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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골동

명나라황궁의 진귀한 수장품은 어디로 갔을까?

by 중은우시 2014. 1. 14.

글: 이주즙(李舟楫)

 

좋은 물건은 전해지는 내력이 분명하다. 전대의 대수장가는 놔두고 명나라때만 놓고 보더라도 엄숭(嚴嵩), 장거정(張居正)이 모두 최고수준의 수장가들이다.

 

이 엄숭부자를 얘기하자면 둘 다 포학지사(飽學之士)이다. 엄숭은 말할 것도 없고, 엄세번도 비록 잘생기지는 못했지만, 재능은 넘쳤다. 가정제의 거의 개발새발 쓴 글씨도 그는 한번만 보면 다 알아보았다. 엄숭은 엄세번이 말하는대로 대답해서 매번 황제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라고 여기게 만들었다. 더더구나 그 '청사(靑詞)'는 엄숭이 엄세번이 쓴 글을 베껴써, 황제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다. 그래서 엄숭은 수보(首輔)에 오른 후 20년이나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엄씨부자는 글씨도 잘 썼다. 북경의 전통점포 "육필거(六必居)"의 편액은 바로 엄숭이 쓴 것이다. 이런 수양을 지니고 있으니 그가 소장한 것은 자연히 좋은 물건일 것이다.

 

<천수빙산록>에 따르면, 몰수된 엄씨의 서화소장품은 모두 3201축(권,책)이었다고 한다. 그중에는 종요, 고개지, 색정, 왕희지부자, 우세남, 구양순, 유공권, 안진경, 회소, 오도자, 염입본, 왕유, 소식, 황정견, 미불, 구양수, 조맹부등 역대서화명가의 작품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에는 대중들이 잘 알고 있는 장택단의 <청명상하도>도 있었다.

 

명나라황제는 그런 종이조각들을 좋아하지 않아서, 엄숭의 가산이 몰수된 후 물건들을 국고에 쳐박아 둔다. 그후 다시 꺼내서 싼 가격에 팔아서 군자금을 조달했다. 심덕부의 <만력야획편>에 따르면:

 

"목묘(穆廟) 초년에 꺼내서 무관의 세록에 충당했다. 매권, 매축의 가격은 수 민(數緡)을 넘지 않았다. 당,송의 명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성국공 주씨형제가 좋은 가격으로 사들였다. 장군(長君) 희충(希忠)이 특히 많이 사들였는데, 위에 보선당(寶善堂)이라는 인기(印記)가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나중에 주(朱)가 병이 들어, 점점 강릉상(江陵相, 즉 장거정)에게 바치고, 이로 인하여 정양왕(定襄王)에 봉해진다. 얼마후 장(장거정)이 몰락하고, 다시 몰수되어 궁으로 들어간다. 몇년이 되지 않아, 창고를 관리하는 환관이 이를 훔쳐내서 팔아버린다. 일시의 호사가들 한경당태사(韓敬堂太史), 항태학묵림(項太學墨林) 같은 자들이 앞다투어 매입했고, 소장한 것은 모두 정교하고 뛰어난 작품들이었다."

 

여기서 이들 작품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궤적을 알 수 있다. 엄씨부자이후, 이들 물건은 궁으로 들어갔고, 그 후에 다시 군자금조달에 사용된다. 성국공 주희충이 아주 싼 가격으로 많이 사모았다. 나중에 대부분은 서화수집에 흥미가 있던 장거정에게 선물로 보내어진다. 주희충은 이로 인하여 정양왕에 봉해진다. 얼마후, 장거적이 죽은 후에 다시 가산이 몰수되는데, 이 물건들은 다시 궁으로 들어간다.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 셈이다. 창고를 지키는 태감은 그것을 훔쳐내어 팔았다. 한경당, 항묵림같은 호사가들이 앞다투어 구매해서 자신이 소장하게 된다.

 

어쨌든 황제는 이들 서화에 신경쓰지도 않았다. 그래서 태감들은 속속 운반공이 되어, 대내의 창고에서, 직접 개인 서재로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보면 이들 물건들이 지금까지 전해지는데 첫번째로 감사해야할 사람은 엄씨부자이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모아두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두번째 감사해야할 사람은 주희충, 장거정이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이들 물근은 무관들의 손에 들어가서 썩어문드러졌을 것이다. 세번째로 감사해야할 사람들은 태감들이다. 그것들이 벌레먹고, 흙먼지싸이며 쳐박혀 있는 것보다는 끄집어내어서 그것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기는 것이 낫다.

 

여기서 언급한 한경당 한태사는 바로 오랫동안 북경에서 관리로 있었던 소주 사람 한세능(韓世能)이다. 당시 항원변(項元)과 함께 양대 수장가로 불리웠다. 이 두 명의 걸출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명나라때에는 소주의 심주(沈周), 문징명(文徵明), 문팽(文彭), 문가(文嘉)부자가 있고, 무석(無錫)의 화씨(華氏), 안씨(安氏), 추씨(鄒氏)가 있다. 화정(華亭)의 동기창(董其昌), 주대소(朱大韶)가 있고, 송강(松江) 조경(曹涇) 양씨(楊氏)가 있고, 태창(太倉) 왕세정(王世貞), 왕세무(王世懋) 형제가 있다. 상숙(常熟)에는 유이칙(劉以則), 오강(吳江)에는 사명고(史明古), 항주(杭州)에는 동씨(董氏)등이 수장을 많이 하고 있었다. 수장의 기풍이 아주 흥성했다.

 

항원변의 생졸년(1525-1590)을 비교해보면, 1584년 장거정의 가산이 몰수될 때 그는 이미 말년이었다. 그래서 천뢰각(天籟閣)에 장거정의 물건이 있기는 해도 다수는 아니다.

 

관직이 한림학사에 머무른 한세능과 비교하면 항원변의 신분은 장삿꾼에 가깝다. 장삿꾼의 습관은 장부를 잘 기록하는 것이다. 서화의 표변(邊)이나 배후(背後)에 항원변은 소장작품의 가격을 기록해 두었다.

 

그중 왕희지의 <첨근첩(瞻近帖)>권은 가격이 가장 높아서 2천금이다; 그 다음은 회소(懷素)의 <자서첩(自敍帖)>으로 천금이다; 그 다음은 풍승소(馮承素)의 <모난정첩(摹蘭亭帖)>으로 오백오십금이다; 송나라의 탁본 <정무난정시서(定武蘭亭詩序)>는 420금이다; 가격이 가장 낮은 <송사현척독(宋四賢尺瀆)>은 겨우 6금이다.

 

명화중에서 구영(仇英)의 <한궁춘효도(漢宮春曉圖)>가 가격이 가장 높아서 200금이다; 그 다음은 조맹견(趙孟堅)의 <묵난도(墨蘭圖)>로 120금이다; 오대(五代) 황전(黃筌)의 <유당취금도(柳塘聚禽圖)>는 겨우 십량이었다.

 

오문의 각 집안에는 문징명의 <원안와설도>가 16량, 당인(당백호)의 <고산십경책>이 24냥, 구영의 <한궁춘효도>와 비교하면 형편없이 쌌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서예의 가격이 그림의 가격보다 비쌌다는 것을. 오문사가(吳門四家)중에서 구영이 가장 비쌌다는 것을.

 

그림에 가격을 적어놓는 것의 좋은 점은 일목요연하다. 사들이고 팔면서 얼마를 멀었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이 장삿꾼의 두뇌이다. 그래서 나는 항원변이 수장을 한 것은 영리적인 동기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왕희지의 <첨근첩>에 항원변은 이런 말을 적었다: "이 권은 그 가치가 이천금이다", 그의 아들은 과연 이 가격에 팔았다. 또 다른 왕희지의 <차사첩(此事帖)>에는 "이 권은 가치가 오십금에 무석 안씨로부터 얻었다", "정가 삼백금". 팔지 않을 것이면 정가를 적을 필요가 없다. 만일 삼백금에 판다면 250금을 버는 것이다. 항원변은 계산이 아주 분명했다.

 

상인이라는 상인의 일면이 있다. 항원변은 자신이 비싸게 샀다고 느끼게 되면 탄식을 하고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 그의 형인 항독수(項篤壽)가 집으로 찾아와서 묻는다. 좋은 물건을 구했느냐고. 항원변이 비싸게 샀다고 여기는 물건을 꺼낼 때면, 항독수가 항상 손바닥을 치면서 칭찬해주고, 원가로 사갔다. 이를 보면 항원변은 나이가 들어서까지도, 그렇게 버릇이 들었던 것같다.

 

수장의 수준을 논하자면, 청나라사람 전영(錢英)이 그의 <이원총화(履園叢話)>에서 이렇게 말한다: "글을 수장하는 데는 삼등급이 있다. 하나는 감상(鑑賞)이고, 둘은 호사(好事)이고, 셋은 모리(謀利)이다. 미해악(米海岳, 미불), 조송설(趙松雪, 조맹부), 문형산(文衡山), 동사옹(董思翁)은 감상을 위한 것이고, 진회지(秦會之), 가추학(賈秋壑), 엄분의(嚴分宜), 항묵림(項墨林)등은 호사를 위한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 항원변을 진회, 가사도, 엄숭과 같은 반열에 평가한 것은 그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 것이다. 항원변은 기껏해야 모리를 위한 것이다. 그는 장사를 한 것이다. 언제든지 사고 팔기 위한 것이나 혹은 고정자산으로 자손들에게 쓰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리에서 출발해서, 항원변의 수장사업은 크고 많이 해서 천하제일이 되었다. 돈을 내놓고 사는 것이기 때문에 속지 않으려면 스스로 안목을 길러야 한다. 지금까지 보존된 천뢰각의 물건들의 품질과 양으로 보면, 항원변은 자신이 안목이 있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절대 허풍이 아님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