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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공통)

송(宋)과 청(淸): 서로 다른 금융발전경로

by 중은우시 2014. 10. 2.

글: 오구(吳鉤)

 

 

 

 

합회(合會)는 민간이 자금을 모아서 성립한 상호부조조직이다. 강소,절강,복건 일대에 이런 류의 합회는 지금도 완강하게 생존하고 있다. 노방(爐房)은 원래 그저 은원보(銀元寶)를 주조하는 작방(作坊)이었는데, 점점 예금, 대출을 겸영하는 금융기관으로 변화한다. 당포(當鋪)는 가장 오래된 저당대출기구이다. 인국(印局)은 무담보대출을 제공해주고, 대출대상은 주로 도시의 소상인들이다. 전장(錢莊)은 명나라 가정연간에 탄생했고, 최초의 업무는 은전환전이었는데, 청나라때에는 이미 예금을 받고, 대출을 해주고 이자를 받으며, 결산대리업무까지 했다. 장국(賬局)은 주업무가 대상인, 당포, 인국, 전장 및 관리등 대형고객에게 대출해주는 것이다.

 

표호(票號)가 가장 늦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형태도 근대은행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경영범위는 예금, 대출, 환전, 결산대행, 채무청산, 은량표발행 등등이 있다. 청나라때 산서(山西) 표호의 분호는 이미 각 대도시와 항구도시 심지어 일본, 조선, 러시아, 인도, 싱가포르, 영국등의 대도시에도 설치되었다. 전국 51개 표호중에서, 22개의 총호가 평요(平遙)에 설치되어 있었다. 보잘 것없어 보이는 평요성은 대청국의 '금융중심'이었다.

 

이들 청나라때의 금융기구에는 하나의 공통된 특색이 있다. 기본적으로 모두 민영이라는 점이다. 모두 민간사회가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청나라정부는 금융업에 대하여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소극적 태도를 보인다. 이 점에 있어서 송나라때의 금융업과는 전혀 다르다.

 

명청과 비교하면, 송의 금융업은 아주 선명한 특색이 있다. 정부가 금융시장개척의 선봉이 되었다는 점이다. 중국최초의 '은행'인 저당소(抵當所)이건, 중국최초의 '신탁기구'인 검교고(檢校庫)이건, 모두 송정부가 앞장서서 만들어낸 것이다. 정부는 세계최초의 지폐 및 자유롭게 유통,교환될 수 있는 유가증권을 발행하기도 했다. 민간 교인포(交引鋪)의 증권시장에 대한 통제를 헷지하기 위하여, 송정부는 권력으로 교인거래를 금지시킨 것이 아니라, 명청정부와 같이 관영의 "매초장(買鈔場)"을 설립하여 시장을 조절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송정부는 다른 어느 왕조보다도 '국가자본주의'의 특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송정부는 다른 어느 왕조보다도 시장을 옹호할 줄 알았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송나라의 관영금융업이 발달한 것은 실제로 민간금융의 발전을 억압한 것이라고. 다만 우리가 각도를 바꾸어 보면, 중국금융사의 발전은 확실히 증명한다. 명청시기에 정부가 금융시장에 대하여 지나치게 아무 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당소, 검교소, 교인포는 그저 송나라때 잠깐 나타났다 사라졌을 뿐이라는 것을. 근대적인 의미의 은행, 금융신탁과 증권거래소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을.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가 나타난다. 사회가 중세에서 근세로 바뀌는 역사의 전환점(현대사회가 아니라)은 적극적으로 시장을 탐색한 정부인가, 아니면 상업과 시장을 본체만체하는 정부인가라는 점이다. 어느 것이 사회의 전환을 촉진하는데 더욱 유리할까? 필자는 그저 문제를 던질 뿐이다. 여러분들이 스스로 생각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