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방)

유방이 이성왕(異姓王)을 제거할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by 중은우시 2017. 1. 28.

글: 유병광(劉秉光)

 

천하를 빼앗는 것과 천하를 다스리는 건 서로 다른 일이다. 창업할 때는 군주가 될 자라면 부하들이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야 하므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다 해준다. 모두가 겉으로 볼 때는 화목하고 단결하며 그럭저럭 잘 지낸다; 그러나 수성할 때는 군주가 되는 자라면 천하를 자기 집안으로 여겨야 한다. 외인들은 잠재적인 위협이 되므로 죽일 수 있으면 죽이고, 제거할 수 있으면 제거해야 한다. 유방이 바로 그러했던 예이다.

 

황제를 칭하기 전에, 유방은 몇몇 이성왕을 차례로 봉한다: 황제를 칭한 후, 유방은 다시 8명의 이성 제후왕을 다시 정하고 분봉한다. 그들은 바로 제왕한신(齊王韓信), 한왕한신(韓王韓信, 韓王信), 연왕장도(燕王臧荼), 연왕노관(燕王盧綰), 양왕팽월(梁王彭越), 조왕장이(趙王張耳), 회남왕영포(淮南王英布), 장사왕오예(長沙王吳芮). 그중 장이는 유방이 황제를 칭하는 해에 사망하여, 아들인 장오(張敖)가 조왕을 승계했다. 그렇다면 이 8명의 이성왕의 최후는 어떠했을까?

 

한신은 공고진주(功高震主)의 상황이었다. 먼저 강등되어 회음후(淮陰侯)가 되었다가 나중에 계책에 걸려 피살당한다; 한왕신은 시기를 받아 흉노에 투항한다; 팽월, 영포, 장도는 모반으로 피살당한다; 장오는 연루되어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중에 열후(列侯)로 강등당한다; 노관은 반란으로 흉노에서 죽는다. 8명의 이성왕중 장사왕 오예만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봉지, 군대를 반환하고 사전에 은퇴하여, 유방의 시기를 받지 않는다. 유방은 "장사왕은 충성스럽다"고 말하며 깊이 신뢰한다.

 

기원전201년가을, 오예는 수종정침(壽終正寢)한다. 그후 아들과 손자가 왕위를 승계하여, 장사국은 모두 5대까지 이어진다. 오예가 선종(善終)하고 장사국이 오래 존속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한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에전에 한고조가 천하를 평정하고, 공신인 이성으로 왕이 된 자가 8개 나라였다. 장이, 오예, 팽월, 경포(영포), 장도, 노관과 두 한신이다. 모두 일시의 권력욕으로 영토를 나누어 남면칭고하여, 의심이 커지니 스스로 불안해 하다가 궁박해지니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가 결국은 망한다. 장이는 지혜로 보전하였으나 아들에 이르러 역시 나라를 잃는다. 오로지 오예부터 정도를 잃지 아니하여 5대에 전해질 수 있었다."

 

오예가 죽은 후, 장사의 성북쪽에 지하에 묻힌다. 그러나 그의 전설은 4백여년후에 다시 재연된다. 삼국시대에 위, 촉, 오 삼국은 서로 싸우면서 묘를 발굴하는 현상이 아주 두드러졌다. 반고의 <후한서>, 곽반의 <위진세어> 및 <태평어람>등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조위의 황초말년(226년), 동오는 장사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누군가 오예의 묘를 발굴한다. 그리고 그의 관목을 가지고 손권의 부친 손견의 사당(廟)을 세운다.

 

묘를 파헤쳤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오예 시신의 용모와 의복은 살아있을 때같았다." 금방 죽은 사람같았다는 것이다. 400여년이 지났을메도,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경탄을 금치 못하고 인상이 깊었다. 40년후, 당시 오예묘의 발굴에 참여했던 한 노인이 안휘 수춘에서 한 사람을 만나는데 깜짝 놀라고 만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오예와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마치 오예가 "부활"한 것같았다. 단지 키가 오예보다 약간 작았다.

 

노인은 그 사람을 붙잡아 끌고서 당신은 장사왕 오예와 똑같이 생겼는데 도대체 무슨 관계인지 묻는다. 그러자 그가 대답한다. 자신은 오강(吳綱)이며, 오예의 후손이라고, 오예는 자신의 16대선조라고. 노인은 예전에 오예의 묘를 발굴했을 때의 상황을 오강에게 말해준다. 오강은 그 말을 듣고, 급히 오예를 다시 잘 묻어주었는지 물어본다. 노인은 당시에 잘 안치했다고 말하니, 오강은 그제서야 안심한다. 사람의 유전인자는 이렇게 영향을 크게 미친다. 오예가 바로 그 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