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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후)

1983년 엄타(嚴打)내막: 2.4만명 처형

by 중은우시 2013. 12. 21.

글: 남방도시보 

 

최근 들어 매체에서 1983년의 "엄타(嚴打, 엄중단속이라는 뜻으로 '범죄와의 전쟁'과 비슷한 활동임)"내막을 폭로했다. 이것은 "종중종쾌(從重從快, 중하게 처벌하고 빨리 처벌한다)"를 사건처리방침으로 하는 사법활동이었다. <중국공산당집정사십년>이라는 책에 기재된 내용을 보면, 최소한 861,000명이 처리되었고, 24,000명이 사형당했다. 중공중앙(10=983)31호문건에 따르면, "깡패집단분자를 일망타진하고, 깡깨두목은 견결히 죽여버린다"라고 되어 있다.

 

그것은 후세에 까지 널리 토론되고, 추측 심지어 영향을 미친 사법폭풍이었다. 그 영향은 지금까지도 미치고 있고, 여러 사건의 상세한 사항은 지금도 아직 비밀해제가 되지 않은 상태이다.

 

1983년 고위층이 일으킨 형사범죄를 엄격하게 단속하는 활동을 줄여서 "엄타"라고 부른다.

 

이 "종중종쾌"의 사건처리방침의 사법활동은 당시의 법률에 대한 근본적인 변혁이었다. 나중의 사법실무에 크나큰 영향을 남긴다.

 

1983년 엄타가 발동될 때, 당시 공안부 부장이던 류푸즈(劉復之)는 이렇게 말한다: "엄타전투의 의미는 아주 깊다. 그 지도사상, 기세, 규모와 효과등의 방면에서 말하자면, 1950년 내지 1952년의 반혁명진압운동이후, 인민민주독재를 견지하는 또 하나의 역사적 의미를 지닌 이정표이다."

 

사법폭풍, 군중운동

 

그때는 큰사건이 교차하는 1년이었다. 그해 2월, 동북이왕(東北二王) 왕종팡(王宗坊)과 왕종웨이(王宗瑋)형제가 총을 들고 망명하여 온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다. 5월, 쭤창런(卓長仁)이 민항기를 몰고 한국으로 도망간다. 이전에 북해공원사건, 상해공강로사건등도 부정적인 영향을 널리 끼쳤다.

 

더욱 깊은 배경은 "문혁"후 치안형세의 악화이다. 1980년대초 방대한 수량의 지식청년이 도시로 돌아오고, 실업청년이 대거 발생한다. 이들은 사회의 불안정요소를 가속화시켰다. 1978년, 전국치안및 형사사건 입건은 53만건인데, 1981년에는 89만건으로 급증한다.

 

1983년 7월 19일, 덩샤오핑은 당시 공안부 부장이던 류푸즈에게 이렇게 지적한다: "현재의 각종 엄중한 형사범죄를 엄격히 타격하라. 판결과 집행은 중하게 하고, 빠르게 하라. 엄타는 당의 독재역량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독재이다."

 

그해 8월 25일, 중공중앙은 <형사범죄를 엄격하게 타격하는 활동에 관한 결정>을 반포하여, 정식으로 기세가 대댄한 83엄타를 시작한다. 이 운동은 3년간 지속되었다.

 

"중국은 1980년대이후 취한 엄타형사정책은 그 존재에 잇어 역사적 필연성이 있다." 푸단대학 법학원 교수 왕밍량(汪明亮)의 분석이다. "1980년대이후, 중국은 사회전환기에 접어들고 직면한 사회문제는 거의 서방국가와 같았다; 범죄율이 높아지고, 공중의 범죄에 대한 공포감이 갈수록 강렬해졌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중국은 서방의 일부국가가 직면한 사회현실과 일정한 유사성을 지녔다."

 

왕밍량은 "엄타는 특정한 역사조건하에서 국가를 다스리는 일종의 방식이다. 엄타를 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정권형식이 아니라, 일정한 역사시기의 정치, 경제 및 문화방면의 조건이다."

 

이것은 군중운동이다. 1983년의 <형사범죄를 엄격히 타격하는 활동에 관한 결정>에서는 "전체 당원을 동원하여, 수장이 시작하고, 층층이 책임져서 널리 군중을 발동시키고, 통일적으로 행동을 조직하여 망을 하나하나씩 없애고, 전투를 하나하나씩 싸운다. 반드시 위력이 있고, 진동해야 한다."

 

인민데이타베이스자료에 의하면, 엄타를 전개한 후, 1983년 9월 20일까지, 전국각지의 정법기관이 받은 범죄분자에 대한 군중고발은 44만여건에 이른다. 이미 3만1천여명의 범죄분자가 공안기관에 자수한다.

 

"엄타가 국가의 위엄을 발전시키고 공중을 안정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이 전략이 공중의 지지를 받게 된 것은 주로 공중에 있어서, 이 엄격한 단속과 징벌의 과정은 범죄와 불안한 시기에 긴장을 풀고 단결을 유지하여 일체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기능을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표준적인 "표시적 정의'의 자태이다. 푸단대학 법학원 교수 왕밍량의 분석이다.

 

다만 엄타는 단기간내에 위하력을 조성하였지만, 근본적으로 범죄규율을 바꾸지는 못했다. <중국형사정책검토: '엄타'형사정책의 시각>이라는 책에서 나온 통계에 따르면, 1983년 엄타후, 1984년, 1985년의 범죄율은 하락한다. 다만 1986년이후에는 직선으로 상승한다.

 

"엄타는 '속효성'이 있다. 가장 짧은 기간내에 효과를 발생시킨다. 범죄추세를 낮추고, 주로 정부가 단기간내에 사법자원을 집중시켜, 일정한 정도로 범죄발생의 각종 요소를 통제한다" 왕밍량의 말이다. "다만 엄타의 작용범위는 유한하다. 엄타는 엄중한 범죄를 겨냥할 수밖에 없고, 경미한 범죄에 대하여는 엄타수단을 써서는 안된다."

 

이것은 사법폭풍이다. <형사범죄를 엄격히 타격하는 활동에 관한 결정>에서는 "3년내에 3개전투를 조직하여, 법에 따라 형사범죄분자를 대거 체포하고, 대거 판결하며, 도시인구를 대거 말소시킨다. 그리고 엄중한 죄행을 저지르고 죽이지 않으면 민원을 가라앉힐 수 없는 범죄분자는 죽여버린다."

 

엄타기간동안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형을 판결받았는지는 지금까지 공표되지 않았다. 현재 볼 수 있는 공개된 숫자는 중공당사자료출판사에서 출판한 <중국공산당집정사십년>이라는 책의 기록이다. 이 책에서는 1984년 10월 31일 <형사범죄를 엄격히 타격하는 활동의 제1차전투 결론 및 제1차전투 배치에 관한 보고>에서는 제1차전투에서 861,000명을 법원에서 판결해서 처벌했고, 그중 사형에 처한 경우는 24,000명이라고 한다. '이것은 1950년 반혁명진압운동이래 최대규모의 집중타격이었다."

 

깡패죄의 시대배경

 

83엄타때 전형적인 죄명은 "깡패죄(流氓罪)"이다. 깡패죄는 그 죄명이 복잡하고 모호하다. 법률계에서는 "호주머니죄"라고 불린다. 저명한 사건은 주궈화(朱國華)사건과 천샤오멍(陳小蒙), 후샤오양(胡曉陽)사건등이다. 이들 사건의 주범은 모두 고관자제이고, 모두 깡패죄로 사형을 받는다.

 

중공중앙(1983)31호문건은 깡패조직분자를 정의하는데, 문구가 아주 엄중했다: "새로운 역사조건하에서 탄생한 새로운 사회쓰레기, 흑사회분자이다. 그들은 살인강도, 부녀강간, 비행기선박납치, 방화폭파등 잔혹한 수단으로 무고한 군중을 해치고, 그들은 사회주의를 미워하고, 사회치안에 미치는 위해가 극히 크다."

 

문건에서는 "깡패조직분자는 일만타진해야 하고, 깡패두목에 대하여는 견결히 죽여버려야 한다."고 적었다.

 

1984년, <최고인민법원, 최고인민검찰원, 공안부의 어떻게 깡패조직을 인정하고 처리하는지에 관한 의견>(84)고검발(연)12호에서는 법률문서에서는 "깡패조직"이라는 개념을 가급적 사용하지 않고, "깡패집단"이라는 칭호를 쓰도록 한다. 이 문건은 "'일망타진'을 모조리 체포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서는 안되고, 깡패두목은 '견결히 죽인다'는 것을 일률적으로 죽인다는 것으로 이해하여서도 안된다.", "서로 다른 상황에 따라 구분하여, 매 깡패집단구성원이 마땅이 받아야할 처벌을 받게 한다."

 

세상에 나온지 14년후에 "깡패죄"는 독립한 죄명으로서는 역사가 되어 버린다.

 

1997년 3월 14일 제8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5차회의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형법수정안>을 심의통과시킨다. 깡패죄를 강제외설죄, 부녀모욕죄, 아동외설죄, 취중음란죄, 취중구타죄, 심흔자사죄(尋衅滋事罪)로 나누어 규정한다.

 

"83엄타"에 수반한 것으로 1980년대 이데올로기영역에서의 "정신오염추방운동"이 있다. 가정댄스모임은 1980년대에 정신타락의 체현으로 보고, 깡패죄를 유발하는 원인중 하나로 보았다.

 

구이양시공안국이 만든 <한 깡패범의 자백>에는 1984년 제1기 <현대법학>에 게재된다. 이 글의 작자는 원래 신문종사자이다. 그는 자백에서 이렇게 말한다: "다만 내가 이런 한 신문종사자로서 부끄러운 깡패죄범으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작자는 그가 사기적인 수단으로 과거의 한 여자동창과 성관계를 맺었다고 하였다. 나중에 댄스를 배워서, 집안에서 가정댄스모임을 열었고, "춤을 출수록 사상이 공허해지고, 정신이 퇴폐해졌다"고 하였다. 작자는 "무슨 법제, 도덕관념도 모두 사라지고, 하루종일 여자만 생각하고, 편한 것만 찾으며, 마침내 부녀를 가지고 놀고, 더럽히는데 이르렀다. '예술'의 명복으로 나체사진을 찍어, 인민의 죄인이 되었다."

 

엄타의 후속영향

 

1983년 9월 2일, 전국인대 상임위원회는 <사회치안을 엄중하게 위해하는 범죄분자를 엄벌하는데 관한 결정>등 3개의 중대한 결정을 통과시킨다. 이는 형법에 대한 근본적인 수정이다. 깡패죄등 10여종의 범죄를 "형법에 규정한 최고형이상으로 처형하고, 사형까지 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사회치안을 엄중하게 위해하는 범죄분자를 신속히 재판하는 절차에 관한 결정>에서 "살인, 강간, 강도, 폭발과 기타 공옹안전을 심각하게 위해하는 사형에 처할 범죄분자에 관하여, 주요범죄사실이 분명하고, 증거가 확실하고, 민원이 큰 경우에는 신속하고 적시에 재판하여야 한다." "주요범죄사실이 분명하고, 증거가 확실하면 사형에 처해야 한다". 위의 3개조건은 원래 재판후에 알게되는 결과이다. 그러나 이 결정은 개정전의 전제조건으로 하였다.

 

<사회치안을 엄중하게 위해하는 범죄분자를 신속히 재판하는 절차에 관한 결정>의 제2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전조에 열거한 범죄분자의 상소기한과 인민검찰원의 항소기간은 형사소송법 제11조에 규정한 10일을 3일로 수정한다."

 

이 결정은 1996년의 엄타에도 영향을 준다. 1996년 6월 18일 <법제일보>에 게재한 <흉범육천복법(凶犯六天伏法)>의 보도를 실었는데, 보도에 따르면, 길림성고급법원 및 사평시중급법원은 법에 따라 '엄타'과정에서 사건을 일으키고, 칼을 들고 민경을 살해한 범죄자를 중하게 판결하였다. 이 사건범죄인인 텐샤오웨이(田曉偉)는 5월 13일에 사건을 일으켰는데, 5월 19일에 사평에서 총살형이 집행된다. 수사, 예심, 기소, 1심, 2심, 사형재심의에서 집행에 이르기까지 7개의 절차를 거치는데 모두 6일이 소요되었다.

 

엄타로 일어난 문제에 대하여, 사법계통내부에서도 결론을 내렸다. 예를 들어 당시 텐진시의 관련부서는 이렇게 결론내린다: "업부중 시정하여야할 문제도 존재했다. 예를 들어 깡패죄에 대한 성격규정이 부정확하여 어떤 사건은 업무가 엉성했고, 개별 구, 현의 법원은 사건처리절차에 맞지 않아 잘못된 판결을 한 경우등이 있다."

 

1983년의 엄타이후, 다시 1996년, 2001년에도 전국범위에서 엄타를 진행한다. 인미일보데이타베이스를 검색해본 결과 최근의 사법활동에서도 엄타는 여러번 나타났다. 오늘날까지도 엄타는 사법실무에서 아주 중요한 용어의 하나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