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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공통)

중국역사상 초일류 십대무장(十大武將)

by 중은우시 2015. 3. 26.

글: 단전룡(段錢龍)


1. 병가식신(兵家識神) 손무(孫武)


후인들이 그를 손자(孫子), 손무자(孫武子), 병성(兵聖), 백세병가지사(百世兵家之師), 동방병학비조(東方兵學鼻祖)로 추앙한다. 그는 기원전535년경에 출생했고, 일찌기 <병법> 13편을 오왕합려에게 보여주어, 장군의 직을 받는다. 군사를 이끌고 전투에 나서서 전투마다 승리를 거둔다. 오자서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여 오전오승을 거두며 6만의 병력으로 초나라 20만대군을 물리치며, 초나라의 수도 영도를 점령한다. 북으로 제(弟), 진(晋)에 위엄을 떨치고, 남으로는 월(越)인을 복종시킨다. 백전백승은 선지선이 아니고, 싸우지 않고도 적군을 굴복시키는 것이 선지선이다. 그는 중국역사상 영향력이 가장 큰 무장이고, 의문의 여지없이 1위에 해당한다.


2.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項羽)(기원전232년-기원전202년)


이름은 적(籍), 자는 우(羽), 통상 항우라 부른다. 중국고대의 걸출한 군사가이자 저명한 정치인물이다. 중국군사사상 '용전파(勇戰派)'의 대표인물이다. 진나말기 의거군의 영수이다. 한족이며 하상(下相, 지금의 강소성 숙천) 사람이다. 진나라말 항량을 따라 회계의거에 참가하고, 기원전207년 결정적인 전투인 거록지전에서 진나라군대의 주력을 격파한다. 진나라가 망한 후 스스로 서초패왕에 올라, 황하 및 장강하류의 양(梁), 초(楚) 9군을 통치한다. 나중에 초한지쟁에서 한왕 유방에게 패배하여 오강(지금의 안휘성 화현)에서 자결한다. 항우의 무용은 고금무쌍(고인들은 '우지신용(羽之神勇), 천고무이(千古無二)'라는 평가를 했다)이고, 그는 중화수천년역사상 가장 용맹한 무장이다. '패왕(覇王)'이라는 단어는 항우를 가리키는 전용지칭으로 쓰인다. 항우는 전적이 휘황하고, 지용을 겸비했으며 평생 80여번의 전투에서 백전백승한다. 항우를 만난 무장은 모두 일합지장(一合之將)이다. 기본적으로 모두 일회합에 말에서 떨어졌다. 


3. 난세인도(亂世人屠) 백기(白起)(? - 기원전257년)


성(姓)은 미(芈)이고, 씨(氏)는 백(白)이다. 이름은 기(起)이다. 초나라 백공승(白公勝)의 후손이다. 춘추시대 초나라군주는 왕이라 칭하고, 대부, 현령은 공이라 칭했다. 백기는 백공승의 후손이므로 공손기(公孫起)라고도 부른다. 백기의 별명은 '인도(人屠, 인간백정)'이다. 전국사대장수의 하나이다(나머지 세 명은 왕전, 염파, 이목이다). 전국시대 진나라의 명장으로 미(郿,지금의 섬서성 미현 상흥진 백가촌) 사람이다. 중국역사상 손무, 오기 이후 또 한명의 걸출한 군사가, 장수였다. 표준적인 전신(戰神)으로 각종 사료상 패전은 나타나지 않는다. 일생동안 점령한 성이 백개에 이르며, 참살한 사람이 백십만명에 이른다. 거의 전국시대 사상자수의 절반에 해당한다. 인류사를 보더라도 그에 비견할 사람이 없다. 백기는 적을 만나면 임기응변에 능하고, 기이한 전술을 많이 썼으며 명성이 천하에 떨쳤다.


4. 봉랑대장(封狼大將) 곽거병(霍去病)(기원전140-기원전117)


한족, 하동군 평양현(지금의 산서성 임분 서남쪽) 사람이다. 중국 서한 한무제시기의 걸출한 군사가이며 명장 위청(衛靑)의 외조카이다. 대사마표기장군을 지낸다.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했고, 장거리기습에 능했다. 곽거병은 여러번 군대를 이끌고 흉노와 싸운다. 그의 지휘하에, 흉노는 한군에 계속 패퇴하여, 곽거병은 "봉랑거서(封狼居胥, 낭거서는 몽골의 컨티산. 곽거병이 흉노를 물리친 후 하늘에 제사를 지냄)"의 아름다운 이야기을 남긴다. 그는 일생동안 4번 병력을 이끌고 정식으로 흉노와 싸우며, 모두 대승을 거둔다. 적 11만을 섬멸하고 적 4만의 항복을 받아내며, 영토를 확장한다. 전공은 그의 외삼촌 위청보다도 뛰어나다. 전체 세계군사역사와 중국사에 있어서 곽거병은 전설적인 인물이다. 곽거병의 묘는 지금까지도 무릉(茂陵)의 옆에 우뚝 서 있다. 묘 앞에는 "마답흉노(馬踏匈奴, 흉노를 말로 짓밟다)"의 석상이 서 있다. 이는 그가 국가에 세운 불후의 업적을 상징한다. 천년이 지난 후에도 세계사람들은 여전히 이 소년대장 곽거병의 절세의 풍채를 볼 수 있고, 그의 정신과 지용에 감탄한다. 


5. 탁탑천왕(托塔天王) 이정(李靖) (571년-649년 7월 2일)


자는 약사(藥師), 한족, 옹주 삼원(지금의 섬서성 삼원현 동북) 사람이다. 수말당초의 장수이다. 당나라의 문무를 겸비한 저명한 군사가이다. 나중에 위국공(衛國公)에 봉해져서 사람들은 이위공(李衛公)이라고 부른다. 이정의 전공은 탁월하다. 상원원년(760년), 당숙종은 이정을 역사상 10대명장중 한 명으로 꼽는다. 그리고 무성왕(武性王, 강태공)의 묘에 배향한다. 그는 문무를 겸비했고, 출장입상(出將入相)했다. 당나라를 통일하고 공고히 하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당태종은 그를 높이 평가한다. 첫째는 형주,상주에서 싸우고 영남 여러 주를 병무(幷撫)하며, 둘째는 강남에서 싸우고, 셋째는 돌궐을 멸하며, 넷째는 토곡혼을 깨부신다. 그는 이 모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니, 불세기공이라 할 만하다. 그는 인생을 원만하게 살았다는 점에서 악비보다 약간 낫다.


6. 만세충장(萬世忠將) 악비(岳飛)(1103년-1142년)


자는 붕거(鵬擧), 한족. 북송 상주 탕음현 영화향 효제리(지금의 하남성 안양시 탕음편 채원진 정강촌) 사람. 중국역사상 저명한 전략가, 군사가, 민족영웅, 항금명장. 악비는 군사방면의 재능은 송, 요, 금, 서하시기에 가장 걸출한 군사총사령관으로 인정받는다. 연결하삭(連結河朔)의 계책을 내놓은 사람이다. 동시에 양송이래 가장 젊은 나이에 건절봉후(建節封侯)된 인물이다. 남송중흥4장(악비,한세충,장준,유광세)중 으뜸이다. 악비에 대하여 우리가 말을 많이 할 필요는 없다. 그가 쓴 만강홍(滿江紅)이 유명하다.


7. 국사무쌍(國士無雙) 한신(韓信)(약기원전231년-기원전196년)


회음(지금의 강소 회안) 사람. 서한의 개국공신. 중국역사상 걸출한 역사가. 한초삼걸(漢初三傑)의 한 명. 일찌기 제왕(齊王), 초왕(楚王)이 되었고, 나중에 회음후(淮陰侯)로 강등된다. 한왕조의 건립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그러나 나중에 유방의 의심을 사서, 결국 모반의 죄명으로 죽음을 당한다. 한신은 중국군사사상 "모전파(謀戰派)"의 대표인물이다. 후세인들에게 '병선(兵仙)', '전신(戰神)'은 한신에게만 쓰인다. 국토무쌍, '공고무이 약불세출(功高無二, 略不世出)'은 초한시대 사람의 그에 대한 평가이다. 소동파는 이렇게 말한다: "포왕패지대략(抱王覇之大略), 축영웅지장도(蓄英雄之壯圖), 지탄육합(志呑六合), 기개만부(氣蓋萬夫)"


8. 전신영공(戰神令公) 곽자의(郭子儀)(697년-781년)

 

중당(中唐)의 명장. 한족. 화주 정현(지금의 섬서성 화현) 사람. 조적은 산서 분양(汾陽). 무과과거에 급제하여 군대에 들어가고, 승진을 거쳐 구원태수, 삭발절도사우병마사에 이른다. 천보14년(755년), 안사의 난이 발발한 후, 삭방절도사가 되어 낙양 장안 두 도성을 수복한다. 안사의 난 평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다. 그리하여 중서령으로 승진하고, 분양군왕이 된다. 당대종때, 다시 복고회은의 반란을 평정하고, 회흘추장을 설득하여 함께 토번을 격파한다. 이렇게 하여 조정은 평안을 되찾는다. 곽자의는 일생동안 많은 공을 세웠다. 대당은 그로 인하여 20여년간 안정을 유지한다. 역사에서 '권경천하이조불기, 공개일대이주불의'라고 그를 평가한다. 거국적으로 숭고한 위망과 명성을 얻는다. 85세에 천수를 누리고 죽었으며, 충무(忠武)를 시호로 받고 당대종의 묘에 배향된다.


9. 무도천왕(武悼天王) 염민(冉閔)(322년-352년)


어떤 문헌에는 "염민(染閔)"이라고 적는다. 자는 영증(永曾)이고, 소자(小字)는 극노(棘奴), 위군 내황(지금의 하남 내황 서북) 사람이다. 한족. 오호십육국시기에 염위정권의 건립자이고, 350년-352년까지 재위한다. 용맹하기로 이름을 날렸고, 350년에 황제를 칭하고, 염위 정권을 건립한다.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오랑캐를 도살하라는 명령 즉 살호령(殺胡令)을 내렸다. 이로 인하여 그는 논쟁이 있는 인물이 된다. 첫 전투에서 한족기병 3천으로 밤에 흉노의 병영을 급습하여 적장 수명을 죽이고, 백리를 쫓아내며 흉노수급 3만을 벤다. 두번째 전투에서 5천의 한족기병으로 호족기병 7만을 대파한다; 세번째 전투에서 한군7만에 4만의 걸활의군(乞活義軍)을 이끌고 여러 호족연합군 30여만을 물리친다. 네번째 전투에서 먼저 패배한 후 1만명으로 호족 수급 4만을 벤다; 다섯째 전투에서 한군 6만으로 강족,저족 연합군 10여만을 거의 전멸시킨다. 여섯째 전투에서 보졸 만명이 되지 않는 인원으로 모용선비족 철기 십사만과 싸워서 십전십승을 거둔다.


10. 항왜명장(抗倭名將) 척계광(戚繼光)(1528년 11월 12일 - 1588년 1월 5일)


자는 원경(元敬), 호는 남당(南塘), 만호(晩號)는 맹제(孟諸), 한족. 산동 등주 사람. 명나라때의 저명한 항왜장수, 군사가, 유대유(劉大猶)와 나란히 이름을 떨침. 부친 척경통(戚景通)은 조운관원(지금의 산동성 미산현 노교진)을 지냈고, 척계광도 이 곳에서 태어난다. 군대를 이끌고 절강, 복건, 광동의 연해지역에서 침범해오는 왜구를 물리친다. 십여년동안 크고 작은 80여번의 전투를 벌여 마침내 왜구의 환을 제거한다. 그는 현대중국에서 민족영웅으로 추앙받고, 시호는 무의(武毅)를 받는다. 세상사람들은 그가 이끌던 군대를 '척가군'이라 부른다. 여러 군사저작과 시가 후세에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