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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양도(楊度)가 남긴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13. 12. 21.

글: 왕개림(王開林) 

 

"홍헌(洪憲)"왕조가 와해된 후, 양도는 "제제여얼(帝制餘孼)"의 욕과 "제제화수(帝制禍首)"라는 죄명을 뒤집어 쓰고, 침울하게 남쪽으로 돌아간다. 단기서 임시집정부의 형사지명수배를 받는다. 옛날의 친구들은 모두 그를 피했다. 마치 무슨 전염병균을 보는 것처럼.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를 엄히 처벌하고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양도는 그제서야 분명히 알았다. "함정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落下石)은 손을 맡잡고 폐와 간을 내보이던 사람들이다." 한유(韓愈)의 이 통절한 말은 너무나 들어맞는다. 아끼던 첩인 소새화(小賽花)는 양도에게서 빨아낼 수 있는만큼 빨아낸 다음, 그를 버리고 가버린다. 그리고 다시 풍진세계로 돌아가서 다시 옛날의 직업으로 돌아간다.

 

1917년, 양도는 변수 장훈(張勛)과 보황당 영수 강유위의 시끄러운 복벽사건을 조용히 지켜보고, 전보를 보내어 견책한다. 장훈과 강유위에게는 '4가지 과오가 있었다'는 것이다: "양도의 생각에 공등의 행위는 군주입헌정신과 완전히 상반된다. 이렇게 역행하는 조치를 행하면, 국가에 화를 미치고, 황실에 화를 미친다. 실로 해서는 안될 일인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신성한 군주입헌이 이렇게 희생되어, 다시 해를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의 정치적 이상은 이렇게 마침표를 찍는다. 나중에 양도는 조곤(북양군벌로 뇌몰총통이라는 스캔들은 세상에 유명하다)의 막료를 지낸다. 조곤이 그를 도와서 지명수배를 풀어주었고, 그를 북경대학 교장에 추천하기도 했다. 이것은 여러 측의 반대로 성공하지는 못한다.

 

1920년대, 양도의 사상은 비교적 크게 바뀐다. 그는 적극적으로 "반제대동맹", "중국호제회"와 "중국자유대동맹"에 가입하여, <경보>이 주필 소표평, 북대교수 이대쇠의 석방에 앞장서기도 했다. 특별히 칭찬할만것은 양도는 열정을 가지고 의로운 일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1916년, 그는 집정부의 지명수배를 받은 후 급히 북경을 떠났고, 많은 귀중한 물품들을 돌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친구인 팔지두타가 정중하게 부탁한 유고(遺稿)는 가지고 간다. 1926년, 열사 이대쇠의 유가족을 돌보기 위하여,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사합원을 팔기도 한다.

 

말년에 이르러, 양도는 강호를 떠돌고, 조계에 생활하는데, 낙척서생의 모습이었다. 그는 "상해문인(上海聞人)", 청방방주 두월생의 손님으로 지내기도 한다. 이것은 체면있는 일도 아니고, 즐거운 일도 아니다. 그는 친필로 <두씨가사기>를 써서 두둴생을 유생이며 협객인 인물이라고 과찬한다.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의 녹을 먹으니(두월생은 매월 양도에게 은양 500원을 보내주었다), 그에 충성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마음에는 없지만 그런 글을 썼다는 것이다.

 

1920년대말, 민주투사 양행불 선생이 오송중국공학에서 강연을 하면서, 중국지식분자의 역할을 "삼사론(三士論)"으로 종합한다: 젊을 때, 마음은 천하를 우려한다 이것은 지사(志士)이다; 장년에, 명성과 지위를 얻으면, 명사(名士)가 된다; 말년이 되어, 채식을 하고 염불을 하면 거사(居士)가 된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들은 사회에 필생의 정력을 다한 것이나, 기실 하나도 이루는 것이 없다. 양도의 일생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전형적인 "지사 - 명사 - 거사"의 삼부곡이다. "홍헌"이 파산할 때, 절망에 깊이 빠져서 양도는 "이후로는 머리를 풀고 입산하겠다. 다시는 세상 일을 묻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스스로 "호선사(虎禪師)"라고 칭한도, 불교,선교를 공부하겠다고 한다. 곤경과 역경에서, 중국전통의 선비는 그저 이런 정신적인 퇴로와 출로밖에 찾을 수 없다. 조금 좋게 말하자면, "영웅이 나이가 들면 불교에 귀의하고, 명장이 산으로 돌아가면 병법을 얘기하지 않는다"라고 할 수 있다. 양도는 평소에 송불을 하고, 스스로를 "육조재세(六祖再世)"라고 말했다. 이것도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다. 어떤 사람은 양도를 "돈근이기(頓根利器)"라고 칭찬하고, 금시작비(今是昨非)를 깨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돈오'에 대하여 사람들은 항상 반신반의했다.

 

양도는 일찌기 <소요유사>를 쓴 바 있다. 개인의 절개를 표방하였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있다. "상소연어물외(常蕭然於物外), 여일세이장사(與一世而長辭), 유상심이자득(惟賞心而自得), 탄동락지인희(嘆同樂之人稀), 우권유이사반(偶倦遊而思返), 즉흥진이엄비(卽興盡而掩扉), 피시서이자독(披詩書而自讀), 인배주이작지(引杯酒而酌之), 임출처이자변(任出處而自便), 하외물지능기(何外物之能羈), 앙천지지한가(仰天地之閑暇), 각인사지무위(覺人事之無爲), 욕장가이기의(欲長歌而寄意), 수원필이망사(遂援筆而忘辭)" 이처럼 광달소쇄(曠澾瀟灑)함을 보면 양도라는 사람이 인생의 가장 우울한 시기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보기는 아주 상상하기 어렵다. 계속 속세의 그물에 걸려드는데, 어떻게 초탈할 수 있겠는가? 그는 부득이하게 자신에게 마취제를 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29년, 반한년의 소개로, 주은래의 비준을 받아, 양도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이때 그는 자신이 안신입명(安身立命)할 수 있는 당조직을 찾은 것이다. 말년에 적막한 와중에 예상외의 따스함을 얻었다. 인정해야 할 것은 비록 양도가 군주입헌을 고취시키다가 신패명렬(身敗名裂)했지만, 그의 인맥은 아주 넓었고, 지명도도 아주 높았다. 그를 입당시킨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렇게 하니, 양도의 정치적 주장은 여러가지 다양한 보호색을 띄게 된다. 흑백적등황록청람자(黑白赤橙黃綠靑藍紫), 그는 도대체 어떤 색깔을 더욱 좋아했을까? 그가 후세에 하나의 수수께끼를 남겼다. 그러나 해답은 남겨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