불러온다. 중국근대사회정치에 있어서 이는 공전의 변혁이었다. 옹동화는 역사발전의 조류에 순응하여, 광서제에게 강유위등 진보인사를 추천한다. 그리하여 강유위 등에 의하여 '중국유신의 제일도사(第一導師)'로 불리웠다. 그는 변법유신을 강력히 주장했고, 제자인 광서제를 위하여 무술변법의 강령성문건인 <정국시조(定國是詔}를 초안하여 백일유신의 서막을 열었다. 서태후를 우두머리로 하는 완고파의 이익을 건드렸기 때문에 옹동화는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간다. '무술변법'이 실패한 후, 서태후는 그에 대한 여한이 남아서인지 옹동화를 삭탈관직하고 영부서용(永不敍用)하도록 명령했고 지방관리로 하여금 엄격히 단속하다록 시켰다.
옹동화와 손육문은 나중에 모두 우울하게 죽었다. 이 두 원수가 지하에서 서로 만났다면 분명히 서로 마주보며 아무 말고 하지 못하고, 난감해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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