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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잔회팔염 유여시(柳如是): 가장 기개있는 진회명기(秦淮名妓)

by 중은우시 2014. 8. 27.

글: 이신강(李新剛)

 

 

 

 

사람들의 인상 속에서, 유여시는 진회팔염(秦淮八艶)의 하나로, 글재주가 있는 기녀일 뿐이다. 그러나 일대의 국학대가이며 두 눈이 거의 실명할 정도였던 진인각(陳寅恪)은 가난과 병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온 힘을 다해서, 10여년의 시간을 들여 그의 구술을 조수가 바다적게 해서 80여만자의 <유여시별전>을 썼다.

 

유여시는 명나라말기 가흥(嘉興) 사람이다. 본명은 양애(楊愛)이고, 자는 영련(影憐)이다. 어려서부터 집안은 가난했지만, 총명하기 그지없었다. 오강 성택진 귀가원의 유명한 기생 서불가(徐佛家)의 노비가 된 후 그의 훈도를 받는다. "여러 서적을 널리 읽어서, 시무을 할 줄 알았고, 틈이 있을 때면 화훼를 그렸는데, 빼어났다."(<우산화지>). 그녀는 일생동안 글을 많이 쓴다. 전해져 내려오는 시집으로 <무인초>, <유여시시>, <홍두촌장잡록>, <매화집구>, <동산수창집>등이 있다. 그외에 31편의 문조청려(文藻淸麗)한 척독(尺牘, 서신)과 독특한 풍격의 서예, 회화작품이 남아 있다.

 

진인각 선생은 유여시의 시사를 읽고 일찌기 "당목결설(瞠目結舌)"의 느낌을 받았다. 평론가는 그녀의 척독이 "육조보다 뛰어나고 반채(班蔡, 반소와 채문희)보다 정이 깊다(艶過六朝, 情深班蔡)" 그녀의 그림을 평가할 때는 "한숙간약(嫻熟簡約), 청려유치(淸麗有致)"하다고 했고, 그녀의 서예에 대하여는 "철완회은구(鐵腕懷銀鉤) 증장묘종수(曾將妙踪收)".

 

유여시는 14살때 나이가 환갑이 넘은 은퇴한 재상에게 강제로 첩이 된다. 유여시는 그의 사랑을 독점한다. 장원출신의 은퇴한 재상은 이 총명하고 영리한 어린 아가씨를 아주 좋아해서 항상 무릎에 그녀를 앉히고 이것저것 가르쳤다. 이렇게 되니 이 재상집의 처첩들은 적의를 품게 되고, 유여시가 음탕하다고 욕을 한다. 그러나 유여시는 그냥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성격이 강렬한 그녀는 욕으로 갚아 주었다. 사람들이 눈을 멀거니 뜨고 멍하게 될 때까지. 그러나 재상은 일이 커지면 체면이 상할 것을 우려하여 다시 그녀를 청루에 팔아버린다.

 

유여시의 첫사랑은 진자룡(陳子龍)이라는 강남재자이다. 잔자룡은 용모가 뛰어나고, 문재가 출중했다. 유여시가 17살때 그를 위하여 <남낙신부>를 쓴다. 이를 보면 그녀가 진자룡을 얼마나 앙모했는지 알 수 있다. 나중에 명나라가 망하고 청군이 남하할 때, 진자룡등은 적극적으로 반청복명의 사업에 뛰어든다. 더 이상 아녀자와의 정을 돌볼 겨를이 없게 된다. 결국 전투과정에 진자룡은 희생당하고, 유여시는 비분강개해 마지 않는다.

 

유여시가 전겸익(錢謙益)과 처음 만난 것은 숭정11년(1638년) 초겨울이다. 전겸익은 유여시를 처음 만나서 바로 그녀의 미모에 반해버린다. 유여시는 대명이 자자한 문단의 거두 전겸익을 만나서 시문을 논했다. 그녀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서호에 울렸다. 관직을 금방 잃고 마음이 울적했던 전겸익은 마음 곳의 우울함을 다 잊을 수 있었다.

 

십일만에, 전겸익은 유여시를 위하여 아름다운 집을 지어준다. 그리고 유여시의 호인 "아문거사(我聞居士)"를 따서 집의 이름을 "아문실(我聞室)"이라 지어준다. 그녀를 잠시 새 집에 두고는 밤낮으로 마주하고 시문을 논한다. 숭정14년, 전겸익은 본부인 진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식으로 유여시를 맞이한다. 이렇게 하여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된다. 관리들은 더욱 분노한다. 전겸익 학사가 기녀를 맞이한 것은 "조정의 명기(名器)를 더럽히고, 사대부의 전통을 해쳤다"고 보았다 .그리고 많은 선비와 관료들은 속아서 이 혼인에 참석했다. 이는 마치 이 혼사의 합법성을 승인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돌과 기왓장을 집어들고 분노하여 채선(彩船)에 던졌다. 일시에 돌과 기왓장이 비처럼 쏟아졌고, 축포소리는 덮여버린다. 채선은 벼락같은 돌맹이 소리를 들으면서 강안을 떠났다. 그러나 전겸익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유유자적했고, 붓을 씻고 먹을 갈아서 즉흥적으로 몇 수의 <최장시(催粧詩)>를 쓴다.

 

전겸익에 대하여 유여시는 마음 속으로 감격한다. 그녀를 취하기 위하여, 전겸익은 명성이 훼손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그녀가 다른 첩들과 싸울 때면 전겸익이 그녀를 항상 보호해주었다.

 

유여시와 전겸익이라는 이 노부소처(老夫少妻, 나이든 남편과 젊은 부인)는 하나가 당시에 명성이 자자한 절색미녀이고, 하나는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몰락한 고관이었다. 그들간의 나이차이는 36살이다. 단, 이 모든 것은 두 사람의 애정에 전혀 손색을 주지 못했다.

 

유여시는 항상 사람드로가 천하를 논했다. 그녀는 일찌기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중원이 혼란에 빠졌으니 대영웅이 나타나서 난국을 바로잡고 외적을 물리쳐야 한다. 마땅히 사동산(謝東山, 동진때의 재상 사안)같은 사람이 전략을 세워 적을 막아내야 하지, 도정절(陶靖節, 도연명)같은 고고한 절개는 필요하지 않다. 만일 내가 사내대장부라면, 반드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몸을 바쳐 보국할 것이다!" 유여시는 항상 기녀출신으로 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구한 양홍옥(梁紅玉)과 자신을 비교했고, 경천동지의 큰 일을 벌이고 싶어했다.

 

그녀의 <증우인>이라는 시에는 여자로서는 보기드문 호기가 드러난다: 

 

아문기무갱탄식(我聞起舞更嘆息), 강호지색개분치(江湖之色皆奔馳)

즉금천하다분분(卽今天下多紛紛), 천하비상대안사(天下非常待顔駟)

장부회우거이능(丈夫會遇易能), 장과대극비난위(長戈大戟非難爲)

일조발기약용양(一朝拔起若龍驤), 신수유병부풍아(身帥幽幷扶風兒)

대우삽요전재수(大羽揷腰箭在手), 공고약마칭정기(功高躍馬稱精奇)

 

홍광2년(1645년) 오월, 청군이 남경으로 쳐들어 온다. 2,3십만의 남명 수비군들은 흩어져 도망친다. 홍광제 주유송은 남경을 버리고 도망을 친다. 이 일을 역사에서는 "을유지변(乙酉之變)"이라 부른다.

 

유여시는 명나라가 멸망하는 운명이고 다시 만회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비장하고 성결한 표정으로 여러번 남편 전겸익에게 권한다: "마땅히 의(義)를 택하여 절개를 보전할 때이다. 그것이 명성에 걸맞는다." 유여시의 뜻은 고관이면서 명사이고 또한 명문집안인데 절대로 적군을 위해서 일하여 조상과 국가에 부끄러운 짓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마땅히 순국함으로써 보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칼, 밧줄, 물 세 가지 방법중 한 가지를 택해서 죽자. 당신은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이고, 나는 남편을 위하여 죽는 것이다. 전겸익은 이리저리 생각하더니, 좋다 그럼 우리 호수에 빠져서 자결하자고 한다.

 

두 사람은 서호로 간다. 전겸익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손을 물 속으로 뻗는다. 그리고 아주 유명한 한 마디를 던진다: "물이 너무 차갑군. 내 몸이 견디기 힘들 것같다. 우리 날을 바꾸어 다시 오자." 이 말을 후세에 그의 모든 문장을 다 합친 것보다 유명하게 전해져 내려간다. 유여시는 그를 보고 머리를 흔들며 혼자서 몸을 던져 호수로 뛰어든다. 전겸익과 사람들은 급히 유여시를 구해낸다.

 

그후 며칠만에 대명이 자자한 문단의 거두 전겸익은 성을 나와 적에 투항한다. 이때부터 유여시가 전겸익에게 보낸 것은 경멸의 눈초리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