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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후)

무시할 수 없는 중공원로 미망인정치

by 중은우시 2014. 8. 27.

글: 외성인어(外星人語)

 

 

린자메이와 리센넨

 

 

탄후이(覃輝)의 원부인 린징(林菁)은 1996년(29살)때 선천성심장병으로 사망한다. 두사람 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다. 린자메이(林佳楣)는 탄후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다시 재혼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너를 집안식구로 인정하겠다." 그리하여, 탄후이는 비록 여러번의 스캔들은 있었지만 아직도 홀몸으로 있고, 린씨집안의 사위로 인정받고 있다.

 

린자메이는 중공의 건국원로들의 미망인중에서 아주 활발한 한 명이다. 자주 사방으로 돌아가니고, 자기 생각을 말한다. 노부인은 하고싶은 말을 다 하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고압적인 태도는 고위층 사이에서도 '유명할 정도'이다.

 

실제로, 중공건국지도자와 개국공신중 많은 사람은 혼인을 여러번 한다. 연안과 해방후 북경에 들어오면서 두번 보편적으로 '재혼'한 후 마지막 처와의 나이차이는 아주 많은 편이었다. 예를 들어, 린자메이는 리센넨(李先念)보다 16살이 어려 나이차이가 아주 많은 편이었다. 늙은 남편보다 오래 산 사람이 아주 많았다.

 

그러므로, 중공지도자와 개국공신들이 죽은 후, 상당한 수량의 미망인군단이 형성된다. 이들 노보인들은 견식이 넓고, 모택동(毛澤東) 주석, 주은래(周恩來) 총리와도 수시로 만나서 얘기하며 웃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 후대의 지도자들을 어찌 눈아래 두겠는가. 그뿐아니라, 남편과의 관계로 인하여, 그녀들의 자녀와 친척친구들은 여러 분야에서 여러 분야에서 드러나는 실권파인물이다.​ 여기에 '근친번식'도 아주 많았다. 당내에 뿌리를 형성하고 세력이 강대하고,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집단이 된다.

 

노부인들은 선대 개국공신의 광환에 둘러싸이고, 후대 실력자들이 지탱해주고 있어,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것을 그녀들은 감히 말하고, 다른 사람들이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것도 그녀들은 건드린다. 자신의 자녀들의 명리를 차지하기 위하여는 "당인불양(當仁不讓)"한다. 이들은 모두 이후 국가지도자들이 골치아파하는 인물이 된다. 그렇다고 그녀들은 함부로 대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그녀들이 '무슨 요구사항이 있으면 최대한 만족시켜주게' 된다.​

 

노부인들의 그림자와 영향력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한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지펑페이(姬鵬飛)의 아들이자 전임 총참 정보부 상무부부장 지성더(姬勝德)사건이 터진 후, 군사법정은 지성더사건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고 지성더가 3가지 죄를 범했다고 인정한다:

 

(1) 범죄집단의 인민폐, 달러, 홍콩달러뇌물을 수수하였다. 합계2,130여만인민폐이며 그중 1,590만위안은 외화로 환전하여 외국에 개인구좌를 개설했다.

(2) 군사용의 자금 975만위안을 횡령,유용하여 이미 써버리거나 해외부동산900만인민폐를 사들였다; (3) 장기간 배우자가 외국국적을 취득한 사실을 속였고, 본인과 사회상, 홍콩, 외국조직의 부정당한 관계를 감추었으며, 군사기밀을 누설했다.

 

이 3가지 죄행중 그 어느 하나만으로도 사형에 처할 것이었다. 중앙군사위원회의 심의의견도 '사형'이었다. 중기위의 심의의견도 마찬가지로 '사형'이었다. 중앙정치국에서 심의할 때도 군사법정의 '사형' 의견을 지지했다. 장쩌민은 회의상에서 이렇게 말한다. "군중패류(軍中敗類), 민족패류(民族敗類).이다. 죽이지 않으면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줄 수가 없다."

 

지펑페이가 여러 곳을 뛰어다니면서 아들의 구명활동을 벌였지만 효과가 없어서, 지성더가 사형을 당하는 것이 확실해지자, 비분강개하여 자살을 한다(포도주와 100알의 수면제를 먹고). 지펑페이가 죽은 후, 그의 처인 쉬한빙(許寒氷)이 사방을 뛰어다니면서 보이보(薄一波, 보시라이의 부친)등 원로의 집을 찾아가서 결국 지성더는 파격적으로 부친의 추도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된다. 지성더는 마지막에는 결국 '사형집행유예'를 받아내어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그의 부친 지펑페이의 '이명환명(以命換命)'의 결과라고, 그러나, 그의 모친 쉬한빙이 곳곳을 뛰어다니면서 간청해서 얻어낸 것이다. 그녀는 먼저 원로들에게 간청하고, 다시 등소평 부인, 진운 부인, 유백승 부인, 서향전 부인등에게도 구명을 간청한다. 미망인노선을 뛴 것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당시, 당국이 지성더의 추도회참석을 허락하면서, 장완넨(張萬年)은 부대조건을 단다: 반드시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추도회가 끝난 후 반드시 돌아온다. 영구차를 따라 팔보산화장장으로 보내서는 안된다. 만일 추도회장에서 소란을 피우면 그 책임은 모두 부담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쉬한빙, 지성더는 모두 보증을 한다. 그래서 지성더가 부친의 추도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실, 이미 중공을 장악한 장쩌민이 지성더에게 살길을 열어주도록 결정한 것은 바로 이 노부인들의 관문을 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지금까지 매년 설날이 되면, 리센넨의 원래 비서들은 약속을 잡아 중남해로 리센넨의 부인 린자메이를 찾아간다. 당연히 일부 사람들은 이때 자신이 부탁할 거리를 가지고 가서, 노부인에게 도와달라고 하게 된다.

 

린자메이는 매번 홍안현(紅安縣)의 리센넨묘에 성묘하러 갈 때도 사람들을 좌우에 가득 거느리고 간다. 2010년 4월 4일, 그녀와 딸 리쯔양(李紫陽)의 일행이 홍안현으로 가서 리센넨의 묘를 찾았다. 따라온 지도자들중에는 후베이성 성위 판공청 부순시원 후공여우(胡功友), 국무원 삼협판공실 부주임 치린(漆林), 시 정협주석 샤룬샹(夏潤祥), 현위 서기 슝량샤오(熊良霄), 현장 위쉐우(余學武), 은퇴한 고관 펑딩궈(彭定國), 겅세난(耿協南), 현능원관리처주임 천민쉐(陳敏學)등이다.

 

린자메이는 당연히 다른 사람이 자신의 집안사람을 '능멸'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 탄후이에게 사건이 생기면, 바로 자신의 남편(리센넨)에게 은혜를 입은 바 있는 장쩌민에게 전화를 건다.

 

린자메이의 불같은 성격은 그녀의 한마디로 경구(京九, 북경에서 홍콩의 구룡까지 가는 노선)철도의 노선을 바꾼 것과 중남해에서 이사나가지 않은 점에서 알 수 있다.

 

중국의 저명한 장군현이자 리센넨의 고향인 후베이 홍안현은 노혁명지구이다. 그리고 유명한 빈곤현이다. 경구철로를 만들 때, 홍안은 대별산의 중심지여서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마청(麻城)과 홍안(紅安)을 지나지 않았다. 장군현을 보살펴야 한다는 목소리는 당시의 철도부장에 있어서 만일 경구철도가 마청과 홍안을 지나가야 하면 200억위안의 손실이 발생하는 것이고, 무슨 경제적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소문에 따르면, 이 답변을 들은 린자메이는 불만이 컸다고 한다. 설마 홍안의 200여장군의 가치가 200억위안도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철도부 부장은 그 말을 듣고 할 수 없이 계획을 고쳤다.

 

그외에 중공관례에 따르면, 중남해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국가지도자와 고급간부의 배우자와 가족은 중남해에 거주할 수 있다. 만일 이 지도자 혹은 고급간부가 사망하면, 배우자 및 자녀는 중남해에서 이사나가야 한다. 중앙판공청 혹은 기타 관련기관은 지도자 혹은 고급간부의 생전직급에 따라 중남해의 바깥에 조건이 아주 좋은 주택을 안배해준다. 일반적으로 유명한 후통의 사합원이 아니면 서산등 고급별장건물을 준다. 이렇게 하면 중남해를 업무를 위주로 하고 생활을 보조로 하는 전통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지도자들과 고급간부의 미망인은 스스로 이사를 갔고, 중앙판공청에서 재촉하기 전에 떠났다. 다만 린자메이는 리센넨이 죽은 후 지금까지, 여러가지 말에도 불구하고, '규정을 거이고' 중남해에 거주하고 있다.

 

종하이런(宗海仁)은 <주용기의 1999년>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공개했다:

 

주룽지(朱鏞基)가 취임한 후 국무원판공청 행정사는 지시에 따라 사무실건물을 조정하기로 결정했고, 조정방안은 이러했다:

 

1. 퇴임한 전임 국무원지도자들을 판공실에서 내보낸다. 2. 이미 사망한 중공원로 리센넨의 미망인 린자메이 및 그의 자손들을 거주하는 대택원에서 몰아내고, 주룽지 사무실로 개조한다.

 

말이 나온 김에 언급하자면, 리센넨의 미망인 린자메이 및 그녀의 자손들이 거주하는 그 주택은 70년대말 왕동흥(汪東興)이 당시의 중공중앙주석 화국봉을 위하여 건축한 것이다. 화국봉이 하야할 때, 리센넨은 즉시 서황성근남가(西皇城根南街) 9호주택을 화국봉에게 주고, 자신이 화국봉의 주택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죽은지 7년이 지난 후에도 그의 부인과 자손들이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러므로, 국무원 제1, 제2, 제3회의실에서 개회되는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혹은 북구에서 일을 보는 국무원판공청의 업무인원들은 자주 아이들이 원내에서 자전거를 배우고 노는 광경을 보게 된다. 이것은 참으로 웃지도 울지도 못할 광경이다. 중남해는 정말 백성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신성한가?

 

사무실을 조정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우리는 모두 흥분했다: 새 총리가 새로운 분위기를 만드는구나. 북구가 저택이 되는 시절은 이제 가고 다시 오지 않겠구나. 이 일이 성공하면 주룽지는 과연 남다르다고 모두 여길 것이다.(그렇다. 이 일은 홍콩이나 서방에서는 언급할 가치도 없는 일이겠지만, 다만 중국에서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나서 필작 떠날 때도, 북구는 여전했다. 반년후 다시 중남해로 돌아왔을 때 국무원영도인판공실의 조정이 계획대로 진행되었을까? 중해 가의 긴의자에 앉아서 호숫물너머로 건륭어필의 '태액추풍(太液秋風)"정을 바라보며, 나의 동료는 탄식하며 말했다: "어려워."

 

리센넨의 덕으로, 린자메이와 그녀의 자손들은 여전히 이 '북원핵심'인 저택에 거주하고 있다. 여전히 해방군전사들이 그녀의 일가 3대의 사람들을 지켜주고 있다. 국무원과 아무런 관계도 없게 된 리테잉(李鐵映), 리꾸이센(李貴鮮)은 여전히 북구의 사무실을 차지하고 있다. 스스로 비운 사람들도 있다. 쏭젠(宋健), 펑페이윈(彭佩雲), 천쥔성(陳俊生). 그러나, 공산당이 스스로 깨달아서 정권을 공고히 했던가? 양심만이 자신을 구속하는가? 최근 일부 성의 지도자는 성급간부의 주택을 배분할 때, 기준에 충분히 들어맞는 기존의 주택을 새로 발탁한 성급간부에게 넘겨주어 거주하게 하고, 자신은 새로 지은 더욱 호화스러운 주택으로 옮겨갔다. 이 광경을 그들은 너무나 정상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들은 중남해에서 계시를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소위 '삼강(三講)'때 그들중 누구도 반성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는 얘기할 거리도 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전국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하나의 성, 몇 몇 사람뿐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