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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후)

문혁시기" 홍위병(紅衛兵)"과 "조반파(造反派)"

by 중은우시 2018. 12. 1.

글: 한운약해(閑雲若海)


문혁을 언급하면 바로 '홍위병' '조반파'와 같은 괴물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 둘을 하나로 여긴다. 그러나 실제로는 완전히 대립되고 전혀 상반되는 양파이다.


1. 양파는 각각 서로 다른 이익집단에 속해 있다.


진정한 '홍위병'은 바로 '흑자노홍위병(黑字老紅衛兵)"인데, 처음 시작할 때는 북경의 몇 곳 고관자제학교의 고등학생으로 구성된다. '8.18' 제1차접견때 모주석이 접견한 것이 바로 이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래홍(自來紅)'으로 여기고, '노자영웅아호한(老子英雄兒好漢), 노자반동아혼단(老子反動兒混蛋)"(아버지가 영웅이면 자식도 대장부이고, 아버지가 반동이면 아들도 개차반이다)이라는 대련을 제창하고, 선생을 때리고, 교장을 공격하고, 지식분자를 혼내주고, 파사구(破四舊) 하고, 사류분자(四類分子)를 때려죽이며, 흑오류(黑五類)출신학생을 괴롭힌다. 전국에서 홍색공포를 일으킨 것은 주로 그들이다. 북경의 '홍팔월(紅八月)'때 바로 송임궁(宋任窮)의 딸인 송빈빈(宋彬彬, 나중에 모추적에게 견장을 달아줄 때 모주석이 '요무마(要武嘛)'라고 하여 이름을 송요무로 바꾼다)의 일당이 최초로 선생을 때려죽이는 사건을 일으킨다.


그들이 고관자제였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의 부친을 보호하려 한다. "주자파(走資派)", 그래서 '보황파(保皇派)'로 불린다. 그러나 조반파는 그들과 반대로 했다. 즉 모주석의 의도에 따라 '주자파'에 대한 반대한다.


조반파의 성립은 홍위병보다 늦다. 가장 유명한 것은 1966년 10월 6일 북경공인체육관에서 개최된 '수도삼사성립대회(首都三司成立大會)'이다. 지원동방홍(地院東方紅)을 대표로 하는 조반파가 연합하여 '삼사'을 결성한다. 그후 전국각지에서 조반파가 속속 얼굴을 드러낸다.


나중에 조반파도 자신들의 '홍위병'조직을 만들기는 하지만, 이 홍위병은 그 홍위병이 아니다.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 노홍위병들은 근본적으로 조반파의 소위 "홍위병"을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순수한 홍오류(紅五類)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잡탕군'이었기 때문이다.


더욱 철저한 분류법은 이러하다. '보황파'는 '기득(旣得)이익집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관리와 그 자녀, 각 단위원교에서 비교적 득세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노동모범, 당원, 단원이다. 결론적으로 권력과 세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조반파'는 '미득(未得)이익집단'이다. 주로 일반학생, 평민백성, 그리고 여러번 운동을 당해서 처벌받은 사람들이다.


혹은 더욱 간단히 말하자면, '관료집단'과 '평민집단'이라고 할 수도 있다. 소위 문혁은 이 양대이익집단이 싸운 것이다.


이치대로 말하자면, 모주석은 관리집단의 우두머리이다. 그러나 그는 평민을 발동하여 자신의 부하들에게 반대하게 만든다. 겉으로는 이해하기 아주 어려운데, 그는 그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다. 여기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다.


당시 '최고지시(最高指示)"와 중앙문혁에서도 "주자파와 싸우자"고 호소한다. 목적은 소위 '반수방수(反修防修)'이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하여 자신들이 영수에 충성하고, 대방향이 정확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보황파는 달랐다. 강산은 그들의 부모가 싸워서 얻은 것이고, 현재 권세가 없는 평민들, 운동때 처벌받은 적이 있는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자신들에게 반기를 들다니, 이는 분명 '우파반란'이라고 여긴다. 그들은 '홍색강산을 보위'하기 위하여 당연히 자신들의 대방향이 정확하다고 여긴다.


2. 양파는 근원을 보면 실제로 모두 관변조직이다.


보황파는 분명히 관변조직이다. "8.18'이후 각학교는 속속 학교측이 주관하여 홍위병조직을 결성한다. 기본적으로 이들이 공청단을 대체한다. 그러나 나중에 양파로 나뉘어진 후에 최초의 홍위병조직은 게속하여 각성시 1인자의 어용도구가 된다. 그들은 각지 보황파의 핵심이 된다.


조반파는 겉으로 보기에 법도 없고 하늘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근원을 보면 역시 관변조직이다. 저명한 괴대부(蒯大富)를 예로 들어보자, 강청(江靑)과 중앙문혁은 그와 청화공작조 왕광미(王光美)의 투쟁을 눈여겨 보았다. 그래서 힘껏 그를 배양한다. 바로 유소기(劉少奇)를 타도하기 위함이다. 섭원재(聶元梓)도 마찬가지이다. 강생(康生) 일당은 그녀를 이용하여 "제일장마르크스레닌주의대자보"를 발표한다. 창끝은 직접 북경시위(北京市委)를 겨냥한다. 즉 팽진(彭眞)을 타도하기 위함이다. 문혁을 진정으로 시작한다.


각 성시의 조반파도 자발적으로 조직되지 않았다. 중앙문혁이 북경홍위병을 파견해 내려보내, 각지에서 선동을 한다. 실제로 이들 홍위병은 북경에 있을 때는 보황파였다. 모두 자신의 중앙정부에 있는 부친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지방으로 내려가면 변신을 해서 조반파가 된다. 각지 학생, 노동자들 중 조반파를 부추겨서, 지방일인자를 전문적으로 공격한다.


혹은 중앙이 양파로 나누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일파는 모주석, 강청과 중앙문혁이고, 다른 일파는 대체로 유소기, 등소평 및 각지방의 일인자들이다. 보황파와 조반파는 그저 위에서 선으로 연결해서 움직이는 두 개의 꼭두각시인형일 뿐이었다.


문혁때 아주 개별적으로 진정 자발적으로 조직된 군중조직도 있다. 예를 들어 당시 북경의 <중학문혁보>에 발표한 우라극(遇羅克)의 <출신론>은 많은 관중의 호응을 얻는다. 그러나 이런 류의 민간조직과 진정한 독립언론은 존재가 허용되지 않는다. 우라극도 금방 총살당한다.


3. 양파의 행위방식과 최후는 크게 달랐다.


바로 양파가 대립했기 때문에 서로 한 일도 달랐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조반파는 '반동학술권위'를 별로 공격하러 가지 않고, 지식분자를 처벌하는 것도 거의 하지 않고, 사류분자를 처벌하는 것도 하지 않았다. 역량을 집중하여 각 성시의 일인자들을 비판하고 투쟁했다. 그래서 왕왕 상대방으로부터 '우귀사신의 보호산(牛鬼蛇神)의 보호산(保護傘)'이라는 말을 들었다.


다시 예를 들어, 문혁때 가장 좌파였던 "삼충어사무한(三忠於四無限)"은 아침에 지시를 받고 저녁에 보고하며, 충자춤을 추고, 충자노래를 부른다. 주로 '보황파'가 한 짓이다. 이런 류의 봉건의식이 아주 짙은 것은 왕왕 부대에서 나온다. 그리고 부대와 '보황파'의 관계는 비교적 밀접했다. 조반파는 이런 류의 것을 '형식주의'라고 비판한다.


"타자창(打砸搶, 치고 때리고 빼앗기)", "무투(武鬪)"같은 일은 양파가 모두 했다.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누가 더 낫고 누가 더 못하다고 할 수가 없다.


비록 처음 시작한 '노홍위병' 즉 '연동(聯動)'은 진압을 당하지만, 양파의 최후는 전혀 달랐다. 1968년 상산하향(上山下鄕)과 더불어, 조반파 학생조직은 이미 와해된다. 몇년후에는 더욱 철저히 청산된다. 문혁이 끝난 후, 북경의 소위 '오대학생영수'는 모조리 감옥에 들어간다. 각, 성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강홍이사(新疆紅二司)의 호란틈(胡亂闖),호대란(胡大亂)도 모두 감옥에 들어간다. 조반파중 관료체계에 끼어들어간 경우를 "삼종인(三種人)"이라고 불리는데 모조리 청산된다. 혹은 감옥에 간다. 그러나, '연동'의 구성원은 부친의 명에회복과 더불어 하나하나 명예회복된다. 나중에 소위 '관이대(官二代)', '홍이대(紅二代)'가 되며, 현재의 권력귀족은 대부분 그들이다.


4. 조반파는 스스로 극좌에 반대한다고 여겼다.


나 자신은 왜 조반에 참가하는가? 이익집단의 분석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점이 명백하지 않았다. 당시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은 '극좌'에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해방후, 운동이 하나에 이어 하나가 또 나타났다. 진반(鎭反), 숙반(肅反), 삼반(三反), 오반(五反), 반우(反右), 반우경(反右傾), 사청(四淸), 사교(社敎), 하나 하나 진행될 때마다 극좌로 가고, '흑오류'가 되었다. 나는 한번 또 한번의 정치운동에 대한 반감과 공포가 있었다.


그러나, 문혁은 완전히 방향을 바꾸어 버린다. 운동의 중점은 더 이상 흑오류가 아니었고, 지식분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전에 사람들을 처벌하던 사람들이다. 권세있는 사람들이다. 소위 '당내주자파'이다. 이런 변화는 당시 모두가 괴이하게 여긴다. 권력자는 자연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우리들처럼 처벌받았던 사람들은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나의 당시 생각은 아주 유치했다. 이것은 영명한 모주석이 마침내 아래 관리들이 극좌를 행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백성들을 처벌하고, 지식분자를 처벌하고, 이렇게 억울한 사건, 잘못된 사건을 양산하다보니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고 여겼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다. 많은 권세없는 백성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모두 이전의 쌓여온 화를 풀 기회라고 여긴다. 너희 '주자파'들은 이전에 무고한 백성들을 못살게 굴었다. 이젠 너희가 당할 때이다. 그래서 "혁명을 하니 북경이 가깝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고, 조반을 하니 모주석이 친근하다는 것을 더욱 깨달았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바로 문혁운동이 주자파를 몰아내자는 것이었으므로 우리들같은 평범한 백성들, 특히 이전에 처벌받은 사람들, 극좌의 박해를 받은 사람들은 당연히 조반을 옹호했다. 당연히 조반파에 참가하고자 했다.


몇년 전 보시라이가 중경에서 지휘하여, 권세있고 돈있는 사람들을 대거 처벌해서, 백성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준다. 그래서 중경백성들의 옹호를 받는다. 실제로 이것은 고대 농민군의 '흘대호(吃大戶)' '개창방량(開倉放糧)'과 다를 바 없다. 관료를 미워하고 부자를 미워하는 백성들에 있어서, '겁부제빈(劫富濟貧)'한다고 하면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등극하는 신황제, 보시라이같은 자들이 이득을 얻고, 도구가 된 평민백성들은 영원히 최하층에서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이런 원한을 원한으로 갚는 방식은 봉건왕조의 교체에 불과하고, 영원히 백성들을 철저히 해방시킬 수 없다.


5. 양파는 모두 극좌이다.


문혁이 끝난지 40년이 지났다. 현재 반성해보면, 양파는 모두 잘못을 저질렀다.


문혁때 조반파는 모주석과 중앙문혁을 따라, 유소기,등소평노선을 비판했다. 당시 우리는 진심으로 유소기,등소평이 주자파라고 여겼다. 그들이 집권하면, 천만명의 목이 떨어지고, 백성들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고 여겼다. 나중에 그들이 진짜 집권하자, 우리는 비로소 발견한다. 원래 유소기, 등소평노선이야말로 진정으로 나라와 국민을 구하는 실용적인 좋은 노선이었다는 것을. 백성들이 부유하게 만들고, 젊은이를 학교에서 공부하게 하며, 지식인을 과학연구하게 하며, 더 이상 정치운동을 하지 않고, 사람들을 처벌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한 사람의 목도 잘리지 않았다. 국가는 부강해졌다. 우리는 현재 진심으로 참회한다. 당시 우리가 유소기, 등소평에 반기를 든 것은 완전히 잘못된 일이었다.


그렇다면 보황파는 맞았는가? 역시 아니다. 그들은 파사구를 하여 전통문화를 파괴했다. 지식분자를 비판하고 백성들을 처벌했다. 마찬가지로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


양파는 모두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 모두 극좌를 행한 것이다. 무엇이 극좌인가. 그것은 사람과 사람이 싸우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모순을 만들고, 적을 만드는 것이다.


정권탈취를 하던 전쟁시기에는 적과의 투쟁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중공내부에도 마찬가지로 대량의 적을 만들어내고, 억울한 사건을 만들어 냈다. 이것은 이미 잘못한 것이다. 해방후에도 여전히 멈추지 않고, 게급투쟁을 갈수록 심화시켰다. 반우같은 류의 운동으로 지식분자와 일반백성들을 탄압한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문혁은 반대로, 관리를 타격했는데 역시 잘못한 것이다.


이런 잘못을 시정하려면, 백성들을 동원하여 관리를 처벌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원한을 원한으로 갚으면, 언제 좋은 날이 오겠는가. 그저 철저히 극좌사상을 없애야하고, 인위적으로 만든 계급투쟁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뿌리부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극좌의 잘못은 사람을 잘못 처벌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처벌하지 말아야할 사람을 처벌한데 있다. 그리고 사람을 처벌하는 방식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누구를 처벌하든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이다.


내가 이전에 모주석이 아래에서 극좌를 해서 '시정하려는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나 유치했다.


현재 화해사회를 제창하는데, 이제야 비로소 관념적으로 정상궤도에 올라선 것같다. 사회는 서로 다른 이익집단이 있기 마련이다. 어떻게 이익집단간의 갈등을 해소할 것인가? 이 집단이 저 집단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평민집단이 관료집단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사회에는 반드시 관리가 있어야 한다. 관료집단이 평민집단을 없앨 수도 없다. 백성이 없으면 관료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단간의 상호투쟁은 출로가 보이지 않는다. 출로는 바로 헌정민주에 있다. 법치사회에 있다. 이런 사회에서 헌법, 법률, 여론과 도덕에 따라 이익집단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모두가 먹을 것이 있고, 누구든지 법을 어기면 그를 처벌하여야 한다.


6. 왜 현재 조반파만 욕을 얻어 먹는가?


조반파는 그저 모주석이 주자파를 처벌하는 도구였다. 쓰고는 버림받았다. 문혁후에 그들 '주자파'는 집권했고, 당연히 조반파를 미워했다. 그래서 문혁때 모든 나쁜 짓은 조반파에게 뒤집어 씌운다. 실제로 '주자파'의 자녀 당시 노홍위병이 지식분자와 백성을 죽인 숫자는 처벌받은 '주자파'보다 몇십배 혹은 그 이상 많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10년문혁에서 진정 조반파가 득세하고, '주자파'가 끌어내려진 것은 겨우 몇 달의 기간에 불과했다. 나머지 9년여의 시간은 주로 관료집단과 노홍위병이 평민들을 처벌하는 시기였다. 예를 들어 처음에 '삼가촌(三家村, 북경시위서기 등탁, 북경시부서기 오함, 북경시통전부장 요말사를 가리킴)', '사가점(四家店, 운남대학당위가 장덕광, 강응량, 이연, 우중등 네명의 교수를 반당반사회주의의 사가점이라고 비판함)'을 비판하며 주로 지식분자를 처벌했다. 그후의 '횡소우귀사신', '파사구'는 주로 백성들을 처벌했고, 그후에는 '일타삼반(一打三反)'에서 '삼종인청리'까지 모조리 조반파를 처벌한 것이다. 즉 관료집단의 복수이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문제는 문혁중의 양파중 일파는 철처지 정리정돈당하고, 다른 일파는 전혀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진정한 문혁에 대한 반성이 아니다. 언제 양파의 잘못 특히 발동자의 잘못이 모조리 철저히 청산될 것인지, 그때야말로 진정 문혁이 부정되는 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