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방)

유방은 천하통일에 성공하고, 유비는 실패한 이유는?

중은우시 2014. 7. 17. 23:39

글: 복녕객(福寧客)

 

유방이 누구인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 것이다. 유비는 누구인가? 역시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 것이다. 대한왕조의 개국군주로서 유방의 역사적 공적은 유비보다 훨씬 크다. 경전적인 명저 <삼국연의>의 주인공중 하나로서, 유비의 명성은 확실히 유방을 넘어선다. 비록 이 둘 간에는 4백여년의 시간적 간격이 있지만, 유방의 적손인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인 유비의 초창기 성격, 기호, 지향 그리고 경제상황은 그의 조상 유방과 꼭 닮았다.

 

유방은 일찌기 정장을 지낸다. 이것은 아주 하급관리이다. 대체로 인민공사 시기의 대대대장(몇개의 촌으로 구성됨)에 비슷할 것이다. 이처럼 형편없는 지위의 공무원이다보니 급여도 형편없었다. 그러나 그는 잘 먹고 일에는 게을렀다. 술도 좋아하고 여자도 밝혔다. 그래서 집안은 가난해서 아무 것도 없었으며 겨우 비바람만 가릴 정도였다. 그가 가장 좋아한 것은 술과 여자를 제외하고 또 하나가 있었으니 그것은 친구를 사귀는 것이었다. 깡패이건 정부의 관리이건 그는 모두 사귀었다. 흑도백도에 모두 통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한번은 유방이 출장을 갔다가 진시황이 행차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는 마음 속으로 선망하면서 한 마디 고금을 감짝 놀라게 할 찬탄을 내뱉는다: "대장부라면 마땅히 저래야지." 아마도 그때부터 그는 큰 사업을 할 생각을 품었을 것이다.

 

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유비도 소년시기 부친을 잃고, 짚신을 만들고, 돗자리를 만들어 생활을 유지했다. 15살때 비로소 숙부인 유원기의 자금지원을 받아 글을 배우고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유비는 '열심히 공부하여 매일 향상하는데'는 신경쓰지 않고 놀기를 좋아하고, 하루종일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놀았다. 유원기는 그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저 탄식할 뿐이었다. 그러나, 유비는 더욱 높은 지향을 지녔다. 그는 친구들과 놀 때 자주 집 동남쪽에 있는 큰 상수(桑樹)를 가리키며, 그가 어른이 된 후에 반드시 저 뽕나무같은 '우보개차(羽葆蓋車, 고대에는 황제가 타던 가마임)를 타겠다고 말했다.

 

비록 유방과 유비는 모두 웅심장지를 지녔고, 가슴속에 호기로운 정을 춤었지만, 그들이 선택한 정치적 방향은 완전히 달랐다. 유방이 갔던 길은 '반란파'의 혁명의 길이었다.

 

진나라말기인 기원전209년, 진승, 오광이 깃발을 들고 '장초'정권을 세운다. 유방은 패현에서 현령을 죽이고 거병하여 이에 호응한다. 모두 그를 '패공'이라고 불렀다. 그는 현지의 청년들을 가입시켜, 금방 3천명을 모은다. 나중에 이 인원은 항량(항우의 숙부)의 조직과 합쳐서 공동으로 초회왕의 손자 웅심을 새로운 초회왕으로 모신다. 기원전206년 8월, 유방은 군대를 이끌고 관중을 함락시킨다. 진왕 자영은 나와서 항복한다. 이렇게 진나라가 멸망한다. 얼마후 병력이 유방보다 훨씬 많은 항우가 병력을 이끌고 와서 관중을 넘겨받고, 거의 전국의 모든 영토를 장악한다. 나중에 항우는 스스로 서초패왕이 되고, 유방은 한왕에 봉한다. 그로 하여금 파촉과 한중일대를 다스리게 보낸다.

 

그러나 유비가 걸었던 길은 말 그대로 '보황파'의 길이다.

 

동한말기, 조정이 부패하고, 황건적이 난을 일으켜 천하는 대란에 빠진다. 184년, 유비는 말장사하는 친구가 보태준 돈을 가기고 2,3백명의 병력을 모은다. 그후에 병력을 이끌고 교위 추정(鄒靖)에게 의탁하여 황건적을 진압한다. 황건적이 진압된 후, 유비는 전공으로 안희현위(安喜縣尉)가 된다. 안희는 지금의 하북성 정현 동남쪽이고, 현위는 부현장에 해당한다. 그는 현의 치안과 감옥을 관장한다. 더욱 발전하기 위하여, 유비는 원소, 조조, 유표등에게 차례로 의탁하고, 마지막에는 손권과 연합하여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물리친다. 그리하여 형주에 기반을 마련한다. 214년, 서쪽으로 발전한 유비는 대군을 이끌고 성도를 평화적으로 접수하고, 익주목이 된다. 그의 조상 유방과 마찬가지로 파촉지구의 통치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금방 조조의 손에서 한중을 탈취한다.

 

역사는 다시 유방과 유비를 같은 십자로에 데려간다. 그렇다면 결말은 왜 서로 달랐을까?

 

파촉에서 기반을 안정적으로 다진 후, 유방은 한신의 '명수잔도, 암도진창'의 계책을 받아들여 관중지구를 쳐서 차지한다. 이어서, 그의 군대는 수량이 늘어나고, 강해진다. 영토도 갈수록 넓어진다. 마지막에는 강퍅자용한 항우를 오강의 가로 몰아넣는다. 항우는 일패도지하고, 검을 뽑아 자결한다. 유방은 중국의 절대다수의 지역을 통일한다(당시 양광지구는 아직 남월국이 있엇고, 나중에 중앙정부에 귀순한다). 당시 진시황을 흠모했던 하급관리 정장은 진짜 면남배북, 칭고도과(稱孤道寡)하는 황제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해한의 4백년강산을 열었다. 진시황의 단명왕조보다는 훨씬 강했다.

 

제갈량의 '융중대'에서 그린 청사진에 따라, 유비도 촉지를 벗어나서 장안으로 향한다. 이어서 중원을 휩쓸어 천하를 통일하고자 했다. 아쉽게도 시운이 따르지 않아 유비는 이릉지전때 패배한 후 백제성에서 병사한다. 이 중임을 충성스러운 제갈량에게 맡긴다. 제갈량은 육출기산하고, 그의 후계자인 강유는 이를 이어 구벌중원한다. 비록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세월이 바뀌면서 위나라의 실력은 이미 촉한을 훨씬 넘어서 있었다. 촉국의 황제는 능력없는 아두였다. 그래서 결국은 일장춘몽이 되고 세상에는 유감만 남긴다.

 

유방, 유비의 초창기는 비슷하다. 그러나 나중에는 한 명은 반란을 한 명은 보황을 선택한다. 길은 달랐지만 다시 둘은 같이 파촉의 땅을 차지한다. 두 사람은 모두 관중으로 진격했고, 천하통일할 뜻을 가졌다. 그러나 전자는 큰 뜻을 이루어, '위가해내혜귀고향(威加海內兮歸故鄕), 안적맹사혜수사방(安的猛士兮守四方)"할 수 있었고, 후자는 '유한실탄오(遺恨失呑吳)'하고 영안궁에서 붕어한다. 그 차이는 후인들이 깊이 음미할만한 것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