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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골동

전국옥새(傳國玉璽)의 5가지 버전

by 중은우시 2014. 8. 26.

글: 장유정(張柔情)

 

<중외중대역사지미도고(제2집)>은 작자가 친히 역사유적지를 조사하고, 역사수수께끼를 고찰하며, 역사상의 현안들을 해석한 것을 기록했다. 예를 들어, 구천, 범려가 구금된 뇌옥이 엄성(淹城)에 있다든지, 촉신독도(蜀身毒道)의 조사기록, 진시황 전국옥새의 수수께끼 등이 그것이다. 이는 중외역사의 중대한 현안을 전문적으로 해석한 전문서적이다.

 

 

전국옥새1: 필경유본

 

 

문헌기록에 따르면, 진나라때부터, 천자의 도장은 새(璽)라고 불렀고 또한 옥(玉)을 사용했다. 신하들은 사용할 수 없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진나라황제의 인새는 지금 볼 수가 없다. 실제로 사서에 기록된 것과 같은지 여부는 알아볼 수가 없다. 다만 현재 볼 수 있는 진나라 관인은 확실히 모두 인(印)이라고 부르지 '새'라고 부르지 않는다.

 

개괄하여 말하자면, '새'는 봉건시대 황제의 인장이다. 무수한 옥새중에서, 진나라때 만든 '전국옥새'는 천하공전(天下共傳)의 '지보(至寶)'이다. 수천년동안 그에 관한 여러가지 전설은 무수히 신비한 색채를 띄고 있다. 심지어 2천년후인 1924년 11월, 마지막 황제 부의가 궁에서 쫓겨날 때, 경찰총감 장벽(張璧과 녹종린(鹿鍾麟)등은 이 '역대왕조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금양옥새(金鑲玉璽)를 찾았다. 

 

전설에 따르면, 춘추시대, 초나라사람 변화(卞和)가 형산(荊山, 지금의 호북성 남장현)에서 봉황이 청석위에 깃들어 있는 것을 본다. 고인들은 "봉황은 보물이 있는 곳이 아니면 내려앉지 않는다(鳳凰不落無寶地)"라고 했다, 그는 이 박(璞)을 초려왕(楚厲王)에게 바친다. 옥장인이 감별해본 결과 보통 돌맹이라고 한다. 변화는 기군죄(欺君罪), 즉 임금을 속인 죄로 왼쪽발이 잘리는 형벌을 받는다. 그후 초무왕이 즉위한다. 변화는 다시 가서 보물을 바친다. 여전히 기군죄로 오른쪽발도 잘린다. 초문왕의 시대가 되어 변화는 옥을 안고 형산의 아래에서 통곡한다. 초문왕은 사람을 시켜 박을 갈라보게 했는데, 과연 옥이었다. 좋은 장인을 시켜 벽(璧)으로 가공하니, 사람들은 "화씨벽(和氏璧)"이라 불렀다.

 

 

전국옥새2: 향거원본

 

 

4백년후, 초나라 상국(相國) 소양(昭陽)은 조나라와 위나라를 격패시킨다. 초위왕은 화씨벽을 소양에게 하사한다. 하루는, 소양이 백여명의 빈객을 이끌고 적산(赤山)을 유람하는데, 그 자리에서 사람들의 요청에 못이겨 화씨벽을 꺼내서 보여준다. 그때 산 아래의 깊은 못(潭)에서 1장여의 큰 물고기와 무수한 작은 물고기가 수면 위로 뛰어오른다. 살마들은 모두 기적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자리를 파할 때에 화씨벽이 어디론가 사라져 행방이 묘연해진다. 당시에 아직 성공하지 못했던 종횡가 장의(張儀)는 바로 소양의 문하에 있었다. 사람들은 의심하여 말하기를, "장의가 가난하고 품행이 좋지도 못하니 반드시 상국의 화씨벽을 훔쳤을 것이다. 그리고 장의를 붙잡아 곤장 수백대를 친다." 그러나 화씨벽의 행방은 묘연했다. '도둑'은 누구인가?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미제사건'이다.

 

50여년후, 조나라의 태감 무현(繆賢)이 우언히 오백금을 주고 화씨벽을 구매한다. 조혜문왕은 그 소식을 듣고는 화씨벽을 빼앗아 자신이 차지한다.

 

진소양왕은 화씨벽이 조나라에 있다는 것을 알고, 15개 성을 줄테니 화씨벽과 바꾸자고 한다. 조왕은 어쩔 수 없이 인상여에게 화씨벽을 가지고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한다. 인상여는 사명을 욕보이지 않고, '완벽귀조(完璧歸趙)"한다. 61년후, 진나라가 조나라를 멸망시키고, 화씨벽은 진나라의 수중에 떨어진다.

 

진영(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시황제라 칭한다. 황제의 옥새는 자연히 천하에 둘도 없는 보배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하여 진시황은 재상 이사에게 명하여 화씨벽을 갈아서 황제옥새로 만들게 한다. 그리고 대대로 전할 생각에 이를 "전국새(傳國璽)"라고 칭하게 된다.

 

기원전219년, 진시황은 용주(龍舟)를 타고 동정상산(洞庭湘山)으로 간다. 바람과 파도가 일어 용주가 뒤집힐 지경에 처한다. 진시황은 급히 전국옥새를 호수 가운데 던지며, 신에게 파도를 잠재워달라고 기도한다. 8년후, 사신이 화음(華陰) 평서도(平舒道)를 지나는데 누군가 벽을 갖고 말하기를 "내가 호지군(滈池君)에게 남긴다"고 했다. 전국옥새는 이렇게 다시 돌아온다. 그 사정의 진위는 천고의 수수께끼이다.

 

유방이 병력을 이끌고 함양으로 쳐들어간다. 진왕 자영(子嬰)은 시황새(始皇璽)를 바친다" 유방이 황제를 칭한 후 "복지(服之), 대대상수(代代相受)"했다. 그리하여 "한전국새(漢傳國璽)"라 부른다.

 

서한말기, 왕망이 황위를 찬탈하고 어린황제 유영은 겨우 2살이었다. 옥새는 왕망의 고모인 한효원태후가 대신 보관하고 있었다. 왕망이 동생 왕순에게 장락궁으로 가서 옥새를 가져오라고 시킨다. 황후는 왕순을 보고는 화를 내며 질책한다: '부자와 종족이 한나라황실의 힘을 입어 대대로 부귀하게 되었으면서....이익을 탐하여 국새를 빼앗으려 하다니 배은망덕하기를 이 정도이면 개돼지도 먹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옥새를 '땅에 집어던진다(投之地)" 전국옥새는 한쪽 귀퉁이가 부서진다. 황금으로 이를 메웠지만, 천의무봉(天衣無綘)이 될 수는 없다. 천하의 지보는 이제 하자를 남기게 된 것이다. 광무제의 중흥이후, 왕망이 패배하면서, 이송은 옥새를 완상의 갱시제에게 갖다 바친다. 나중에 유수(劉秀)에게 넘어간다. 동한말기, 십상시의 난때 한소제는 밤에 북궁을 나와 피난한다. 황급히 가면서 전국옥새를 가지고 가지 못한다. 궁으로 돌아와보니 옥새의 행방이 묘연해 진다.

 

얼마 후, "십팔로제후가 동탁을 토벌"한다. 장사태수 손견은 낙양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성남쪽 견궁정(甄宮井)에서 궁녀의 시신을 끌어올리는데, 목에 걸린 비단주머니 속에 황금열쇠로 잠근 주홍색 작은 상자가 있었고, 그 안에는 옥새가 들어 있었다. 꺼내보니 옥새는 방원 4촌이고 위에는 오룡교뉴(五龍交紐)가 있고, 한쪽 귀퉁이가 부서져 있는데 황금으로 메워놓았다. 거기에는 전문(篆文)으로 "수명어천(受命於天), 기수영창(旣壽永昌)"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글은 이사(李斯)가 썼다고 전해진다. 손견은 전국옥새를 얻고 딴 생각을 품는다. 그러나 얼마후 현산(峴山)에서 죽는다. 원술은 손견의 처 오씨가 손견의 시신을 고향으로 데려가려는 틈에 "오씨를 붙잡아 옥새를 빼앗는다." 원술이 죽은 후, 그의 처는 관을 여강에 던진다. 광릉태수는 원술의 선례에 따라 전국옥새를 빼앗아 조조에게 바친다. 삼국정립때, 옥새는 위나라에 있었다. 삼국귀진후에는옥새가 진(晋)에 전해진다.

 

서진말기, 오호십육국이 빈번히 교체된다. 전국옥새는 사냥개가 쫓는 사냥감처럼, 계속하여 이리저리 탈취당한다. 매번 차지하는 사람이 바뀔 때마다 한바탕 피비린내나는 살륙이 벌어졌다. 진회제 영가5년, "옥새는 전조의 유총"의 손에 들어간다. 동진 함화4년, 석륵이 전조를 멸망시키고, 옥새는 후조에 귀속된다. 영민이 후조의 석감을 죽인 후, 전국옥새를 빼앗는다. 352년, 모융준이 업성을 함락시키고, 염민의 처가 이미 전국옥새를 바쳤다고 말하고 그를 '봉새군(奉璽君)에 봉한다. 그리고 연호를 '원새(元璽)'로 바꾸고, 대연국(즉 전연)을 개창한다. 기실 당시 전국옥새는 이미 복양태수 대시가 훔쳐서 진목제에게 바친다. 모용준은 그저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연극을 벌인 것일 뿐이다. 소위 '천명'으로 자신의 통치를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전국옥새가 동진에 들어온 후, 유송, 제, 양, 진, 수를 거쳐 최종적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의 손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새'는 '보(寶)'로 명칭을 바꾸어 부르게 된다.

 

 

전국옥새3: 채평중본

 

 

전국옥새는 발견때로부터 당나라말기까지 1620여년간 전승되었다. 이렇게 역대왕조에서 1천여년간 전해진 역사문물은 세계역사상으로도 보기 드문 일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전국옥새는 오대때 돌연 실종해버린 것이다. 송태조가 '진교병변'후 후주로부터 선양받을 때 후주에서 2개의 보인(寶印)을 넘겨받는데 전국옥새는 없었다.

 

역대봉건통치자들은 전국옥새를 얻는 것을 '천명소귀(天命所歸)', '상서지조(祥瑞之兆)라고 선전했다. 그러므로 송, 원, 명, 청때 모두 진위가 불분명한 '전국옥새'가 계속하여 세상에 나타난 바 있다. 예를 들어, 송나라 소성3년, 함양 단의는 하남향에서 땅을 파고 집을 짓다가, '난초처럼 색깔이 녹색이며, 따스하고 부드러우며 광택이 있고", "등에는 이뉴오반(螭紐五盤)이 있는" 옥도장을 발견한다. 한림학사 채경등 13명의 관리들의 '고증'을 거쳐 송철종은 "진나라때 만든 진짜 전국옥새"라고 인정한다.

 

명나라 홍치13년, 우현 모지학은 니하빈에서 전국옥새를 얻는다. 섬서순무 웅충이 명효종에게 바친다. 그러나 명효종은 이것이 가짜라고 의심하여 쓰지 않는다.

 

명나라말기, 원나라말기 원순제가 가지고 사막으로 간 전국옥새가 후금태종(즉 청태종)에게 들어간다. "상년팔월 원나라때 전국옥새를 원나라후에 린단한의 수무태후에게서 얻다". 그리하여 청태종은 이를 '나라를 세울 때'라고 보고 국호를 '금'에서 '청'으로 고친다.

 

청나라초기, 고공 교태전 어새 39방중에는 그중 하나가 '수명어천, 기수영창'인 옥새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전국옥새라고 여겼다. 1746년, 건륭제는 그중에서 흠정25방보새를 결정하는데, 이 소위 전국옥새는 제외된다. 이를 보면 그것은 위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후당 청태3년(936년) 11월, 말제 이종가는 대군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막다른 골목에 올려서, 황후와 전국옥새를 들고 현무루에 올라 불을 질러 자결한다. 이때부터 옥새는 행방불명이 된다.

 

 

전국옥새4: 남전현지본

 

 

다시 200년 가까이 흘러서, 남송 소성3년(1096년) 고도 함양에서 단의(段義)라는 골동상이 성내의 한 점포에서 옛날 새(璽)를 발견한다. 빛이 나서 가던 길을 멈추고 구경한다.

 

단의는 상인이지만, 학식이 약간 있었다. 그는 이 옥새의 이뉴가 남다르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옥새에 새긴 글이 마치 조어충전(鳥魚蟲篆)같은 것을 보고는 큰 돈을 주고 사들인다. 점포 주인을 통하여 이 옥새의 내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듣는다: 하남향(함양 부근의 위수남안일 것으로 추정)의 향민 유은재가 집을 확장하기 위하여, 그와 가족이 자신의 부지의 흙을 파내는데, 거기서 이 옥새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당시는 이미 어두워질 때인데, 옥새가 출토될 때는 빛이 났고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단의는 비록 도장의 글자를 읽을 수 없었지만, 그는 이것이 아주 귀한 물건이라고 여기고 밤을 세우 경성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이를 예부의 대신에게 바친다.

 

다음 해, 즉 소성4년(1097년) 송철종이 조서를 내려, 예부어사대에서 검증을 하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 옥새에 대한 감정이 시작된다.

 

원부원년(1098년)까지, 한림학사 채경등 13명의 대학문가들이 1년반의 시간을 들여 자세히 연구하여 결과를 내놓는다. 이 13명의 관리가 올린 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함양현민 단의가 바친 옥새는 색이 남빛으로 푸르고, 따스하고 윤기있으며 광택이 있다. 그 글은 '수명어천, 기수영창'이다. 그의 등(도장의 윗부분)에는 오룡방반의 이뉴가 있고, 뉴의 가운데에는 작은 구멍이 있다. 이는 끈을 끼우는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옥리수(玉螭首)가 있는데 백색고로 역시 따스하고 윤기있다. 등에는 이뉴오반이 있다. 뉴의 사이에는 역시 작은 구멍이 있다. 다만 문자는 없다. 옥새와 크기는 같다."

 

이 글의 말미에 채경등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적는다:

 

"신등은 역대정사를 고증해보고 새의 글이 '황제수창(皇帝壽昌)'인 것은 진나라옥새이고, '수명어천(受命於天)'인 것은 후위의 옥새이고, '유덕자창(有德者昌)'은 당나라옥새이며, '유덕윤창(惟德允昌)'은 석진(石晋)의 옥새입니다. 오로지 '기수영창(旣壽永昌)'만이 진나라옥새입니다. 오늘날 이 옥새를 함양고궁일대에서 얻었고, 그 옥은 남전옥의 색이며, 그 전서는 이사 소전의 풍격과 부합합니다. 용봉조어를 조각하고, 충출조적(蟲出鳥迹)의 법이다. 그것은 오늘날 전해지는 고서와 비교할 수가 없으니, 한나라이후에 만든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제 폐하가 조종의 대보를 얻어, 신새(神璽)가 스스로 나타났고, 그 글은 '수명어천, 기수영창'이니 이는 하늘이 내린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돌연 나타나겠습니까. 한진이래 보정서물(寶鼎瑞物)을 얻으면 종묘를 고치고 연호를 바꾸는데, 하물며 전국지기(傳國之器)를 얻었음에야. 보물을 받드는 예의를 시행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보면 전국옥새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정의하면서, 진짜로 단정한다. 그리고 황제에게 경축하는 대전을 열 것도 건의한다.

 

송철종은 이들 학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예부에 조서를 내려, 태상시로 하여금 '안고사상정이문(按故事詳定以聞)'하게 한다.

 

예부관리가 연구하여 의식을 거행한다. 옥새를 받기 전3일간 예부관리를 보내어 천지,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내고, 옥새를 받기 하루 전날, 철종은 내정에서 조회를 열지 않고, 하루종일 고기를 먹지 않았다. 경성의 길거리와 벽에는 눈에 띄는 벽보를 붙인다: "천수전국수명지보(天授傳國受命之寶)"

 

옥새를 맞이하는 날이 마침내 도래했다. 아침부터, 황궁내의 대경전에는 금벽휘황한 장식을 달고, 송철종은 용상에 앉아, 백관의 조하를 받는다. 단의는 몸에 황제가 친히 내린 금으로 짠 의복을 입고, 손에는 붉은 비단으로 쌓인 금궤를 들고, 채경등 13명의 문관이 뒤따르는 와중에 천천히 전각으로 나아간다. 송철종이 전국옥새를 받을 때 감탄하며 말한다: "이 전국옥새는 많은 겁난을 거쳤다. 오늘 마침내 대송의 조정에 돌아왔다. 이는 좋은 징조이다. 짐이 이 옥새를 걸치고 대대로 전해줄 것이다."

 

필자는 '가림(柯林)'이라는 네티즌이 쓴 글을 보았다. 그는 <창상세사>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민국연간에, 당시 남전현 현장이며 옥석수집이 취미인 동관문(童冠文)은 전국옥새는 분명히 오대때 풍도(馮道)가 몰래 숨겼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다만 네티즌의 이 글에는 아무런 출처가 적혀 있지 않다.

 

풍도는 후당, 후진, 후한, 후주와 요나라에서 고관을 지낸 대신이다. 자는 가도(可道)이며 영주 경성((지금의 하북성 창주) 사람이다. 당나라말기, 풍도는 유주자사 유수광의 참군을 지낸다. 유수광이 패배한 후, 풍도는 하동절도사 이극용을 모시며, 장서기가 된다. 이존욱이 즉위하자 풍도는 한림학사가 된다. 명종때는 재상이 된다. 풍도는 5개 왕조의 11명 황제를 모시면서, 장,상,삼공의 높은 직위에 있으면서, 일신을 보전했다. 말년에는 자칭 장락로(長樂老)라 한다.

 

비록 '가림'의 주장에 출처는 없지만, 필자는 호사가들을 위해서 기록으로 남겼다.

 

후당의 이종가와 조태후, 유황후는 망국때, 현무루에 올라서 불을 질러 자살한다. 그때 풍도는 중신이었다. 당폐제 이종가의 밑에서 풍고는 삼공의 하나인 사공을 지낸다. 이종가는 현무루에서 불에 타 죽는데, 그 후에 전국옥새는 어디로 갔는지를 모른다. 혹시 전국옥새를 풍도가 소장하고 있을까? 이때 더욱 대담한 견해가 동관문의 마음을 뒤흔든다. 전국옥새가 풍도의 묘에 묻혀 있지는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의문이 하나 둘 사라지면서, 구름이 걷히고 해가 보이는 것같다. 전국옥새는 풍도의 묘에 묻혀 있을 것같다.

 

원래 풍도는 형세를 관망하고, 약자를 버리고 강자를 따르며, 업적을 내는 대관료이다. 그리고 국보를 소장하고, 노모심산(老謀深算)의 사람이다. 그가 전국옥새를 숨기고 내놓지 않은 것은 아마도 이런 생각때문일 것이다. 이를 내놓더라도 그가 더 높은 관직에 오를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의 관직이 이미 충분히 높다는 것을 잘 알았다. 보물을 바치고 공을 세운다고 하더라도 더 높이 올라갈 수 없다. 그래서 숨겨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후, 이 희세진보는 그의 추악한 육체와 함께 묻혀있게 하여 천년이래의 수수께끼를 남겼다.

 

<남전현지>를 살펴보면, 거기에 진시황 전국옥새의 형제(形制)에 대하여 5가지의 서로 다른 버전이 적혀 있다.

 

첫째는 필경유본(畢景儒本)이다. 인문은 "수명지천, 황제수창(受命之天, 皇帝壽昌)"이다. 글자체는 이사의 어충전(魚蟲甸)같지 않다. 필경유본은 인문의 곁에 두 행의 설명이 있다. 그글은 <철경록>을 인용한 것인데, "혹은 새문이 '수명어천 기수영창'이라고 하고; 혹은 새문이 '수천지명, 황제수창'이라고 한다. 대체로 진나라에든 '수명지천, 황제수창'이라는 새가 있었던 것같다. 이것은 원성종이 얻은 것이 아니다."

 

둘째는 향거원본(向巨源本)이다. 인문은 "수멍어천, 기수영창(受命於天, 旣壽永昌)"이다. 그림의 곁에 역시 주석을 달았다: "석득어건지영수(石得於乾之永壽), 고척(高尺), 경삼촌이푼(徑三寸二分), 심팔촌칠푼(深八寸七分), 용칠승이홉(容七升二合). 무명지(無銘識). 안차역여여숙선생소장(按此亦呂與叔先生所藏), 고입지(故入誌)" 이 버전은 가장 주목받는 것이다. 

 

셋째는 채평중본(蔡平仲本)이다. 인문은 "수명어천, 기수영창"이다. 그림의 곁에 주석은 없다. 이 그림은 향거원본과 아주 비슷하다. 다만 인문의 전자체가 향거원본만큼 풍성하지 않고, 힘이 있지 않고, 필획이 비교적 간략하다. 마치 향거원본을 모방한 것같다.

 

넷째는 남전현지본(藍田縣誌本)이다. 필자는 청나라때 구지(舊誌)를 살펴보았는데, 방지의 책갈피에 전국옥새의 또 다른 버전이 있었다. 그래서 잠이 이를 남전현지본이라고 부른다. 그 인문을 살펴보면 필경유본을 모방하여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는 그냥 남겨놓기만 한다.

 

다섯째는 이뉴본(螭紐​本)이다. 상술한 3폭의 그림외에 남전현지에는 이뉴버전이 하나 있다. 그 그림을 보면, 오룡상교(五龍相交)라기 보가는 두 개의 음양상포의 태극도라고 하는 편이 적합할 정도이다. 그림에는 주석이 있다: "진나라의 전국옥새는 남전 수창옥으로 만들었다. 물고기, 벌레, 학, 지렁이, 교룡을 조각했는데, 모두 수생동물이다. 개략 이런 뜻인데, 수덕(水德)을 받드는 의미이다. 진나라때 남전옥을 얻어서 옥새를 만들었는데, 팔면정방에 이뉴이다. 이사에게 전문으로 새기게 했고, 이조(魚鳥)체로 새겼다. 글은 "수천지명, 황제수창"이다. 혹은 "수명어천, 기수영창'이라고도 한다. 주석글의 아래에 작을 글자도 있다. 사료의 원천은 <태평어람>의 <인새보>라는 것이다.

 

진시황의 전국옥새의 형제는 도대체 어떠했을까? 자료를 찾아보고, 여러 사람의 견해를 참조하면, 아래와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옥새의 재료는 남전옥(藍田玉)으로 만들었고, 그 크기는 고제(古制)를 따라 방사촌(方四寸)이고, 뉴교오룡(즉 리)이며 인문은 "수명어청, 기수영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