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1950년 10월 상순과 중순, 북한은 위기일발에 처한다. 10여일동안 중공중앙은 다시 회의를 개최하여 반복하여 토론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러가지 곤란한 점을 들어 출병하지 말 것을 주장한다. 소련은 공군을 출동하는 문제에서 계속하여 소극적인 태도를 나타낸다(처음에는 3개월내에 출동할 수 없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비행기가 압록강을 건너갈 수 없다고 하였다). 모택동은 여러날동안 잠도 자지 않고 휴식도 취하지 못하면서 고민했다. 일찌기 2번이나 북한에 진입한 군대에게 잠시 군사행동을 중지할 것을 명령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해관계를 따져본 후에 최종적으로, "우리는 참전해야 한다. 반드시 참전해야 한다. 참전하면 이익이 극대화되고, 참전하지 않으면 손해가 극대화된다."고 확정한다.
1951년 11월 3일, 축가정(竺可楨)은 중남해 회인당의 정무원 제109차정무회의에 참석한다. 그날의 일기를 보면, 축가정은 주은래가 한국전쟁 군비(軍費)에 관해 보고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오후 3시 109차 정부회의를 개최하였다. 회인당대청. 주총리보고,.....말하기를 1950년 적자 12%, 1951년 비록 항미원조(한국전쟁)가 있어, 군비는 52%증가(항미원조 31%)하였지만 적자는 14%에 불과했다"
오랫동안, 한국전쟁의 전쟁비용은 완전히 정산된 문제가 아니었다. 비교젹 자주 보이는 의견은 이러했다: "한국전쟁의 비용은 당시 중국의 국민경제총량과 비교하면 그 총량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한국전쟁의 비용은 같은 기간 재정지출의 10분의 1을 차지했다."
도모검(陶慕劍)의 <항미원조군비는 당시 중국GDP의 3.5%를 차지했다>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항미원조3년의 직접군비는 62억위안이다. 그외에 30억위안은 소련에서 무기를 수입한 외채이다. 1952년, 1953년 신중국의 GDP는 각각 679억위안과 824억위안이었다. 군비는 각각 58억위안과 75억위안이었다. 군비는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각각 8.52%와 9.15%였다. 이런 방법으로 추산하면 한국전쟁의 총군사비용은 당시 GDP에서 겨우 3.5%가량을 차지했다."
이상의 의견은 비록 각종 '통계수치'를 인용했지만, 권위있는 사료와의 사이에서는 여전히 적지 않은 충돌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1952년 8월 4일, 모택동은 정협회의상의 강화에서 명확히 언급한 바 있다: "작년 항미원조전쟁의 비용과 국내건설의 비용은 대체로 비슷하다, 절반 절반이다. 금년은 다르다. 전쟁비용이 작년의 절반일 것이다. 현재 우리의 부대는 감소했다. 다만 장비는 강화되었다."
모택동은 계속해서 싸우면 미국에 불리하고, 중국에 유리하다고 말했다. 그 이유중 하나는, "돈을 써야 한다. 그들(미국)은 1년에 100여억달러를 쓴다. 우리가 쓰는 돈은 그들보다 훨씬 적다. 금년은 작년보다 다시 절반이 줄었다. '삼반(三反)' '오반(五反)'으로 정리한 돈으로 1년반은 더 싸울 수 있다. 생산을 늘이고 절약한 돈으로 국내건설에 완전히 쓸 수 있다."
모택동의 담화에서 말한 것이나, 축가정이 기록한 주은래가 제공한 수치를 보면, 1951년, 항미원조군비는 전체 국가재정지출의 31%를 차지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신뢰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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