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성전에서, 원거리무기로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궁(弓)과 노(弩)를 제외하면, 일부 특수한 중형무기(重型武器)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 가지는 거형상노(巨型床弩)이다. 이런 상노는 발사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고 모두 복궁으로 충분한 탄력을 제공한다. 이런 상노의 발사메커니즘은 개인사용화기인 노기(弩機)와 다르다. 일반적으로 망치(槌子)로 '아발(牙發)'을 때려옮겨서, 현(弦)이 분리되게 하여 노전(弩箭)이 발사되도록 하는 것이다. 상노는 한번에 수십발의 화살을 쏜다. 적군의 밀집공격에 큰 상해력을 지닌다. 중국고대 성지는 기본적으로 모두 노대(弩臺)를 갖추고 있었고, 이런 대형노기를 놓아두었다. 송나라때 상용되던 삼궁상자노(三弓床子弩)는 시위를 당길 때 사병 수십명이 동원되어야 했으며 최장 삼백보까지 날아갔다.
또 다른 하나는 포차(炮車)이다. 화약이 발명되기 전에, 소위 '포차'는 투석거(投石車)를 의미했다. <무경총요>에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무릇 포(炮)'라는 것은 군중(軍中)의 이기(利器)이다. 공수사행(攻守師行)에 모두 쓰인다." 투석기의 원리는 아주 간단하다. 지렛대의 작용을 통하여 한쪽에는 포석을 놓고, 다른 한 쪽에는 여러 밧줄을 두어, 운행할 때, 여러 사병이 밧줄을 당겨서 함께 맹렬히 힘을 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끝의 포석이 반탄력으로 날아가게 한다. 이런 포 가운데 대다수는 모두 '초(梢)"의 수량을 명칭으로 삼는다. "초'라는 것은 포간(炮杆)의 구성부분으로 만일 1개의 포간이면 단초포(單梢炮), 5개인 오초포이다. 복합적으로 구성된 포간은 탄력이 뛰어나서, 쉽게 포석을 더 멀리 보낼 수 있다. 단포석의 포속은 일반적으로 2근으로 40명의 병사가 끌어당기고, 50보 내지 80보(78.25미터 내지 125.2미터)를 보낼 수 있다.
나중에 연이어 나타나는 포신은 갈수록 커지고, 성능도 갈수록 좋아진다. 예를 들어 칠초포의 포석은 무게가 90근에 달하고 250명의 병사가 필요하다. 최장사거리는 90보(140.85미터)에 달한다. 그러나, 이 사정거리의 수치에는 약간의 의문이 있다. 단초포의 사정거리를 예로 들면, <무경총요>에서 언급한 것은 50보 내지 80보이다. 다만 <양양수성록>의 실전기록을 보면, 250보(351.25미터)까지 이른다. 차이기 3-5배에 이른다.아마도 기술의 개선 혹은 다른 무슨 원인이 있는 것일까? 어떻게 보더라도 냉병기시대에 이런 석포의 위력은 이미 상당한 수준이다. 조어성 보위전에서 송군의 다초포는 일찌기 위를 향해 공격하던 몽골군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안겨다 주었다. 몽케 칸은 바로 석포에 맞아서 죽은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 정덕 <사천지.조어성기>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중포풍이사(中炮風而死)"했다고 한다. 소위 '포풍'이라는 것은 개략 포격의 진동을 가리킨다. 쓰러지면서 중풍에 걸려 죽었다는 것이다. 만일 정말 그러했다면, 이 포를 발사할 때에 얼마나 경천동지할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석포는 냉병기시대에 위력을 지닌 수성장비이다. 동시에 가장 살상력이 있는 공성무기이기도 하다. 정강연간의 제2차 동경보위전때 봉구문 바깥에 놓아두었던 수백개의 대포를 성안으로 옮길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금나라사람들이 가졌다." 이렇게 하여 그들의 공성도구가 된다. 정강지난의 최대 전환점은 바로 이들 '수퍼무기'의 주인이 바뀐 것에 있다. 공방의 역량이 역전된 것이다. 동경성이 함락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포석거의 거대한 역량은 몽골인의 주목을 끈다. 특히 중원의 높고 크며 견고한 성을 공격할 때 몽골인들은 점차 인식하게 된다. '수퍼거포'가 있어야만 비로소 소위 '금성탕지'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양양성을 포위공격하면서, 오랫동안 공격해도 무너지지 않는 난감한 국면에 처하자, 몽골인들은 서역에서 무슬림 장인들을 데려와서 배중식투석기(配重式投石器)(속칭 회회포(回回炮))를 만들게 한다. 이포에서 발사하는 포탄의 무게는 150근이고, 대포가 발사될 때는 '하늘과 땅이 진동하고, 닿는 곳은 모조리 가루가 되었다." 이런 엄청난 대포로 5년간 굳건히 지키던 양양군민의 수성의지를 신속히 붕괴시킨다. 결국 양양성은 몽골인의 수중에 들어간다. 그후 이런 '양양포'라고 명명된 중형무기는 몽골인들이 유럽, 중앙아시아등지에서 공성약지할 때 반드시 갖추고 다니는 무기가 된다.
화약의 발명과 더불어, 특별히 전쟁에서 널리 사용되자, 화포의 발전도 나날이 새로워진다. 성지 방어이념도 거대한 변화가 발생한다. 대형화포가 갈수록 결정적인 작용을 하기 시작한다. 공수 어느 쪽이건 간에, 누구의 화기가 우세를 점하느냐에 따라, 그쪽이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명나라말기 영원보위전투에서 명군은 성위에 11문의 홍이대포를 설치하는데 큰 공로를 세운다. 홍이대포는 품질이 뛰어나서 영원의 3일혈전동안 계속하여 성아래로 포격을 가하고 돌아가며 멈추지 않았다. 매번 포가 발사될 때마가 사상자가 무수히 나왔고, 사상자가 몇리에 걸쳐 있었다. 결국 만주족의 미친듯한 공격을 막아내고, 평안을 얻게 된다.
그렇다면, 전쟁이 발전하여 화포가 주인공이 될 때, 특히 공성하는 측의 화력이 강대하여, 포화의 우세를 점하게 되면, 수비측은 반드시 패배하게 되는가? 기실 그렇지는 않았다. 1653년의 해징(海澄)전투를 예로 들면, 당시 청군은 수백문의 크고 작은 총포를 주야를 가리지 않고 발사하여 정군(鄭軍, 정성룡 부대)의 진지를 포격한다. 정군은 땅굴을 판다. 이는 근대전쟁터에서 자주 보이는 참호나 엄폐물과 같다. 나중에 청군의 대소금천전투에서는 티벳군에서 이런 토갱을 파는 방법을 써서 청군의 화력우세를 해소시킨다. 전후 청군의 대장 아계(阿桂)는 <평정양금천방략>에서 이렇게 감탄한다: "판 땅굴은 견고하고 두터우며 깊고 구부러져 있었다. 쥐의 굴과 같았다. 대포는 직접 맞출 수가 없었다." 이를 보면 어떤 때는 낡은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된다.
1960년대 미소 핵무기의 위협에 대하여 모주석은 "동굴을 깊이 파고, 양식을 많이 보관해두며, 패자로 칭하지 않는다"는 전쟁준비지도방침을 정한다. 전국의 상하에서 대규모의 국방공사와 도시방공시설을 만드는 붐이 일어난다. "깊은 동굴을 판다" 는 것은 비록 어쩔 수 없는 방법이지만, 도시방공의 각도에서 보자면,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다.
언급할만한 점이라면, 화기가 대량으로 사용되면서, 냉병기시대가 끝나가려 할 때까지도 중국은 여전히 냉병기시대의 성지방어를 고수하고 골몰했다. 성벽의 규격과 건설은 여전이 2천년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때 서방국가의 정치가와 군사가들은 이미 화포시대를 민감하게 느꼈다. 성지보루의 전통적인 방어수단은 이미 전혀 의미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속속 성벽의 높이를 낮추고, 심지어 완전히 철거한다. 이렇게 하여 화력의 효력이 가장 잘 발휘될 수 있도록 하고, 화기를 발전시키는데 주력하며, 적극적으로 새로운 군사방어이론을 세우는데 마음을 쏟았다.
그러나, 화약을 발명한 중국인은 군사의 최고조때 돌연 걸음을 멈추고 더 나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높고 커다란 성벽 안에서, 그들의 안전감을 추구한다. 만일 그들이 화포의 운용에 주의하지 않다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틀린 말이 아니다. 청나라말기의 북경성을 예로 들면, 정양문 위에 대성포 8문, 제승포 3문, 신위포 9문, 철심동포 4문, 신기신추포 109문을 설치했다. 더더구나, 북경의 매 성루의 앞에는 모두 웅위한 전루를 세운다. 그리고 기세가 웅위한 옹성도 세운다. 또한 모든 성벽은 청전으로 쌓아서 만들어, 높고 크며 견고했다. 만일 당시의 북경성이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보루라고 하더라도 전혀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1900년 8월 14일, 겨우 18000여명의 사병으로 구성된 팔국연합군은 1일의 시간만에 가볍게 북경성을 함락시킨다. 우리는 당시 청나라조정의 무능과 연약함을 얘기하지는 말고, 단순히 순수한 군사방어각도에서만 분석해보자. 이 성이 함락당한 것은 너무 이상하다. 당시 북경을 수비하는 청군과 의화단권민은 40만여에 이르렀다. 그리고 화기의 배치도 잘 되어 있었다. 당시 성내의 프랑스 대주교 번국량(樊極梁)은 일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길거리에 방어보루는 아주 많다. 모두 쌀포대로 만들었다. 권비와 건물안의 관병을 계산하지 않더라도, 길거리를 지키는 관병의 수만도 최소한 천오백명에 달했고, 모두 총을 들고 있었다." 당시 이 광경을 목격한 한 미국인은 이렇게 말했다: 중국의 총탄도 아주 맹렬했다." 그런데, 연합군이 천안문을 열고, 황서으이 두번째 성문으로 공격할 때, 일찌기 '성벽위, 성루에서 맹렬한 화력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중국인의 화총이 아무리 맹렬해도 마치 폭죽을 쏘는 것같았다. 한동안 시끄럽고 나니 사람은 도망치고 성은 빼앗긴다. 전후의 통계에 따르면, 팔국연합군이 북경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면서, 연합군의 사망자는 400여명이었다. 청군의 전사자는 640명이었다. 이런 낮은 사앙률은 자연히 연합군에게 큰 다행이었다. 그러나 중국인에게는 어떠한가? 설마 40만대군에서 겨우 600여명만이 충혼이 되었다고 할 것인가? 가장 먼저 북경성에 진입한 미군제14보병단의 모 연대는 별명이 'easy company'였다. 그렇다 너무 쉬웠다.
15년후, 이미 민국시대이다. 내외성의 교통을 개선하기 위하여, 민국정부는 정양문의 옹성을 철거한다. 정양문의 전루를 새로 짓는다. 그리고 특별히 독일인 로스코 칼에게 설계를 맡긴다. 여기에 시멘트 난간과 전창(箭窓)의 호형 차첨(遮檐)을 추가한다. 그외에 월장의 단면에 서양도안장식을 추가한다.
이것은 재미있는 장면이고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아름답고 웅위한 전루는 마땅히 가져야할 작용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예 자신의 체면을 내려놓고 기꺼이 도시의 장식품으로 전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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