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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한 근본적인 이유는?

by 중은우시 2014. 8. 26.

글: 뇌이(雷頤)

 

금년은 청일전쟁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전쟁에서 중국은 일본에 참패한다. 그 후에 영토를 할양하고 배상금을 지급하는 상권욕국(喪權辱國)의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한다. 제1차 아편전쟁이후의 반세기동안 중국은 서방열강에 연이어 패배했지만, 수천년동안 중국을 스승으로 삼고 중국이 경시해온 '체이도국(蕞爾島國) 일본에 패배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니 크게 놀라고 사람들은 분노했으며 통심질수(痛心疾首)했다. 전쟁, 특히 대규모 전쟁은 양국의 군사역량을 겨루는 것이면서 더더욱 양국의 경제, 정치, 사회제도를 겨루는 것이고, 심지어 문화를 겨루는 것이기도 하다. "천조상국(天朝上國)"이 "도이(島夷)"에게 패배한 것은 우연만이 아니다. 간략하게 이 당시의 중일양국의 국가제도를 비교해보자, 일본은 기본적으로 '현대국가'이고, 중국은 전체적으로 여전히 '전현대국가(前現代國家)'였다.

 

정치제도측면에서, 메이지천황을 우두머리로 하는 신정부는 1868년 4월 6일 정치강령적인 <오조서문(五條誓文)을 반포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첫째, 널리 회의를 열어, 공론에 따라 의사결정한다. 둘째, 상하가 한 마음이 되어, 경륜을 성행시킨다. 셋째, 관무일도이지서민(官武一途以至庶民), 각수기지(各遂其志), 인심불권(人心不倦), 넷째, 옛날의 누습을 타파하고, 천지의 공도에 기반을 둔다. 다섯째, 세계에 지식을 구하고, 황기(皇基)를 크게 떨친다. 이십여년후, 1890년 11월 29일, 일본의 제1기 중의원, 귀족원이 열려 정식으로 의회가 설치된다. 강유위는 <일본변정고>의 발문에서 "그 조리는 아주 많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다: 군신이 국시를 정하고, 제도국을 두어 헌법을 논의하고, 초모(草茅)를 발탁하여 고문으로 삼고, 귀족들은 몸을 낮추어 백성들의 사정을 보살피고, 유학생을 많이 보내어 신학을 배우게 하고, 옷을 바꾸게 하여 마음을 바꾸게 하였다." 청일전쟁때, 중국의 정치제도는 여전히 전통적인 황권전제였다. 현대국가의 정치체제가 아니었다.

 

경제제도측면에서, 일본의 메이지유신의 중요내용은 상법공의소를 열고, 상법학교와 '제국권업박람회'를 두어, 공상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일본 현대경제발전의 중요한 한 방면은 자원과 중국의 양무운동과 유사하게 '관영'기업을 개인에게 매각하고, 정부는 개인기업에 자금지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1874년, 정부는 주식거래소조례를 반포하여 공채의 양도와 주식의 거래를 윤허한다. 도쿄와 오사카주식거래소는 1878년에 개설된다. 1869년 철도건설방침이 확정되었고, 1870년 철도사무국이 설립된다. 도쿄-요코하마철로가 1872년에 먼저 개통된다. 전신업도 1869년에 시작된다. 먼저 도쿄-요코하마간에 전보업무가 시작되고 이후 신속히 발전한다. 처음에는 정부전용이었고, 1878년이후에는 민간의 사용을 허용한다. 1872년 프랑스에서 기기를 구매하여 기계제사공장을 건설하고 프랑스전문가의 지도를 받는다. 1880년 11월, <관영공장염가처리개칙>을 만든다. 1884년, 정부는 다시 아주 낮은 가격과 무이자 장기분할상환의 방법으로 매각하도록 규정한다. 그리하여 관영기업의 처분이 순조롭게 실시된다. 이렇게 하여 일본현대경제의 발전이 대거 촉진된다. 중국의 양무운동은 완고한 보수파의 반대에 부딛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민간이 현대기업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현대기업은 정부에서 운영하거나 관독상판(官督商辦)이었다.

 

금융체제측면에서, 메이지유신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신화폐조례'를 반포하여, 화폐제도를 통일한다. 1870년이후, 구미의 현대은행제도를 도입한다. 1878년, 100여개의 은행이 존재하고, 1879년에 국립은행이 153개인데, 정부는 국립은행의 발전을 중지하기로 결정하고, 1884년에는 사립은행과 유사금융기구가 955개에 달한다. 1881년 구미선진국가의 중앙은행체제를 도입한다. 공채를 발행하여 자금조달능력을 끌어올린다. 그러나, 중국은 현대화된 금융체제를 건립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청나라조정은 현대적인 자금조달수단과 능력이 전혀 없었다. 중국의 최초현대은행인 '중국통상은행'은 청일전쟁에 참패한 후인 1897년 5월 27일에 비로소 설립된다.

 

군사체제측면에서, 청일전쟁때, 일본은 일찌감치 10여년전에 서방의 군사제도를 시찰한다(먼저 프랑스를 배우고, 얼마후 프로이센으로 바꾼다). 이 기초위에서 전면적인 군사개혁을 실시한다. 무기의 표준화와 편제의 현대화를 이룬다. 육군은 사단을 기본전략단위로 하고 현대군수조달체제를 확립한다. 그러나, 이 때의 중국군대는 전통적인 팔기, 녹영과 용영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태평천국때, 팔기병과 녹영병은 이미 낡아빠졌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래서 청일전쟁때 실질적인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다. 청군의 청일전쟁시의 주력은 용영이었다. 이는 상군의 용영에서 실행한 중수가 스스로 모집한 모병제도였다. 무기장비와 편제는 여전히 '전통'에서 '현대'로의 과도기였다.

 

교육측면에서, 일본은 중국의 유신개혁자들에게 모범사례를 제공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후, 1871년 문부성을 만든다. 그리고 서방학자를 초청하여 교육개혁에 참여하게 한다. 1872년 <학제>등 교육제도와 관련된 규정을 반포하고 현대적인 도쿄대학을 만든다. 그리고 전력을 기울여 소학교를 만들고 교육평등, 강제교육을 강조하며 초보적으로 현대교육체계를 건립한다. 1885년, 문부성은 대학,중학,소학령과 사범학교령을 반포한다. 이렇게 하여 완전한 국가교육제도를 건립한다. 중국의 신교육은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고, 방해가 많아서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으며 정통지위를 확보하지도 못한다.

 

청일전쟁때, 중국은 여전히 '비현대국가'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현대국가'구조를 기본적으로 완성했다. 이것이 바로 중국이 참패한 근본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