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중원(程中原), 유창(劉倉), 하행진(夏杏珍)
정치국의 다수와 '사인방'과의 투쟁이 이미 죽기살기의 관건적인 순간에 도달했다. 중국역사는 운명을 결정하는 십자로에 들어선 것이다.
섭검영(葉劍英)은 10월 4일 <광명일보> 1면에 발표된 양효(梁效)의 글을 본다. 이는 그들이 최고권력을 찬탈하려는 신호로 여긴다. 그리하여 더 이상 일을 늦추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결단을 내린다. 그날 저녁, 그는 동교민항 15호의 화국봉(華國鋒)의 집으로 찾아가서 긴급하게 협의한다.
섭검영은 이렇게 말한다: "현재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더이상 늦출 수 없는 때가 되었다. 그들이 곧 손을 쓰려고 하니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 그는 원래 국경절 이후에 10일을 준비하고 상황을 봐서 손을 쓰기로 하였던 것을 앞당겨 행동에 들어가기로 결정한다. "선발제인(先發制人), 이쾌타만(以快打慢)" 6일 혹은 7일 "일파일립제사해(一破一立除四害)"를 결정한다. 화국봉은 "늦어도 모래 손을 쓴다"고 결정하고, 섭검영에게 왕동흥과 행동계획을 추진하라고 한다.
섭검영은 왕동흥의 집으로 가서 모든 것을 상세히 협의한다. 왕동흥에게 행동방안을 주도면밀하고, 완벽하고 실행가능하게 만들어 확실하게 결전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하라고 요구한다.
왕동흥은 긴급하게 행동에 들어가고, 각종 '임전'조치를 취한다.
왕동흥은 장요사(張耀祠, 중앙판공청 부주임), 무건화(武建華, 중앙경위국 부국장, 8341부대 정위)와 상의하여, 중앙경위국 기관국, 처, 과급간부와 중앙경위부대(8341부대) 사, 단, 영급간부중에서 정치자질, 군사기술, 신체가 모두 좋고, 상황을 잘 아는 인원을 뽑아서 이 특수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집행임무를 맡은 인원은 5개의 행동소조로 나누어서 업무를 분담했다:
제1행동소조는 왕홍문(王洪文)을 맡았는데, 조장은 이광은(李廣銀)이고, 대원은 오흥록(吳興祿), 곽제룡(霍際龍), 왕지민(王志民)이다; 제2행동소조는 장춘교(張春橋)를 맡았는데, 조장은 기화부(紀和富)이고, 대원은 장정귀(蔣廷貴), 서금승(徐金昇), 임자초(任子超)이다; 제3행동소조는 강청(江靑)을 맡았는데, 조장은 고운강(高雲江)이고, 대원은 황개원(黃介元), 마반추(馬盼秋), 마효선(馬曉先, 여)이다; 제4행동소조는 요문원(姚文元)을 맡았는데, 조장은 등화송(縢和松)이고, 대원은 강해군(康海群), 장운생(張雲生), 고풍리(高風利)이다; 제5행동소조는 모원신(毛遠新)을 맡았는데, 조장은 이연경(李連慶)이다. 현장경계인원은 정지우(丁志友), 동방(東方), 섭계신(葉桂新), 조여신(趙汝信)이다. 행동에 참가한 기타 인원은 황창태(黃昌泰, 8341부대 부참모장), 강결(康潔, 공정관리중대 관리원), 손홍기(孫洪起), 손진발(孫振發)(복무과 과장, 부과장), 조지수(曹志秀), 이태(李台)(교통과 과장, 부과장). 그리고6명의 운전기사: 사우령(史友令),유계흥(兪桂興), 상점량(尙占良), 왕명신(王明臣), 오증빈(吳增彬), 장중신(張中臣).
그들은 중남해에서 가까운 전모가만(前毛家灣)의 한 성방지하에 격리실을 만든다.
10월 3일 밤, 왕동흥은 이흠(李鑫)을 중남해의 자신의 집으로 부른다. 그리고 "사인방"에 대하여 격리심사를 실행하기로 결정했다고 알려주며 그에게 당중앙의 문건을 초안하도록 지시한다. 이흠은 당중앙에서 3건의 문건을 초안할 것을 건의한다: 첫째, "사인방"을 격리심사하는 결정; 둘째, <모택동선집> 제5권을 출판하는데 관한 결정; 셋째, 모주석기남당을 건립하는데 관한 결정. 왕동흥은 화국봉에게 보고하여 동의를 받은 후, 이흠에게 그의 집에 있는 작은 방에 머물도록 하며, 밖에서 자물쇠를 잠궈 버린다. 4일부터 6일까지, 3건의 문건작성에 집중했다.
왕홍흥은 이흠, 무건화와 함께 구체적인 행동방안을 상의한다. 이흠은 이렇게 제안한다: 현재 장춘교, 요문원은 <모택동선집>을 장악하려고 하고, <모택동선집>5권의 자료를 급히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중앙상위에서 <모택동선집>5권에 관하여 토론한다는 명목으로 중남해 회인당에서 회의를 소집하고, 그들에게 회의에 참석하라고 하면, 그들은 반드시 올 것이다. 과거 중앙에서 <모택동선집>공작회의는 모두 중남해 회인당에서 개최하였다. 그러니, 그들은 의심하지 않고, 반드시 걸려들 것이다.
이 행동방안은 화국봉, 섭검영에게 보고되었고, 비준을 받는다.
이와 동시에, 화국봉은 다시 오덕(吳德)과 수도의 안전, 안정을 확보하는 일을 추가로 협의한다. 오덕은 화국봉과 얘기를 나눈 후 즉시 오충(吳忠)을 찾아간다. 오충은 보장하며 말했다: 북경의 위수부대(衛戍部隊)는 수도안전을 보위할 능력이 있으니, 당중앙은 안심하시라고.
오덕은 진석련(陳錫聯)을 찾아간다. 진석련은 상황을 그도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한다. 진석련은 즉시 전화를 걸어 오충에게 말한다: 위수부대의 일체는 오덕의 지휘를 받으라고.
이 일촉즉발의 긴장된 순간에, 쌍방은 모두 밀접하게 상대방의 일언일행, 일거일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10월 4일, 강청은 돌연 석가장으로 가겠다고 한다. 지정열차의 기관차를 이칠차량창의 내연기기관차로 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이칠차량창의 일부 노동자들을 그녀와 함께 가도록 해달라고 한다. 왕동흥은 화국봉에게 그녀가 가도록 해도 되겠는지 물어본다. 당시 화국봉은 마침 오덕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강청이 석가장에 왜 가는 것인가? 그녀는 아마도 찔러보는 것일 것이다. 그녀를 안심시시키 위하여 가는데 동의하는데 좋겠다고. 오덕도 화국봉의 의견에 동의한다. 화국봉은 즉시 왕동흥에게 회답한다: 그녀가 가는데 동의한다. 기관차를 마련하고 노동자를 찾아서 함께 가도록 하는 문제는 오덕에게 어레인지하도록 한다.
10월 4일, 오후 5시경, 오덕은 화국봉의 집에서 막 자기의 집으로 돌아왔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화국봉이 오덕에게 즉시 그의 집으로 오라는 전화였다. 오덕은 급히 갔더니, 왕동흥이 이미 그 곳에 와 있었다. 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상의하여 결정한다:
첫째, 화국봉, 섭검영, 왕동흥이 이미 상의하여 결정한 방안에 따라, "사인방"을 체포하는 것은 왕동흥이 책임진다.
둘째, 지군(遲群), 사정의(謝靜宜), 김조민(金祖敏)등의 격리심사는 오덕과 북경위수구 오충이 책임지고 해결한다.
셋째, 중남해내에 만일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벌어지면, 오덕이 위수구의 부대를 조직하여 지원한다.
넷째, 북경위수구는 인민일보사, 신화사, 방송국, 중앙기관 및 지군, 사정의가 통제하는 청화, 북대등 단위를 내긴외송(內緊外鬆)의 방식으로 경계한다. 다시 한번 집행상황을 검사한다.
화국봉은 오덕에게 전화기 곁에 있으면서, 수시로 자신과 연락할 수 있게 하라고 요구한다.
10월 5일 당일, 화국봉은 차량을 보내어 경표(耿飇)를 동교민항 15호의 자신의 집에 불러, 얘기를 나누고 배치를 한다.
경표는 <광명일보> 10월 4일자 긴 문장에 대한 견해를 얘기한다: 그들이 이미 싸우겠다는 글을 실었다. 이 선언서식의 문장은 '사인방'이 최고권력을 찬탈하는데 손을 쓰기 시작했다는 신호탄이다.
화국봉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한다. 그리고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모택동이 친히 써서 그에게 준 쪽지를 경표에게 보여준다. 경표에게 이 몇 장의 쪽지의 내력을 얘기해준다. 이어서, 화국봉이 말한다: "나도 느꼈다. 그들 몇몇은 중앙, 정치국의 다수 동지와 적대적이다. 아무렇게나 사건을 잡아서 소란을 피우고, 따지고 든다. 주석이 사망한 후, 정치국은 저녁에 회의를 여는데, 한번 싸우면 한밤중까지 간다. 매일 저녁, 강청은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난리를 치고, 소리를 질러서 잠을 잘 수가 없다. 그녀는 저녁에 소리지르고 낮에 잠을 잔다. 그러나 나는 낮에 일을 해야 한다...
화국봉이 경표에게 묻는다: "네 생각에 그들에 무슨 행동을 보였느냐?"
경표가 말한다: "제 추측으로는 3,5일내에 그들은 행동을 할 것입니다."
화국봉이 묻는다: "근거가 있는가?"
경표가 대답한다: "그들은 상해에서 출력이 센 방송국을 만들고, 민병을 증가시켰으며, 무기,탄약을 추가로 나눠주었습니다. 그곳은 그들의 근거지입니다. 북경에서 제가 세어보니, 개략 10여개 부문들이, 심지어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같습니다만, 그들을 따릅니다.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그들은 10월 8일 장사에서 시위를 시작할 것이고, 9일에는 상해에서 시위를 할 것이라고, '인민군중'의 명목을 빌어 왕홍문(혹은 강청)을 당주석으로 하고, 장춘교를 총리로 삼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국외에 선전할 것이고, 동시에 북경에서도 경축시위를 벌일 것입니다. 북경에는 '양교(兩校)'와 몇 개의 부대가 시위에 참가할 것이며, 아직 통제하지 못한 부문들도 참가하다록 핍박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형세가 심각해집니다."
화국봉이 정중하게 경표에게 말한다: "중앙이 결정했다. 한 가지 임무를 너에게 맡길테니 완성해야 한다. 섭검영 원수가 지명한 것이다."
경표는 화국봉이 이렇게 말하자, 벌떡 일어나서, 대답했다: "확실하게 임무를 완성하겠습니다1"
화국봉은 경표를 잡아끌어 앉히고는 말한다: "구체적인 인무는 때가 되면 너에게 말해주겠다. 너는 집에서 나의 전화를 기다려라. 내가 직접 전화한 것만 유효하다. 비서가 건 것은 신경쓰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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