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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방)

유방(劉邦)과 한중(漢中)

by 중은우시 2014. 1. 29.

글: 가운봉(賈雲峰)

 

 

 

기원전206년, 한때 유계(劉季)로 불리웠던 유방은 왕이 된다. 한왕 유방은 남정(南鄭, 지금의 한중시 한대구)를 도읍으로 정하고, 봉지는 진령이남의 파(巴), 촉(蜀), 한중(漢中)의 3군지지(三郡之地)이다.

 

유방이 부대를 이끌고 한중에 들어가기 전에 모사 장량은 그에게 "잔도를 불태우라"는 계책을 남기고, 따로 왕에 봉해진 한왕(韓王)을 보필하러 떠난다. 한중에 도착한 후, 관중왕(關中王)을 눈앞에서 놓치고, 죽음에서 겨우 벗어나, 궁벽진 곳으로 흘러들어가게 된 유방은 마음 속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울적했고, 기운을 잃는다. 항우의 조치에 대하여 불만에 가득차게 된다.

 

그는 이미 엣날에 걸핏하면 주먹질로 이웃간의 분쟁을 해결하던 '촌장'이 아니었다. 그는 '폭진(暴秦)'을 무너뜨린 위대한 전투의 최대공신이다; 그는 또한 이미 옛날의 그 형제들을 데리고 천애를 유랑하던 '패공(沛公)'도 아니다. 그는 제후들과 천하를 다툴 수 있는 '한왕(漢王)'이 되었다. 만족할만도 하였지만,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승상 소하가 진언을 올린다. 비록 한중왕에 봉해진 것이 마음에 썩 들지는 않지만, 동방의 제후들처럼 생사를 걱정해야하고, 침략을 막을 험준한 지형도 없는 것은 아니다. 동방의 제후들은 도마위의 고기와 같이 조금만 잘못하면 유아독준, 강퍅자용의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다. 한중은 '천한(天漢)'이라는 칭호가 있을 정도로 아름답고 부유한 곳이다. 뜻만 계속 가지고 있으면서 암암리에 군수물자를 비축하고 정예병력을 훈련시키면 북으로 삼진(三秦)을 도모하고, 천하를 다툴 수 있다고 말한다.

 

유방은 그의 말을 들은 후, 다시 기운을 차리고, 군신간에 일심동체가 되어, 여정도치(勵精圖治)하고, 적극적으로 군대를 양성한다. 여기서 유방은 그의 일생중 세번째 복성(福星)을 만난다. 바로 한신이다.

 

항우의 수하에서 집극랑(執戟郞)으로 있던 한신은 자신이 항우에게 중용받지 못한다고 여기고, 개인영웅주의의식이 짙은 항우는 제왕의 대업을 이루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항우의 주재하에, 각로제후는 진나라를 나눠가진 후, 여전히 재능은 있으나 알아주는 군주를 만나지 못했던 한신은 굳이 가진게 가장 적고, 멀리 떨어진 진령대산을 봉지로 받은 한군을 쫓아 한중으로 온다. 유방의 군대내에서 한신은 처음에 중용받지 못한다. 그는 양식창고에서 양식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는다. 이것은 집극랑보다도 훨씬 못한 자리이다. 한신은 다시 한번 실망하고 다른 곳에 의탁하고자 생각한다.

 

한신의 큰 재능을 알아본 사람은 소하이다. 그리하여 "소하가 달빛아래 한신을 쫓아간다(蕭何月下追韓信)"는 일막이 나타난 후, 유방은 결국 한신을 대장군에 봉한다.

 

유방은 한중에 그다지 오래 머무르지 않았는데, 북으로 삼진을 정벌할 기회가 온다. 항우가 초회왕을 죽이고, 분봉한 것에 대하여 불만이 컸고, 각로의 제후들이 거병하여 반기를 든다. 항우는 그에게 가장 충실하고, 가장 강대한 항가군을 이끌고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난을 평정한다.

 

대장군 한신은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渡陳倉)"의 계책을 올린다. 유방은 그 계책대로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형제인 번쾌에게 1만명을 데리고, 한중에서 관중으로 가려면 반드시 자나야 하는 길이면서 그들이 들어올 때 불태워버렸던 길을 다시 만들게 한다. 그리고 번쾌로 하여금 군량장을 쓰게 해서 1달내에 오백리잔도를 완성하도록 시킨다. 다만, 고산심학(高山深壑)에서 이처럼 어려운 공사를 1달내에 완성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진령이북의 삼진수비장수는 이것을 그저 우스개로 여긴다. 그저 유방이 군령장에 따라 번쾌의 목을 베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유방의 주력군은 이미 대장군 한신이 지휘하여 서북으로 우회하여 가릉강을 역류하여 올라간다. 지금의 한중 서부에 있는 약양(略陽)을 지나고, 감숙 농남의 휘현, 양당을 지난다. 진령을 넘어 대산관(大散關)으로 나가 진창으로 간다. 거기서 아무런 방비없이 있던 장한의 수비군을 기습한다. 그리고 새왕 사마흔과 적왕 동예를 연이어 격파하고 일거에 삼진을 평정한다.

 

유방이 잃은 관중은 이렇게 명암허실중에 되찾아 오게 된다.

이때부터, 서초패왕 항우, 한왕 유방의 양대집단이 정권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이 대규모 전쟁은 5년이 결렸고, 최종적으로 항우의 패배, 유방의 서한왕조건립으로 끝난다.

한고조 5년(기원전202년), 천하를 통일한다. 제후들은 산동 정도(定陶)에서 한왕 유방을 황제로 모신다. 대한왕조는 이때부터 정식으로 시작된다.

 

한중은 유방이 대한왕조를 창건하는 과정에서 "욕양선억(欲揚先抑)", "육금고종(欲擒故縱)"의 역할을 한다.

유방집단이 초기에 한중을 사수하겠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항우는 분명히 한군을 주목했을 것이고, 그가 숨을 쉬고 일을 꾸밀 기회를 아예 주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유방의 봉지가 한중이 아니라, 진령의 천험이 병풍이 되어 삼진의 수비장수들의 눈을 흐리지 않았더라면, 조금만 움직임을 보이더라도 바로 포위섬멸당했을 것이다. 유방은 항우와 천하를 다툴 기회를 아예 갖지 못했을 것이다.

 

유방은 이를 마음 깊이 새겨서 통일을 이루고 관중의 장안을 수도로 정하면서도 여전히 "한왕"의 정감색채를 이어간다. 대한왕조를 "한문화(漢文化)"로 초지일관하고, 방방곡곡에 스며들게 한다.

그러므로, 한중은 유방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다. 또한 중국역사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자 혁신이기도 하다.

 

영국의 저명한 사학자 토인비는 유방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인류역사상 가장 장기적인 안목을 지니고, 후세에 영향이 가장 큰 두 명의 정치인을 꼽는다면, 한 명은 로마제국을 개창한 시이저이고, 다른 한명은 대한문명을 창건한 한고조 유방이다. 카이저는 로마제국의 건립과 문명의 흥기를 보지 못하고, 암살당해 죽었지만, 유방은 자신의 손으로 창성한 시기를 만들어 낸다. 그이 뛰어난 안목과 영도능력은 인류역사의 신기원을 창조한다."

 

비록 세월이 흐름에 따라 비바람에 침식되어, 한중 고한대는 지금 세월의 창상을 떠안은 기반만 가지고 있지만, 북송의 장소우가 쓴 싯구는 아주 잘 말해주고 있다: "유차일부토(留此一掊土), 우위한가기(尤爲漢家基)"

 

고한대의 앞에 서면, 머리 속에는 2천여년전의 그 곤경에 처해있으면서도 장지를 굽히지 않고 한 마음이 되어 서로 도우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우리는 여전히 역사의 안개를 걷으며 그 시절을 돌아볼 수 있다. 이미 한강이 보이지 않는 곳에 우뚝 서 있는 "망강루(望江樓)"에서 우리는 그 현대도시의 번화한 모습 속에서 역사를 창조한 시정의 무리들을 볼 수 있다. 그때 이 토지위에서 실망하고 길을 잃고 그리고 유암화명(柳暗花明)했던 강의와 집착을 엿볼 수 있다.

 

또 다른 유적지인 배장대(拜將臺)에는 우리는 그 천한웅풍(天漢雄風)에서 되돌아볼 수 있다. 유방에게 자신만만하게 "제가 군대를 이끄는 것은 다다익선입니다"라고 말하던 대장군 한신의 그 산하를 집어삼킬 것같은 영웅의 모습을 은연중에 볼 수 있다.

 

한신의 일생은 탄탕장열(坦蕩壯烈)한 일생이다. 그의 일생은 그 용맹한 장병들을 지휘하여, 금과철마(金戈鐵馬)로 전쟁터를 누비며 부지불식간에 주공인 유방과 천하를 다투게 되었다. 융마영웅의 일생은 결국 전쟁터에서 죽지 못하고 후궁의 장막속에서 비참하게 죽는 것으로 끝난다. 그것은 실로 탄식을 금치 못할 일이다.

 

여산에서 무관까지, 다시 잔도로 한중에 이르고, 다시 한중에서 우회하여 진창에 이르면서, 대진령은 항상 유방을 좋아했다. 그는 여러번 위기를 겪지만 모두 넘기고 천천히 앞으로 전진하여 결국 황제의 보좌에 오른다. 아무런 뒷배경이 없던 유방에게 진령은 그의 가장 강대한 뒷배경이 된다. 한왕조의 국운은 모두 진령이 보우한 것이다. 한왕조의 혈맥은 모두 진령에서 도도히 흘러나왔다.

 

한중은 대한왕조와 중국문화에 대한 공헌이 유방에 그치지 않는다.

건원2년(기원전139년), 한중 성고 박망촌의 장건은 100여명을 이끌고 호호탕탕하게 농서를 출발하여, 천신만고끝에 서역제국에 도착하여 저명한 '비단길'을 연다. 한왕조와 중앙아시아국가간의 교류를 튼다. 가져온 것은 중원외부세계의 풍부한 지식이고 이후 서한왕조의 정치, 군사, 외교활동과 대흉노전쟁에서 이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때부터, '비단길'을 따라 중국의 도자기, 비단등 진귀한 물품이 중앙아시아에서 유통되고, 서역의 한혈마, 포도, 목숙(苜蓿), 석류, 호도, 호마(胡麻)등이 중국에 번성한다. '비단길'의 개통은 중국인의 세게에 대한 협소한 인식을 바꿔놓는다. 중국과 세계의 합작과 교류를 시작하고, 중국역사문화의 형성에 깊은 영향을 남긴다.

 

한중 양현의 용정포는 중국제지술의 발명자인 채륜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한화제 유조 원흥원년(105년) 채륜은 성공적으로 종이제조방법을 개량하여, 나뭇껍질, 마두(麻頭), 파포(破布), 파어망(破漁網)등을 원료로 하여, 값싸고 품질좋은 '채후지(蔡侯紙)"를 만들어 내고, 이를 대거 보급한다.

종이의 발명은 정보를 쓰고, 유통하고 보존하게 하는데 더욱 효율적이고 편리하게 만들었다. 중화민족 수천년의 문화발전전파에 양호한 물질적 기반을 닦아준 것이다. 또한 세계문명의 발전에도 적극적인 추진작용을 한다.

 

동한 말기, 제갈량은 한중을 중심으로, 칠출기산하여 위나라를 정벌한다. 그는 생명으로 "국궁진췌, 사이후기"의 충혼을 썼다. 그리하여 중국의 민족기개를 충실히 하고, 한중에 삼국문화를 남기고 촉한문화의 정신적 내함을 풍부하게 했다.

한중은 한문화의 기원이고, 진령은 한문화의 기원을 보우한 모체이다.

대한왕조는 진량의 비호하에, 역대왕조중 다른 왕조가 따라오기 힘든 창성을 창조한다. 그리고 중화문명의 이후 발전에 더욱 견실한 물직적 기반과 정신적 기초를 닦는다.

그러므로, 진령은 유방의 뒷산일 뿐아니라, 한왕조의 뒷산이고, 더더욱 중화문명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