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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골동

"선덕실솔관(宣德蟋蟀罐)" 소실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19. 10. 30.

글: 홍우(洪宇)




중국역사상 귀뚜라미를 기르고(養蟋蟀), 귀뚜라미싸움을 시키는 것(鬪蟋蟀)과 같은 취미는 풍아(風雅)한 사람들이 반드시 배워야 하는 오락종류였다. 당나라 천보(天寶)연간 귀꾸라미는 관상물로서 금사롱(金絲籠)에 넣어서 베개 옆에 두었다. 그리고는 귀뚜라미의 완전(婉轉)하고 통투(通透)한 울음소리를 들었다. 송나라에 이르러, 귀뚜라미의 잘 싸우는 성격이 돌연 발견된 듯하다. 왕광귀족이든 시정백성이건 모두 귀뚜라미를 기르고, 귀뚜라미싸움을 시키는 것을 좋아했다. 민간에서는 이를 통해 도박을 걸기도 했다. 명나라 초중기에 귀뚜라미싸움이라는 오락은 여전히 성행했다. 명나라 선덕제(宣德帝)는 특히 이를 즐겼다. 사람들이 그를 '귀뚜라미황제(蟋蟀皇帝)'라고 부를 정도였다.


송나라때부터 귀뚜라미싸움을 즐기는 사람들은 귀뚜라미를 기르는 분관(盆罐)에 신경을 쓰고 연구를 했다. 명나라때의 유동(劉侗)은 <제경경물략>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당시 북경사람들은 귀뚜라미싸움을 즐겼는데, 귀꾸라미관(蟋蟀罐)을 '장군부(將軍府)'라고 불렀다. 일반 평민도 이러하니, 선덕제는 분명히 더욱 진귀한 실솔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저명한 자기분야의 고고전문가인 류신위안(劉新園)은 <명선덕관요실솔관(明宣德官窯蟋蟀罐)>이라는 책을 써서 선덕제의 실솔관에 대하여 고증하고 연구했다.


<명사>에 따르면, 선덕제는 9년 7개월간 재위했다. 위로는 홍희제(洪熙帝)가 있고, 아래로는 정통제(正統帝)가 있다. 명나라가 가장 번영하고 강성했을 시기이다. 명성조 주체가 살아 있을 때, 그는 선덕제라는 황손에 대하여 아주 좋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후세에는 이런 말도 나돈다. 선덕제의 부친인 홍희제가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선덕제 덕분이라는 것이다. 선덕제는 군정방면에 탁월한 재능을 갖추었을 뿐아니라, 여러가지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서예, 시사에 취미가 있었다. 특히 귀뚜라미를 기르고, 귀뚜라미싸움을 시키는데 푹 빠져 있었다. 윗사람이 좋아하면 아랫사람들은 그를 쫓아가는 법이다. 황제의 귀뚜라미기르고 귀뚜라미싸움을 시키는 취미를 만족시켜주기 위하여, 민간에서 대거 귀뚜라미를 잡는 외에, 귀뚜라미싸움이 크게 유행학 ㅔ된다. 경덕진(景德鎭)의 관요에서는 특별히 정교한 자기실솔관을 제작해서 공급했다.


후세의 문화재전문가들은 통계를 낸 후에 발견한다. 청나라궁중에 소장된 선덕자기 1174건중에서 대다수는 선덕제시절부터 보존되어 온 것인데, 타이페이의 고궁박물언에는 단 1개의 실솔관도 보관되어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노황제가 죽으면, 생전에 좋아하던 유물은 함께 매장하는데, 선덕제가 가장 좋아하던 실솔관은 없었다. 이는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1982년 경덕진에서 의외로 명나라때 어기창(御器廠)의 옛터가 발견된 바 있다. 작자는 경덕진에서 고고연구를 진행하는 기간동안, 어기창을 둘러싼 명나라관요에 대하여 전문적인 연구를 수행한다. 여러 잔편에서 고고작업자들이 조각을 모아보니 북모양의 관(罐)이 되었다. 나중에 감정을 거쳐 이것이 명나라 선덕연간에 만들어진 청유실솔관(靑釉蟋蟀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최초의 실솔관이 짜맞추어진 후, 연이여 여러 개의 실솔관이 짜맞추어지게 된다. 자기조각의 배후에 숨겨진 역사가 점점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작자는 여러해동안의 연구를 거쳐, 명나라때의 관요를 살펴본다. 자기의 종류는 아주 많았다. 기능으로 분류해보면 이 몇 가지이다: 첫째, 음식기류(飮食器類): 완(碗), 반(盤), 배(杯), 접(碟)등, 둘째, 제사기류(祭祀器類), 향로, 촛대, 작배(爵杯), 남등(籃燈), 두(豆)같은 류, 셋째, 진설기류(陳設器類), 화병(花甁), 관(罐)과 조소(彫塑)같은 류, 넷째, 상자기류(賞瓷器類), 소수민족 수령이나 종교지도자 및 외국사절과 외국귀족에게 하사하는 자기. 다섯째, 문방기류(文房器類), 수주(水注), 연적(硯滴), 필합(筆盒), 자연(瓷硯)등, 여섯째, 화조충어용기류(花鳥蟲魚用器類), 꽃을 심는 분발(盆鉢), 조식관(鳥食罐), 조롱(鳥籠), 화병, 어항, 실솔관, 과롱(過籠)등. 명나라때 각 시기에 만들어진 자기를 비교해보면, 우리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선덕시기의 여섯째 화조어충용기의 생산이 풍부하고 다양하다는 것을. 그 수량은 명나라에서 가장 많았다. 이를 보면 선덕제때 정치기풍이 바교적 느슨하고, 오락을 충만하게 즐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자가 열거한 경덕진의 명어기창 옛터에서 출토된 화조충어용기양식을 보면, 선덕화분, 화발류에는 백유절연평구발(白釉折沿花口鉢), 청화홍체화기화구발(靑花紅彩花棄紋花口鉢), 청화홍채절연발(靑花紅彩折沿鉢)등이 있다. 각종 화기(花器)가 14종이나 된다. 종류가 이처럼 많은 것을 보면, 보통물건까지도 이렇게 신경썼는데, 하물며 황제가 가장 좋아한 실솔관이라면 제작공법과 정교한 정도는 명나라초기 공예의 최고봉이라 할 만하다.


황제의 취미를 대신들이 밀어주기 시작하면서, 점점 국가사직의 부담으로 된다. 이 부분 내용은 명나라때의 사서에서는 감히 기록하지 못했지만, 조선의 <이조세종실록>에서 여러가지 관련기록이 발견된다. 선덕제의 취미가 백성들에게 부담을 조성했기 때문에, 당시 관청은 백성의 집을 허물고 귀뚜라미를 잡기도 하고, 태감이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하기도 했다.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비록 역사상 선덕제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지만, 선덕제는 어려서부터 자신만만했고, 자존심이 아주 강했다. 걸핏하면 그는 자신을 풍자한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감옥에 가두어, 아무도 간언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그가 태감을 시켜 전국각지 심지어 조선땅에까지 '조수화목(鳥獸花木)과 여러 진귀한 것'을 가져오게 한다. 그리고 소주지부 황종에게 밀명을 내려 귀뚜라미 천마리를 잡아바치도록 한다. 세습하는 관직을 귀뚜라미를 바친 자에게 하사하는 황당한 행위까지 있었다.


1455년 정월, 선덕제가 병사한다. 황위는 8살된 정통제 주기진(朱祁鎭)이 넘겨받는다. 조정은 태황태후 장씨와 원로중신 '삼양(三楊)'이 장악한다. 이들은 휴양생식(休養生息)을 위하여 실솔관 같은 불필요한 사치품에 대한 낭비를 감소시키고, 주기진이 완물상지(玩物喪志)하여 학업을 중단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태황태후 장씨가 명령을 내린다. "궁중의 일체 완호지물(玩好之物), 불급지무(不急之務)는 모조리 중단하고, 환관을 출장보내지 않는다." 태황태후의 이 명령에 따라, 궁중에 있던 모든 실솔관을 깨트려 부수었을 뿐아니라, 경덕진 명어기창에서 제작을 미차고 아직 진공하지 않았던 자기들까지도 모두 부수어 땅에 묻는다. 황실용품은 사인들이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후세의 소장품에서도 실솔관은 발견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선덕제 이후의 1세기여동안 다시는 관요에서 충관(蟲罐)이 생산되지 않는다. 가정, 만력연간에 이르러, 비로소 다시 소량의 청화충관과 오채충관이 나타나게 된다.


책에서, 작자는 대량의 그림을 통해 계통적으로 출토된 실솔관의 시기, 조형, 연관(年款), 청화문양등의 방면에서 선덕제때의 실솔관을 설명한다. 선덕관요에서 생산된 실솔관의 연관은 글도 아주 정교하게 썼다. 일부는 대가의 솜씨이다. 작자는 연구과정에서 명나라초기의 유명한 서예가인 심도(沈度)같은 사람도 모두 선덕제의 관요에 연관을 쓴 바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회화문양분야에서는 선덕제때의 실솔관이 정교하고 새로웠으며 주제도 다양했다. 응견문(鷹犬紋), 괴수문(怪獸紋), 연지진금문(蓮池珍禽紋)등 설계는 모두 궁정화가의 솜씨이다. 작자는 이렇게 추측한다. 선덕제는 서화를 좋아하는 황제여서 이런 것들은 아마도 친히 설계하였을 가능성도 없지가 않다.


비록 선덕제의 실솔관은 당시의 인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지만, 그 공예가치로 보면, 명나라초기 관요에서의 완물(玩物)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자들은 여기에서 '인선지치'의 태평성대의 모습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