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한국/한중관계

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의 관계

by 중은우시 2014. 7. 17.

글: 심지화(沈志華)

 

20세기의 대부분 기간동안 중국과 북한 양국은 도대체 어떤 관계였을까?

절대다수의 중국인의 인상 속에서, 1949년이래 북중관계는 중소관계와 큰 차이가 있다: 중소관계는 경계가 분명하다. 전10년간 소련 큰형님은 모든 것이 좋았다. 신문뉴스에는 찬송하는 보도만이 가득했다, 나중의 1,2십년은 중소간에 반목하고, 소련의 모든 것은 다 나빴다; 그러나 북중관계는 60여년동안 '피로 맺어진 우의'였다. 우의 이외에 다른 주장을 찾아볼 수는 없다.

현재, 중국의 북한에 대한 정책은 아주 곤란한 지경에 처했는데, 중요한 원인중 하나는 주변의 복잡한 국제관계를 연구하고 대응할 때, 한 가지 목소리만 있는 경우, 좋으면 무조건 좋고, 나쁘면 무조건 나쁠 때, 일단 의외의 사건이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과거 개략 10년간, 필자는 중국, 소련, 북한 그리고 동유럽각국의 관련 자료를 검색해보면, 현대북중관계를 연구하기 위하여 책을 썼다. 주로는 1919-1976년의 일이다.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을 심다

 

현대북중관계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분명히 해야할 것이 있다. 러시아는 10월혁명후부터 2차대전이전까지, 조선공산당 및 그와 중국공산당과의 관계이다. 현재 사람들은 조선노동당은 알고 있지만, 조선공산당은 모르고 있다. 김일성의 전기에도 조선공산당은 언급이 없다. 왜냐하면 조선공산당이 해산될 때까지 그는 입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10년 8월 22일, 일본은 <한일합병조약>을 강제로 체결시켜, 조선을 병합한다. 그후 많은 조선인들은 일본, 러시아, 중국등 주변국가로 이민을 떠난다. 일본으로 이민간 조선인들은 많은 경우 돈벌기 위해서 열심히 일했고, 정치활동에 참가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가장 활발한 것은 러시아(나중의 소련)의 극동과 시베리아지구로 간 이민자들이었다. 중국으로 이민온 조선인들도 활발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 10월혁명이 일어나고, 혁명의 조류는 이들 조선이민자들을 석권한다. 그리하여 속속 각자 공산당조직을 건설한다.

1919년 3월, 2가지 큰 사건이 벌어진다: 첫번째 사건은 "3.1운동"이다. 33명의 조선인 독립지도자들이 한성에서 공개적으로 '독립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의 주조선총독부의 강경한 진압을 받는다. 다만 이 운동은 조선독립의 붐을 불러일으킨다. 두번째 사건은 레닌이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을 만든 것이다. 원래 레닌은 유럽각국에서 혁명을 일으키고자 했다. 그러나 독일의 킬수병의거, 헝가리혁명, 폴란드진공등 일련의 혁명폭동이 모두 실패로 끝난다. 레닌은 눈길을 부득이 동방의 낙후국가로 돌리게 된다. 그곳에서만이 세계혁명이 성공할 희망이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전략방침하에, 코민테른이 성립된다. 그리고 대거 동방각국의 혁명운동을 지원한다. 여기에는 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의 건립을 창도하는 것도 포함된다. 처음에 조선공산당이 더욱 중시된다. 왜냐하면 조선공산당의 최초 인물들은 소련경내에서 활약하였기 때문이다.

초기 조선공산당에는 한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파벌이 많았고, 계파를 만들기 좋아한 것이다. 1920년을 전후하여 20개가 넘는 조선인의 공산주의조직이 성립된다. 거의 모든 지역에 다 있었다. 나중에 점점 두 갈래의 세력으로 정리된다. 중국흑룡강이북의 소련경내에서 바이칼호수를 경계로 하여 서쪽에 하나 동쪽에 하나이다. 동쪽은 적탑(赤塔)을 기지로 한 것으로 조선공산당 "적탑파"이고, 소련공산당 극동국의 지지를 받았다; 서쪽은 이르쿠츠크를 기지로 하여 소련공산당 시베리아국의 지지를 받았다. 중국의 상해에도 조선공산당 인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상해파"로 불리웠다. 코민테른 극동국이 상해에 설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상해파와 적탑파는 연합하여, "상해-적탑파"가 된다. 다만 코민테른의 정관상 요구에 따라, 각국 공산당이 가입하려면, 반드시 하나의 통일된 대표성을 지닌 당이 되어야 했고, 서로 다툴 수는 없었다. 문제는 코민테른 내부에도 파벌이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지역에 설립되어 있는 조선공산당조직에 대하여는 그 뿌리를 잘 알고, 관계도 밀접하니 자연히 더욱 신뢰하였던 것이다.

극동지국의 조선공산당원은 대다수가 소련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다. 그들도 혁명을 했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했다. 다만 내심으로는 조선독립자유를 쟁취하는 것을 더욱 주요한 분투목표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나중에 세력이 아주 큰 "적탑파"이다. 그들은 조선공산당 "상해파"와 연합하여 관계가 밀접했다. "상해파"의 초기에 가장 유명한 지도자는 이동휘(李東輝)이다. 그는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난다. 가장 만저 사회당을 조직했을 뿐아니라, 공산당도 창건했다. 그가 창건한 공산당은 최초로 코민테른이 인정한 조선공산당조직이었다. 가장 기이한 일은, 그가 저명한 조선민족주의활동가 이승만(李承晩)과 아주 관계가 밀접했다는 것이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에 성립되고,이승만이 대톨령이 되고, 이동휘는 총리가 된다. 이런 방식은 당시 중국의 국공합작과 아주 비슷하다. 레닌은 이를 특별히 높이 평가했고, 코민테른 극동국에서도 지지했다.

 

조선공산당내의 '이르쿠츠크파'는 주로 소련 시베리아지구에서 활동했다. 그들은 대부분 이미 소련국적을 취득한 조선인이다. 그들의 정치주장은 러시아공산당 볼세비키와 일치했다, 그들은 러시아공산당 볼세비키의 조선인지부인 셈이었고, 코민테른 시베리아국의 지지를 받았다. 1920-1924년 사이에, 코민테른 극동국은 시베리아국과 투쟁을 벌였고, 각각 '적탑파'와 '이르쿠츠크파'를 지지했다. 서로 조선공산당내의 소수계파를 앞다투어 흡수했고, 상부에 서로를 고발하며, 다른 일방이 간첩이라고 주장했다. 시베리아국의 조선공산당원이 극동으로 가면 극동국에서 체포하여 재판을 했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허위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들은 또한 스스로의 무장세력을 갖추고 서로 대립했다. 심지어 대규모의 유혈충돌이 발생하기까지 하였다. 1921년 6월의 한번 투쟁에서는 400여명이 죽었다.

 

이제 코민테른이 나서서 국면을 수습할 수밖에 없게 된다. 1922년 12월 코민테른은 이 두 개의 조선공산당조직을 해산하고, 조선국을 성립시킨다. 그리하여 이런 류의 투쟁을 전문적으로 처리한다. 다만 그래도 성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코민테른 내부도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코민테른은 원래 각국의 공산당이 연합한 조직이다. 그 안에는 각국의 공산당원이 있었다. 원래 자기나라사람은 자기나라이 공산당이 관리했는데, 아예 조선인은 쓰지를 않고, 카타야마 센(片山潛, 일본공산당원)과 비진스키(러시아인)으로 하여금 조선국을 주재하게 한다. 그러나, 1923년 1월 거행된 조선민족대표대회는 역시 양파(상해파가 지지하는 '개조파'와 이르쿠츠크파가 지지하는 '창조파')로 나뉘어 조선국이 분열된다. 이동휘는 조선국에서 퇴출한다고 선언한다. 이 다툼은 레닌과 트로츠키에게 미치게 된다.

 

최종 결과는 이렇다. 코민테른은 위의 모든 파벌을 공산당으로 모조리 인정하지 않는다. 코민테른의 건당원칙은: 1국1당이다. 그리고 조직은 본국에서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 만일 장기간 외국에 있으려면 반드시 현지의 공산당에 가입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조선공산당은 조선경내로 돌아가서 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코민테른 조선국본부를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긴다. 그 후에 중국만주로 가고, 다시 계속하여 조선경내로 사람을 파견하여 활동한다. 1925년 4월, 제1기 조선공산당중앙이 성리보딘다. 국내의 몇 개파와 연합하는데, '화요파'와 '북풍회'등이 있다. 이때부터 활동이 활발해지고, 모스크바의 코민테른에 보고한다. 코민테른은 그 보고에 기뻐하며 즉시 대량의 금액을 지원한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점령하에 있었고 일본경찰은 단속을 심하게 했다. 코민테른이 지원하는 돈을 운송할 방법이 없었다. 조선경내의 조선공산당조직은 일본인에 의하여 체포되고 궤멸된다. 전후로 6개월가량 존속했었다. 그후 또 다른 파의 신일들이 다시 조선공산당중앙과 조직을 건설하나, 이 조직은 더욱 단명하여 4개월만에 일본인에 의하여 체포 궤멸된다. 그후에 다시 '한성파' 'ML파'가 연이어 권력을 장악한다. 조선공산당조직이 단명한 원인은 일본경찰이 수색을 엄밀하게 한 것 이외에, 근원은 역시 조선공산당내부의 파벌간에 서로 고발한데도 있었다. 자신의 파벌이익과 명분을 위하여 정치적 적수를 팔아먹기까지 한 것이다. 이렇게 여러번 사건사고가 일어나면서, 192501928년 사이에 4번이나 조직의 지도자급이 바뀌게 된다. 그중 제3기중앙은 서기만 5번 바뀐다. 민족주의자들이 발기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사람들은 내부분열, 파벌투쟁이 역시 심각했다. 여러 명의 중요인물이 암살을 당하는데, 모두 조선민족주의자들이 한 것이었다.

 

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의 연원

 

1928년에 이르러, 내외적으로 힘든 상황하에서, 조선경내의 공산주의자들의 역량은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된다. 당시 이런 우스개가 있었다. 조선공산당중앙은 회의를 거의 감옥내에서 개최했다고. 왜냐하면 모든 중앙위원이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소수의 요행으로 도망친 사람들은 모스크바로 가서 서로 상대방을 비난했다. 누가 진실이고 누가 거짓인지 코민테른으로서도 현지조사를 해서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1928년 12월 10일, 코민테른은 다시 결정을 내린다. 이전의 조선공산당중앙과 조직은 모조리 인정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다시 건설한다. 이때 그들은 중국공산당을 생각한다.

 

조선공산당은 소련에서도 만들지 못하고, 조선에서도 만들지 못한다. 그저 중국의 동북(만주)에서만이 기회가 있었다. 그곳의 혁명역량은 아주 컸기 때문이다. 1920년대를 전후하여, 만주 전역의 조선이민은 수십만을 넘는다. 그중 혁명청년과 공산주의자가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이 조선의 공산당창건을 도와주도록 희망한다.

 

이전에, 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은 아무런 연계가 없었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중국조선의 두 공산당 간에 일찌감치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하나,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어떤 견해에 따르면, 코민테른 대표 비진스키가 상해의 진독수의 집에서 조선공산당 지도자를 만났다고 한다. 다만 이 설은 명확한 출처가 없고, 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의 양당 지도자들이 직접 만나서 회의를 한 적이 있는지 여부에 대하여 분명히 말하지도 않는다. 또 하나의 설에 따르면, 이동휘, 박진순(朴鎭淳)등 조선공산당 초기 지도자들이 진독수, 이대쇠를 만났다고 한다. 다만 이것도 소문에 불과하고 증거가 없고, 주석이 없어서, 확인할 방법이 없다.

 

현재 유일하게 확정할 수 있는 것은, 박진순이 모스크바에서 중국으로 올 때, 코민테른이 그에게 돈을 주었다는 것이고, 그중 일부분은 중국공산당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과거에 이 사건은 분명하지 않았다. 돈을 얼마나 주었는가? 엔화인가 은원인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나는 코민테른의 두 건의 보고서에서 이 일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선인이 소련에서 전후로 두번 돈을 받아간다. 한번은 500만지폐루불이고, 많은 돈도 아니고,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르쿠츠크는 그 중 절반을 떼어간다. 북경으로 와서는 다시 극동공화국(1920년 4월 성립, 명목상 독립이나 실제는 소련의 통제를 받음. 소련과 블라디보스톡에 진주한 일본간의 완충지대, 1922년 11월 소련에 병합됨)의 주중국대표가 다시 절반을 떼어간다. 진정 상해에 도착했을 때는 겨우 총액의 1/4만 남았다; 두번재는 40만황금루불이다. 이것은 상당한 돈이다. 서로 다른 사람이 나누어 가지고 갔다. 어떤 사람은 가는 길에 실종되고, 휴대한 현금도 행방불명이 된다. 최종적으로 상해에서 중국대양으로 바꾸는데 합계 25만여대양(大洋)이 된다. 그 당시로서는 큰 돈이었다. 이를 보면 코민테른이 전력을 다하여 조선공산당을 지지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보고서에서는 그 25만여 대양중 1만500대양을 진독수에게 주고, 2만대양을 일본공산당에 주었으며, 나머지 돈은 조선공산당 자신이 썼다고 한다.

 

당시에 이런 소문이 있었다. 조선공산당 지도자 이동휘는 이 돈을 가지고 상해에서 저택을 샀다. 그의 비서인 김입용(金立用)은 첩을 들인다. 이 동휘는 이와 관련하여 두번이나 코민테른에 서면으로 특별히 보고를 한다. 다만 이 두 가지 의문점은 보고서로도 명확히 해명되지 않는다. 첫째, 그 1만500대양은 코민테른이 중국공산당에 대리전달하게 한 것인가? 아니면 조선공산당이 스스로 준 것인가? 필자으 판단은 코민테른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다; 둘째, 이 돈을 진독수에게 주었는가? 필자는 여러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관련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단지 나중에 왕약비(王若飛)가 연안에서 이 일을 언급한 적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건국초기 조선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의 유일한 연계이다.

 

1925년이후, 일부 조선공산당원은 중국경내로 옮겨온다. 체포를 피하기 위하여 상해로 와서 조선공산당 해외국을 만든다. 다만 그들은 조선공산당 국내중앙의 승인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코민테른은 국외에 조직을 설립할 수 없도록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처지는 아주 난감해진다. 사적으로 협의하여, 직접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자고 하게 된다. 마침 중국공산당 강소성위가 법남(상해프랑스조계와 남시지구)지위(支委)를 설립하면서 그들을 받아들여, "중공상해한인지부"를 설립한다. 그들은 평소에는 독립활동을 하였고, 존재했던 기간도 길지 않았다. 1932년을 전후하여 해산된다.

 

당시에는 한 가지 분명한 현상이 있었다. 많은 조선인들이 직접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것이다. 이들은 나중에 아주 유명해진다. 예를 들어, 무정(武亭)은 보정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광주의거에 참가한 적이 있고, 강서소비에트지구에서 중앙홍군 작전부에 들어가고, 장정에도 참가한다. 항일전쟁시기에 팔로군총부참모를 맡는다. 나중에 조선의용군사령관이 된다. 그는 특별히 중국공산당 고위층으로부터 중시받으며 특히 팽덕회와의 관계가 아주 좋았다. 한국전쟁기간동안, 조선인민군 군장, 포병사령관등의 직위를 맡는다. 그리고 양림(楊林)이 있다. 운남 강무당을 졸업하고, 일찌기 황포군관학교 교관이 된다. 나중에 강서소비에트지구로 들어가 홍15군단사참모장을 맡는다. 섬북까지 장정을 하고 얼마 지난 후 전투중에 희생당한다.

 

당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사람으로는 김산(金山), 이철부(李鐵夫)등도 있다. 김산은 1929년 중공북경시위 조직부장을 맡은 적이 있고, 이철부는 1936년 중공 천진시위서기를 맡아, 유소기가 주재하는 중공 북방국의 지휘를 받았다. 중공당사를 잘 아는 사람이면 알고 있을 것이다. 1930년대초기에 '철부노선'을 비판한 기록이 있는데, 기실 그는 조선인이었다.

 

다만, 이들은 조선공산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때 중국공산당은 당원의 국적은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 "2차대전'이 끝난 이후에 비로소 관련 규정을 두게 된다. 이전에 코민테른은 국적을 따지지 않았던 것이다. 모두 형제라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1928년말까지, 중국조선 양국의 공산당간에는 특별한 관계가 없었다. 그후에 사전은 돌연 변화한다.

 

첫번째 '융합'

 

1929년에서 1931년 "9.18사변"까지, 다시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중국조선의 두 공산당관계는 제2단계라 할 수 있다. 이 기간동안 발생한 일들은 아주 재미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27년 4월, 중국의 국공양당합작이 공개적으로 파열된다. 중공당원은 관내 특히 상해등 대도시에 있기 힘들게 된다. 중공중앙정치국은 회의를 열어 분석한 결과 동북지방이 괜찮고 군중의 혁명정서가 고양되어 있다고 판단한다. 동북의 중국현지백성은 착실한 편이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현상에 만족하지 않고 불만 붙여주면 폭발할 상황이었다. 1927년에서 1929년까지의 기간동안, 중공은 만주의 당원이 겨우 1,2백명에 불과했고, 십여개 지부로 나뉘어 있어서, 적지 않은 지부는 '단독서기' 한 사람뿐이었다. 그들은 자주 상부에 보고하여, 현지의 조선공산당원을 충분히 이용하자고 건의한다. 그래서, 중공중앙은 진위인(陳爲人), 유소기등을 보내어 공작한다. 당시 조선공산당은 만주에 2000여명의 당원이 있었고 단원 및 적극분자도 수만명이 있었다. 중공중앙은 유소기 등에게 임무를 내린다. 즉, 이들 혁명역량을 쟁취해오라는 것이다. 그때 코민테른은 그저 중공에게 조선공산당의 건당을 지원하라고만 했고, 아직 조선공산당원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키는 것까지는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필자가 본 회고록에 따르면 중공이 정식으로 관련 통지를 하달한 것은 1930년 5월경이다.

 

1926년 4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성립되었고 나중에 3개의 총국으로 분열된다. "화요파" "ML파" 및 "한상파(漢上派, 한성-상해)"는 각자 자신의 당조직을 건립했다. 1928년말 코민테른은 더 이상 조선공산당을 승인하지않는다고 선언하여, 그들은 큰 타격을 받는다. 중공간부가 동북에 도착하고 나서, 그들과 각각 접촉하여 쟁취하는 공작을 벌인다. 'ML파'는 스스로 기반이 단단하지 못하여 독자생존이 어렵다고 보고, 즉시 해산을 선언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이것은 1930년 3월의 일이다. 이렇게 되자 코민테른이 관여하게 된다. 5월 18일 결의를 하여, 첫째, 만주의 조선공산당은 일률적으로 중국공산당이 관장한다. 그들의 조직과 인원은 중국공산당에 넘긴다. 둘째, 중국공산당이 조선공산당 건당을 도와준다고 결정한다.

 

중국공산당도 자신의 생각이 있었다. 그들은 주로 전면적으로 조선공산당을 흡수하여 개편하고자 한다. 이들 조선인의 역량으로 중국혁명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 그들은 조선공산당의 해산을 요구했고, 당원은 개인신분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도록 했다. 이는 코민테른의 최초 생각과 확실히 달랐다. 코민테른의 결의는 직접 '화요파' 만주총국이 해산선포를 불러온다. '한상파'는 여전히 견지했으나 나중에 협상을 계속하였다. 조선공산당은 전체로 가입하고자 했고, 만주는 그들의 활동기반이며 단지 중국공산당의 영도를 받는 것으로 하고자 했다. 다만 중국공산당측의 태도는 강경했고, '하나도 남겨두지 않는다'는 원칙을 견지했다.

 

중곡측의 협상에서의 우위는 명백했다: 나는 코민테른 지부이다. 너희는 조선공산당의 조직이다. 하나도도 합법적인 것이 없다. 그리고 모두 중국경내에서 활동한다. 1개월여의 밀고당기는 협상을 거쳐 7월에 이르러, '한상파'도 해산한다.

 

1930년 여름, 조선공산당의 만주 각파는 어쩔 수 없이 해산을 선언하고, 당원들은 새로 중국공산당에 가입신청한다. 구체적인 방법은, 공농기층당원은 예비기간이 필요없고, 어느 일파의 보통당원은 반년의 예비기간이 있고, 당내간부는 1년을 두었다. 이러한 조치의 목적은, 조선공산당의 원래 파벌이 중국공산당내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엄격히 막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하자, 중국공산다으이 동북에서의 역량은 신속히 발전하게 된다. 1931년 당원은 이미 2000여명에 달한다. 주보중(周保中)의 회고에 따르면, 1930년대초기 중국동북지구의 현위서기와 구위서기는 거의 모두 조선인들이 맡았다. 이와 동시에, 중공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는 것을 도우는 임무를 맡았다. 다만 나중에 발생한 "9.18사변"으로 이 공작은 중단된다.

 

이 과정에서, 원로급 조선공산당원들은 거의 전부 떠나서 소련으로 간다. 그들의 처지는 아주 비참했다. 마침 스탈린의 숙청운동이 시작되어 대숙청당한다. 그 결과 모조리 죽게 된다. 최근 들어 러시아에서는 당시 피해를 입은 조선공산당지도자들의 명단을 발표했다. 이동휘가 병사한 외에, 나머지 박진순, 한명세(韓明世), 남방춘(南方春)등은 어느 파이건 불문하고 모조리 일본간첩으로 몰려 총상당했다.

 

이들은 일본경찰의 체포를 피했는데, 소련비밀경찰의 숙청은 피하지 못한 것이다. 잔존한 일부 초기 조선공산당원과 혁명역량은 거의 소진되고, 일대인들의 분투는 이렇게 끝이 난다.

 

1931-1932년, 즉 "9.18사변"을 전후하여, 동북의 반일정서는 고양된다. 새로운 조선혁명역량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들은 대부분 18,9세, 20세가량의 젊은이들이었다. 당시 중공에 가입한 사람은 거의 모두 이런 사람들이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김일성(金日成)이다.

 

"큰형님"이 '막내동생'을 이끌어주다.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원래의 동북인민혁명군) 출신이다. 그가 새로운 세대의 조선공산당원중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은 것도 있고, 그 자신이 총명하고 지혜로운 것과도 관련이 있다. 김일성은 초기에 중국의 학교를 다녔다. 중국어를 아주 잘했다. 항일연군에 있ㅇ르 때 한족들은 조선어를 몰랐고, 대부분의 조선인은 중국어를 몰랐다. 그래서 쌍방의 의사소통이 어려웠는데, 여기서 김일성이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나이가 젊었지만, 직위는 빠르게 승진한다.

 

1938-1939년 사이에, 항일연군은 일본군의 강력한 진압과 토벌을 당한다. 생존이 갈수록 어려워진다. 부득이 시시때때로 소련쪽의 국경을 넘어가야만 했다. 이전에 소련인들의 월경하는 항일인사들에 대한 태도는 이러했다: 건너오면 모조리 무기를 반납시키고, 기차칸에 집어넣고, 시베리아철로를 타고 직접 신강으로 보냈다. 스탈린이 이 방법을 쓴 것은 중,일 양측에 모두 욕먹지 않기 위함이다. 만일 항일연군을 잘먹이고 잘 재워서 다시 중국으로 돌려보내 일본인들과 싸우게 하면, 일본인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원래 스탈린은 소련-독일국경에서 시시때때로 히틀러와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본이 뒤에서 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중국인들이 비난하도록 놔둘 수도 없었다. 그는 중국이 동부전선에서 일본을 막아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소련을 대신하여 후방이 안전하도록 해주기 원했다. 그래서 직접 신강군벌 성세재(盛世才)에게로 보내버린 것이다. 성세재는 스탈린과 관계가 아주 좋았다. 일찌기 소련공산당에 가입신청한 적도 있었다. 적화(迪化)에는 팔로군판사처도 있다. 항일연군의 전사들을 그쪽으로 보내주는 것은 중국인에게 돌려주는 것과 같았다.

 

다만 1939년이 되면서, 소련인들의 월경전사에 대한 태도가 돌연 크게 바뀐다. 잘 먹이고 잘 대접했을 뿐아니라, 돈까지 주고, 군복, 장비까지 주었다. 나중에는 88여단을 성립하고 여단장에게는 중령계급을 부여한다. 왜 그랬을까? 원래, 소련의 극동군구 정보처처장인 류시코프가 배반하고 도망친 것이다. 류시코프는 모스크바에 있는 친구가 전화를 걸어 이번 숙청대상자 명단에 너의 이름이 있다고 말하자, 그는 어쩔 줄을 몰라 허둥거리다가 바로 훈춘으로 도망을 쳐서 일본관동군에 투항한다. 관동군은 의외의 수확에 기뻐했다. 그는 소련 극동군구의 간첩두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급히 그에게 필요한게 뭐냐고 묻는다. 류시코프는 처자식이 모스크바에 있으니, 그들을 데려오게 도와달라고 한다. 결국 관동군은 온갖 방법을 써서 이 일을 성공시킨다. 류시코프가 입만 열만 하룻밤이면 소련극동지구의 정보망은 일망타진될 터였다.

 

소련내무부를 책임지는 베리야는 급히 극동군구에 전보를 보내어, 현재 동북연군을 이용하여 그 빈틈을 메울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때 마침 동북항일연군을 지휘하던 중공당원 양정우, 주보중은 북상하여 중공중앙과의 연결이 끊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아주 초초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중공주모스크바 코민테른 판사처의 왕명, 강생등과 연락하고자 한다. 소련인들은 그들을 속였다. 너희 중앙에서 사람을 극동으로 파견해왔다. 너희 각로군의 지도자들은 하바로프스크에서 회의를 연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백력회의(伯力會議, 백력은 하바로프스크의 중국명칭)'이다. 나중에 항일연군부대는 국경선을 넘어 소련극동에 모인다. 소련인들은 그들이 다시 국내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는다. 하루종일 전사들에게 전보를 보내는 법, 낙하산을 타는 법, 사격, 암살 및 스키타는 법을 가르친다. 88여단은 보병여단이지만, 기실 특수부대, 특수부대원으로 훈련시켰다. 바로 이때 김일성은 다시 한번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가진다.

 

그 때, 항일연군 제2로총사령관 주보중, 제3로 총사령관 조상지(趙尙志)가 모두 온다. 오직 1로군총사령관 양정우(楊靖宇)만이 일본군에 포위되어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순국한다. 정위(政委)인 위증민(魏拯民)은 실종된다. 1로군은 군룡무수의 상태가 된다. 김일성은 1로군에 예속되어 있었다.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온 후에 붙잡힌다. 소련인은 항일연군지도자들과 회의를 하면서 1로군에서 온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주보중은 김일성을 언급하면서, 그가 괜찮다고 말해준다. 그로 하여금 1로군을 대표하게 한 것이다. 당시 김일성은 아직 젊었다. 30살도 되지 않았다. 그는 아주 솔직했고, 소련인들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그는 자신이 기실 1로군지도자가 아니며, 그들이 모두 없어서, 본인이 잠시 상황을 소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때부터 소련은 김일성을 중시한다. 러시아의 자료를 보면 김일성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하고 있었다: 비교적 활발하고 러시아어도 잘 배운다. 조선인들 중에서 영향력이 있다. 항전승리시, 주보중은 원래 부대를 이끌고 대일작전에 참가하고자 팔로군과 회합하고자 했으나, 소련이 동의하지 않는다. 스탈린은 그 때 동북을 국민정부에 넘겨주었고, 88여단을 해산하여 각각 중국, 조선 2개 공작단을 만든다. 중국동북과 조선의 소련점령군을 협조하여 지방의 질서를 유지하게 한다. 김일성은 조선공작단의 단장이 되어 60여명을 이끌고, 1945년 9월 조선으로 귀국한다.

 

여기에서 또 다른 일파를 소개하도록 하자. 초기에 중공에 참가한 무정 등의 사람은 1927년 혁명실패후, 중국내지의 많은 조선인들이 동북으로 간다. 다만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은 직접 중국공산당에 참가한다. 특히 항전발발후, 적지 않은 사람은 연안으로 간다. 예를 들어, 박일우(朴一禹, 나중에 중국조선연합군의 부사령관이 됨), 서휘(徐輝, 나중에 북한의 내무상이 됨), 방호산(方虎山, 4야 166사단 정위), 이덕산(李德山, 4야 164사단 부사단장), 이향조(李向朝, 북한주소련대사), 최창익(崔昌益, 북한내각부수상)등등이 있다. 그리고 국민당지부에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1938년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조선의용대의 성립을 요구한다. 장개석이 이를 승인하고 돈을 준다. 그들은 겨우 수백명이었는데, 선전과 정보업무를 했다. 항전초기 국공합작때, 주은래도 중공을 대표하여 의용대의 무한에서의 성립의식에 참가한다. 1941년초 환남사변(皖南事變)이 발생하고, 국공이 분열된다. 이들중 조선공산당 당원들은 중공과 연락하여 주력부대를 화북으로 끌고 와서 팔로군의 지휘하에 조선인부대가 된다. 그리고 이름을 조선의용군이라 바꾼다. 또한 정치조직을 구성하여 조선독립동맹이라 한다. 그들은 김일성과 달랐다. 중공의 영도하에 연안으로 가서 국제종대가 되어 야판참삼(野坂參三)의 일본반전동맹과 마찬가지로 국제우인(國際友人)에 속한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동북에 출병하여 일본관동군을 공격한다. 모택동, 주덕은 조선의용군에게 귀국하도록 지시한다. 조선혁명에 그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팔로군, 신4군 및 중공의 각 지방무장부대에서 모두 수천명의 조선인들이 집결한다. 그리고 보무당당하게 심양으로 간다. 다만 그들은 불리한 소식을 듣는다. 압록강을 건널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련인들이 진입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원래 이때 소련,미국의 양대국은 38선을 사이에 두고 조선을 반으로 갈랐다. 어떤 외부의 무장세력도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의용군의 선발대는 막 압록강을 건넜는데, 소련점령군은 무장해제시키고 이렇게 통보한다: 너희가 와서 혁명할 필요가 없다. 중국으로 돌아가거나 무기를 놓고 일반백성이 되어라. 이들은 상의한 후에 혁명을 계속 하겠다고 하여 다시 중국경내로 돌아온다. 그때가 1945년 11월이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동북에서 내전이 일어났고, 임표는 싸울 부대원이 부족했다. 그리하여 그들을 다시 동북민주연군에 받아들인다. 점차 해방군 4야부대내의 조선족부대로 되어, 4만명까지 늘어난다. 1949년 여름과 1950년 연초 그들은 2차로 나누어 귀국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남한을 공격하는 주력부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