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한무제)

금옥장교(金屋藏嬌)는 애정동화가 아니다.

by 중은우시 2014. 5. 30.

글: 조염(趙炎)

 

4살짜리 사촌동생이 14살짜리 사촌누나를 처로 취한다.

 

한무제 유철(劉徹, 원명은 劉彘)이 약 4살때, 고모인 유표(劉嫖)는 그를 무릎에 안고서 그에게 장난스럽게 묻는다: "너는 처를 취하고 싶으냐?" 유철은 말한다: "예" 유표는 곁에 있는 많은 궁녀들을 가리키며, 그에게 누가 마음에 드는지 물어본다. 유철은 자그마한 머리를 좌우로 마구 흔든다. 유표는 자신의 딸인 아교를 가리키며 유철에게 말한다: "아교를 너에게 시집보내면 어떻겠느냐?" 그는 바로 기뻐하며 자그마한 손으로 손뼉을 치면서 말한다: '좋아요. 좋아요. 만일 누나를 처로 삼을 수 있으면, 반드시 금으로 집을 만들어 살게 해줄 겁니다."

 

이것은 반고가 쓴 역사이야기이고, 널리 알려져 있다. 세상사람들이 모두 다 아는 이야기이다. 후인들은 이를 가지고 '금옥장교'의 고사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한무고사>는 어쨌든 이야기일 뿐이므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을 추구할 뿐이고 믿을만한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의 바탕이 된 역사적 사실관계는 대체로 맞다:

 

관도장공주 유표는 야심이 있는 여인이고, 자신의 딸인 진아교가 황후에 오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조정내에서 장기간 공고한 지위를 확보하고자 했다. 그녀는 원래 딸을 황태자 유영(劉榮)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는데, 유영의 생모인 율희(栗姬)는 이유도 없이 거절한다. 그리하여 관도장공주는 진노하고, 황태자를 폐위시킬 생각을 품게 된다.

 

유철의 생모인 왕지는 한경제의 후궁중 비교적 총애를 받는 부인이었고, 왕부인은 총명하면서도 세상일에 밝았다. 기회가 있다고 생각되자 즉시 온갖 방법을 써서 관도장공주에게 잘보여, 적자도 아니고 장자도 아닌 아들이 태자의 지위를 빼앗을 수 있도록 만들고 싶어한다. 쌍방은 바로 의기투합하고 정략혼인은 이루어진다.

 

진아교의 혼인은 왜 행복해지기 어려웠을까

 

당시 진아교는 14살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용모가 아주 수려했다고 한다. 다만 4살짜리 어린아이가 무슨 심미능력이 있겠는가. 그 부분은 의문이다. 4살짜이 아이가 14살짜리 마누라를 취하는데, 그 혼인이 행복할 수 있을까? 

 

여자의 청춘기는 아주 짧다. 민간에는 '여대삼(女大三, 포금전(抱金塼)"이라는 말이 있다. 겨우 3살 많을 때의 일인데, 이 경우는 10살이나 많다. 유철이 스무살이 되면, 진아교는 이미 서낭반로이다. 유철이 서른이 되어 한창 나이 때가 되면, 진아교는 마흔으로 이미 잔화패류이다. 이 혼인은 행복할 수 없는 운명이다.

 

유철은 16살에 등극하는데, 이때 진아교는 26살이다. 몇년간은 금슬이 괜찮았다. 다만 태황태후 두씨(두의방)이 사망한 후, 상황은 바뀐다. 유철은 그때 21살이다. 진아교는 이미 서른이 넘었다. 그러나 아직 자식을 낳지 못한다. 부부간에 틈이 점점 발생하고 나중에는 더 이상 만나지 않게 된다.

 

사마상여는 <장문부>에서 이렇게 썼다: "부하일가인혜(夫何一佳人兮), 보소요이자우(步逍遙而自虞)". 남편은 있지만 남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혼자서 장문궁안을 이리저리 왔다갔다 한다. 그렇게 하여 마음 속의 우수와 적막을 풀고 있었다. 장문궁에 한거한 후, 한무제는 다시 그녀를 찾지 않는다. 한번은 우연히 그녀가 생각나서 남궁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원래는 군무희언(君無戱言)이지만, 그녀가 그곳에 가서 아무리 둘러봐도 한무제는 보이지 않는다.

 

진아교가 "황금백근을 주면서" 사마상여에게 <장문부>를 대신 써서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고 했고, 유철은 그 글을 읽고 깊이 감동받는다. 그리하여 진아교는 다시 총애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 기간은 너무나 짧았다. 1년도 되지 않았던 것같다. 즉 원광5년, 27살의 유철은 '무고'의 죄명으로 조서를 내린다: '황후실서(皇后失序), 혹어무축(惑於巫祝), 불가이승천명(不可以承天命), 기상새수(其上璽綬), 파퇴거장문궁(罷退居長門宮)"

 

북방가인이 유철이 가장 그리워하는 여인이 되다.

 

처음에 황후로 삼을 때, 유철은 그녀에게 약속한 바 있다. 아침에 나가서 국사를 처리한 후, 저녁에는 반드시 돌아와서 그녀와 함께 하겠다고. 그러나 지금은 그저 새 사람의 웃음소리만 들을 뿐, 옛 사람의 울음은 들리지 않는다. 아마도 일찌감치 그녀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같다.

 

"장문사(長門事), 준의가기우오(準擬佳期又誤). 아미증유인투(蛾眉曾有人妬). 천금종매상여부(千金縱買相如賦), 맥맥차정수소(脈脈此情誰訴)"(신기질 <摸魚兒>)

 

기원전 139년 상사절(上巳節), 유철은 평양공주의 집에서 연회를 열었을 때 평양후부의 한 가녀인 위자부(衛子夫)를 만나서 아주 좋아하게 된다. 당시에 바로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그녀를 궁안으로 데려온다. 위자부는 이때부터 유철의 후궁이 되고, 부인(황후의 바로 다음 가는 자리임)에 봉해진다. 나중에는 황후에 오른다. 위씨집안은 이로 인하여 고귀하게 된다. 기원전91년, 간사한 강충, 환관 소문등이 고의로 무고사건을 조작하여 태자 유거(劉據)를 모함한다. 유거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거병하여 반항하나 패배하여 자살한다. 위자부는 태자를 지지해서 한무제의 진노를 사고, 목을 매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앙앙(李央央)의 이야기는 더욱 전설적이다. 그녀의 오빠인 이연년(李延年)은 유철에게 악부를 하나 바치는다: 북방유가인(北方有佳人), 절세이독립(絶世而獨立), 일고경인성(一顧傾人城), 재고경인국(再顧傾人國). 영부지경성여경국(寧不知傾城與傾國), 가인난재득(佳人難再得)" 이앙앙은 '경성경국'의 '가인'의 대명사가 된다. 이때부터 삼천궁녀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다. 아쉽게도 이앙앙은 홍안박명의 여인이었다. 젊은 나이로 불치병을 얻는다. 유철이 여러번 그녀를 찾아갔지만 만나기를 거절한다. 사후에도 유언을 남겨 유철이 그녀의 죽은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녀의 목적은 실현되었다. 경국지색으로 그녀는 영원히 유철의 마음 속에 남는다. 그리고 유철이 가장 그리워하는 여인이 된다. 유철은 추풍부에서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바 있다.

 

진아교의 만년은 여지(勵志)했다.

 

고대의 동양식(童養媳)의 처참한 여러가지 이야기는 모두 먹고 살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 유행하는 '가완족(嫁碗族), 비혼녀(比婚女)같은 유형, 노처녀가 급하게 남편감을 찾아서 결혼하는 것은 결국 밥솥을 위한 것이다. 밥솥에 밥이 있어야, 밥그릇에도 밥이 담기는 법이다.

 

그러나 진아교는 달랐다. 그녀는 혁혁한 가문출신으로, 죽은 효문제와 효경제는 각각 그녀의 외할아버지, 외숙부였다. 태황태후 두씨는 그녀의 외할머니이다. 부친은 세습 당읍후인 진오(陳午)이다. 그는 개국공신의 후손이고, 모친은 관도장공주 유표로 유철은 그녀 모친의 사촌동생이 된다. 그리고 그녀는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의 총애를 많이 얻었다. 즉, 진아교는 근본적으로 돈이 모자라지도 않고,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할 수 있었다. 설사 혼인을 자신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시집가면 가는 것이고, 폐위되면 폐위되는 것이다. 비바람이 지난 후에는 분명 무지개가 뜬다.

 

여인은 경제적으로 독립하면, 남자에 대한 요구조건이 평면적인 심미에서 입체적으로 승격된다. 이것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어느 한 남자를 떠나더라도 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물질적인 여유는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감을 갖게 해준다. 그리하여 혼인과 애정에 대한 추구는 조금 약해진다.

 

진아교와 유철의 혼인은 아마도 애정을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두태후가 사망하기 전의 기간동안 유철은 그녀에게 잘 대해주었다. <한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급제즉위(及帝卽位), 입위황후(立爲皇后), 천총교귀(擅寵驕貴)". '천총교귀'의 네 글자는 분명히 말해준다. 그러나 사랑이 다른 여인에게 옮겨간 후에도 유철은 그녀에게 잘 대해준다. <자치통감>에는 이렇게 말한다: "비록 폐위시켰지만, 대우는 예전과 같았고, 장문궁은 상궁과 다름이 없었다." 당연히 유철이 그녀를 본체만체 하더라도, 진아교는 그냥 있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의 모친인 유표가 아직 살아 있었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진아교의 여생은 여지의 특징이 있다.

 

그녀는 더 이상 유철이라는 이 '밥솥'을 필요로 하지 않은 것같다. 폐위때 그녀는 개략 37살이다. 이 나이에 이르면 더 이상 청춘도 아니고, 무엇을 더 억지로 구하겠는가. 이백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락불상천(雨落不上天), 수복난재수(水覆難再收)"(비는 한번 내리면 다시 올라갈 수 없고, 물을 한번 쏟아지면 주워담을 수 없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녀는 담담하게 살아간다. 원망하지도 질투하지도 않고 자기 할 일을 자신이 한다. 어쨌든 누구도 그녀를 건드릴 수 없고, 누구도 감히 그녀를 건드리려고 하지 않는다.

 

혼인 애정이라는 것은 있으면 즐기면 되고, 없으면 굳이 얻으려 할 필요는 없다. 억지로 딴 참외는 달지 않는 법이다.

 

진아교가 사망할 때, 개략 57세 내지 60세이다. <한서-외척전권67>을 보면, "황후는 20여년만에 사망하고 패릉 낭관정의 동쪽에 묻히다." 그녀는 수종정침(壽終正寢)했다고 할 수 있다.

 

금옥은 아교 일생의 청춘세월을 가두어 두었고, 그녀 일생의 쾌락과 고통을 가두어 두었다. 금옥안에는 일찌기 남편의 사랑과 아내의 애교가 넘쳤지만, 나중에 장문궁 안에는 "등참월암무부반(燈慘月暗無復盼)"으로 고독하게 늙어갔다.

 

후인들은 잘 잊어버린다. 항상 '금옥'과 '교'에 대하여 무한히 아름다운 상상을 한다. 그러나, "사창일락점황홍(紗窓日落漸黃昏), 금옥무인견루흔(金屋無人見淚痕), 적막공정춘욕만(寂寞空庭春欲晩), 이화만지불개문(梨花滿地不開門)" 금옥장교는 언뜻 듣기에 아름답지만, 기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