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중국 고대의 공성전(3): 방어기기

중은우시 2014. 7. 17. 23:00

<무경총요(武經總要)>에 따르면, "수성의 도는 그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다리는 것이다; 그가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공격하지 않는 것이다." 즉, 주도면밀한 배치, 적극적인 방어가 왕도이다; 다행히 중국 고인들은 경험을 종합하고 축적하는데 능했고, 후세에 전해지는 많은 성방의 '조작비법'을 전했다. 그리하여 점점 성숙된 제식 장비시스템이 구축된다.

 

한가지 유형은 조체(阻滯)를 실시하는 것이다. 호성호의 바깥에 일반적으로 3,4단계의 인공장애를 설치한다. 주로 질려(蒺藜), 녹각목(鹿角木), 함마갱(陷馬坑), 거마창(拒馬槍)등이다. 그 목적은 주로 적군 특히 기병부대의 접근을 막는 것이다.

 

질려는 목질려와 철질려로 나뉜다. 목질려는 일종의 1년생 초본식물이다. 과실의 외각에 단단한 가시가 있다. 옛날에 전투때는 왕왕 현장에서 재료를 모은다. 이를 수집한 후 적군이 지날 길에 뿌려둔다. 그리하여 가시로서 적군의 말의 발바닥을 찌르게 한다. 철질려는 자연히 인공으로 만든 '무기로 같은 기능을 지닌다. 그러나 더욱 단단하고 순환사용이 가능하다. <묵자>에는 여러번 질려의 용도를 언급한다. 성내에 보존하는 외에, 길의 출입구와 문에 모두 설치한다. 이를 통하여 적군의 기습을 방지한다. 철질려와 비슷한 것으로는 철능각(鐵菱角)이 있다. 주로 물이 비교적 얕은 호구에 설치한다. 성에 가까운 계곡물에 뿌려서 적군이 건너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녹각목은 모양이 사슴뿔과 같은 나무장애물이다. 수지류와 수간류의 두 가지로 나뉜다. 길이는 수척에 달한다. 그중 한쪽 끝은 흙에 1척여 묻는다. 그 목적은 주로 기병을 막는 것이다. 이는 현대전쟁에서 자주 쓰이는 철조망과 비슷하다. 이런 조체 장비는 한나라때 발명되었다. 삼국시대 위나라군대는 수성에 대량으로 쓰기 시작한다. 적군의 기병의 행동을 저지하는 것으로는 함마갱이 있다. 일반적으로 적군이 통행하는 도로와 성문의 내외양측에 설치한다. 거(巨)자형과 아(亞)자형의 배열이 있다. 갱의 아래부분에는 뾰족하고 불에 태운 녹각창과 죽첨을 배치한다. 갱의 위는 풀로 덮어 두어 적을 속인다. 그외에 도 하나의 기교(機橋)라는 함정장치가 있다. 주로 호구에 배치하는데, 평소에는 정상적인 편교(便橋)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적군이 공성할 대는 괄목(栝木)을 빼버리면 적군이 다리 위를 밟으면 다리가 무너져 버린다.

 

또 다른 유형은 방어무기이다. 만일 위에서 언급한 조체설비가 수성의 제1차방어선이라면, 제2차 방어선 즉 가장 중요한 방어선은 자연히 개미처럼 밀려와서 성을 기어오르는(묵자가 말한 蛾傅, 혹은 손자가 말한 蟻附)를 상대하는 성벽의 방어이다. 그중 응용이 가장 먼저 이루어진 고 가장 많이 쓰인 수성무기는 뇌구(檑具)이다. 일찌기 <주례.추관.직금>의 소에서 '뇌(雷). 수성방어의 도구"라는 기록이 나온다.

 

뇌구는 거대한 나부기둥에 뾰족한 못을 박은 것이다. 그 후에 중력으로 투척하여 살상력을 보이는 수성무기이다. 목뢰외에, 전뢰(塼雷)와 니뢰(泥雷)도 있다. 주로 성의 자원이 부족한 상황하에서 목뢰의 대체품으로 사용된다. 살상력은 자연히 많이 줄어든다. 그러므로 송나라때에 이르러, 고인들은 중복하여 사용할 수 있는 회수형 뇌목을 발명한다. 주로 차각뢰(車脚檑)와 야차뢰(夜叉檑)의 두 가지로 나뉜다. 차각뢰는 성에 교차(絞車)를 설치하고 차륜(車輪)을 뇌구로 하여 투척한 후에 다시 교차를 돌려서 회수하는 것이다. 야차뢰(留客住라고도 부른다)의 설계는 더욱 교묘하다. 뇌목의 양쪽 끝에 바퀴를 달아서, 비록 마찬가지로 성위의 교차를 이용하여 내려보내지만, 못과 성벽이 마찰할 때의 저지력을 크게 감소시키고 회수속도를 빠르게 하였다. 자연히 전쟁시의 효율이 훨씬 컸다.

 

뇌구와 기능이 비슷한 것으로는 '낭아박(狼牙拍)'이라는 수성무기가 있다. <무경총요>의 기록에 따르면, 낭아박은 길이 5척(1.57미터), 너비 4척5촌(1.41미터), 두께0 3촌(0.09미터)의 유목판(楡木板) 위에 길이 5촌, 무게 6량의 낭아철정을 2천2백개를 가득 박는다. 사면에 각각 칼날을 하나씩 박아서, 살상력을 강화한다. 적군이 공성할 때, 수성사병은 두 줄의 밧줄을 이용하여 박면을 들어 성벽과 수직으로 만들고, 적군이 기어오를 때 박면을 돌연 아래로 내려뜨린다. 이렇게 하여 치명적인 살상력을 지니게 만든다. 적군의 공성용 분온()에 대하여는 수비사병들이 철당목(鐵撞木)이라는 무기로 파괴한다. (분온은 목려거라고도 부르며, 4개의 바퀴 위에 나무로 틀을 세우고 소가죽을 입히며 10명이 들어갈 수 있다. 마치 고대의 목제 장갑차와 같다). 철당목은 나무에 머리부분을 쇠로 만든 것이다. 철수는 6개의 철봉(鐵鋒)으로 이루어져 있고, 매 철봉은 길이가 1척(약 30센티미터)이다. 모양은 대낭아철정과 비슷하다. 거대한 충격력으로 공성차량의 머릿부분을 부수고 다시 불화살을 쏘아서 불에 태워 파괴한다.

 

공성사병을 상대하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공격방어무기에는 소위 "비구(飛鉤)가 있다. 일명 철효(鐵鴞)라고도 부른다. 그것은 날카로운 철구(鐵鉤, 쇠갈고리)와 길다란 쇠사슬로 구성되어 있다. 진격하는 적군사병은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있으므로, 왕왕 행동이 불편하게 된다. 게다가 화살과 돌맹이에 공격받을까봐 우려하여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한다. 그래서 수성병사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비구를 던져서 갑옷과 투구에 건다. 마치 낚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적군을 공중으로 끌어올린 다음에 수비측에서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외에 수성사병은 다른 여러가지 종류의 단병작전무기를 보유한다. 예를 들면 괴돌창(拐突槍), 조창(抓槍), 괴인창(拐刃槍), 차간(叉竿)등이 있다. 수성전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이들 수성무기는 야전무기와 크게 다르다. 가장 선명한 특징은 길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7,8미터가량이 된다. 어떤 무기는 특수한 설계를 한다. 예를 들어, 좌자부(銼子斧)라는 무기는 일반적인 '직병직도(直柄直刀)'의 도끼머리와 달리, '직병횡도(直柄橫刀)'의 방식을 채용했다. 주로 공성인원을 걸어서 찌르거나, 성을 오르는 자의 손을 자르기 위한 용도이다. 단병에 사용하는 방패도 약간 다르다. 일반적으로 목립패(木立牌)와 죽립패(竹立牌)로 나눈다. 양자의 모양은 비슷하다. 모두 크고 높다. 그리고 괴자(拐子), 즉 지탱하는 틀이 있다. 이를 통하여 사병들이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방패의 뒤에서 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목립패와 비교하면 죽립패는 방어력이 더욱 뛰어나다. 그것은 두터운 대나무줄기를 소가죽끈으로 엮어서 만든 것이다. 심지어 전체 방패가 모두 소가죽으로 덮인 경우도 있다. 이는 특별히 견고하다. 적정을 살피기 위하여 성벽이나 적의 주둔지를 순시할 때 이를 가지고 화포나 불화살의 습격을 피할 수 있다. 이들 제식장비 외에 석회(石灰), 모래, 불기름, 심지어 끓은물도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방어류의 공격무기이다. 비록 살상력에 한도는 있지만, 연막탄, 소이탄의 역할을 하고 심지어 독가스탄의 효력까지 가진다. 이렇게 하여 적군을 교란시키고 공격을 엄호하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또 다른 류는 방호설비이다. 공성하는 군대는 인해전술외에, 왕왕 3가지 방식의 보조진공을 사용한다. 하나는 석공(石攻), 둘은 화공(火攻), 셋은 토공(土攻)이다. 석포차(石包車)는 공성의 중형무기이다. 성벽에 대하여 거대한 파괴력을 지녔다. 이에 대하여, 수성부대에서는 왕왕 일종의 '누답(累答)'이라는 방호용구를 사용한다. 누답은 굵은 마로 만든 밧줄을 긴밀하게 엮은 부드러운 장막이다. 표면에 진흙을 발라서 방화작용을 하고, 성루, 여장, 망루의 외부에 걸어두면, 장타를 벙어하여 비석에 파괴되지 않도록 해준다.

 

공성부대는 또한 포차를 이용하여 성내로 연소탄을 투척한다. 그러므로 성벽의 방화조치는 아주 중요하다. 묵자는 특별히 이 점을 강조했고, 여러번 귀찮아 하지 않고, '도니방화(塗泥防火)'와 '다비수구(多備水具)할 것을 강조했다. 아마도 그 시대에는 지하수가 얕아서, 지하3척이면 물이 보였다. 쉽게 물을 길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심지어 매 1백보에 우물 1개씩을 파서 필요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송나라때에 이르러, 성벽의 소방은 주로 수대(水袋, 물주머니)의 방식을 취한다. <무경총요>에서는 1개의 성문에 반드시 2개의 수대를 배치하도록 요구했다. 소대는 소말가축의 가죽으로 만들며 일반적으로 물 3,4석을 저장한다. 물이 나오는 입구는 중간이 뚫어져 있고 길이가 1장 정도인 굵은 죽간(대나무자루)를 써서 소방파이프역할을 했다. 그 외에, 당시에 물을 분사시킬 수 있는 즉통(喞筒)도 사용했다. 성위의 성루나 장막에 불이 붙으면, 3명 내지 5명이 1조가 되어, 즉시 수대을 들고 불을 끈다. 아주 효과가 좋았다. 만일 적군이 성아래에 불을 지르면, 일종의 돼지나 소의 방광으로 만든 물주머니를 불 속에 집어던지면, 주머니가 터져서 물이 뿜어져 나온다. 만일 기름기가 있는 불이 붙으면, 수비군은 일종의 대형 마탑(麻搭, 현재의 밀대에 유사함)를 이용하여 진흙물로 불을 끈다.

 

공성부대가 잘 쓰는 기량은 땅굴을 파서 공성하는 것이다. 왕왕 수성부대가 막을래야 막을 방법이 없도록 만든다. 그러나, 일찌감치 묵자시대에 이미 상응한 파해법이 나와 있었다. 구체적인 방법은 성내의 각 곳에 먼저 깊이 2장(6.26미터)의 동혈을 판다. 그 후에 청력이 좋은 군사를 그 동굴속에 들어가게 하고 두껑을 덮는다. 적군이 수백보(1보는 1.57미터)내에서 활동하게 되면, 동굴 속의 군사는 그 소리로 적군의 방향을 알 수 있게 된다. 그 후에 다시 풍선차(風扇車)를 이용하여 독약, 짙은 연기 혹은 석회분을 적군의 방향으로 불게 된다. 동시에 적군의 땅굴방향으로 미리 횡으로 땅굴을 파두어서, 복병을 배치하고, 적군이 방심한 틈을 타서 땅굴 속의 적군을 하나하나 죽여버리는 것이다.

 

당연히 실제 전쟁에서, 군사력이든 사기이든 공성측이 왕왕 강세이고 주도하는 지위에 있게 된다. 수성하는 측은 반드시 적이 하는 바에 따라 방어하고, 신축성있게 대응해야 한다. '수성술'을 창조적으로 운용해야 한다. 적을 만나면 적을 죽이고, 적이 수단을 쓰면 수단을 막아야 비로소 수비측은 승리할 수 있다.

 

서위대통12년(546년)의 옥벽지전(玉壁之戰)은 전형적인 방어사례이다. 당시 동위의 승상 고환은 중병을 이끌고 서위의 옥벽성을 공격한다. 밤낮으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수비장수 위효관(韋孝寬)은 임기응변으로, 극력 항거한다. 동위군은 먼저 성의 남쪽에 흙으로 산을 쌓아서,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공성하고자 한다. 그러나 위효관은 그에 맞추어 성루를 높인다. 시종 상대방의 토산보다 높았다. 동시에 전쟁도구를 많이 비치하여 적극적으로 방어한다. 그래서 동위군은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화가난 동위의 총사령관 고환이 크게 소리질렀다. :"네가 누각을 하늘까지 엮어서 올린다고 하더라도, 나는 성을 뚫어서 너를 취하겠다."

 

그후에 그는 공성전술을 바꾼다. '고허법(孤虛法)을 쓴다. 한편으로 병력을 집중하여 북성을 공격하며, 밤낮으로 멈추지 않으면서, 한편으로 성의 남쪽에 비빌리에 10개의 땅굴을 판다. 위효관을 그 정보를 얻은 후, 수비병사들에게 장구(長溝)를 파도록 하여 동위군의 땅굴을 차단한다. 그리고 병력을 보내어 지키게 한다. 동위군이 깊이 팠을 때, 그들을 하나하나 죽여버린다. 그외에 그는 도랑바깥에 장작을 쌓아두어 불을 붙일 중비를 하고 있었다. 동위군이 땅굴에 잠복하면 장작을 땅굴에 밀어넣어 불을 붙인다. 그리고 우피낭(牛皮囊)을 이용하여 바람을 일으켜 불이 활활 타도록 한다. 땅굴에 있던 동위의 병사들은 얼굴이 새카맣게 타서 죽었다. 참혹하기 그지없을 정도였다. 고환은 그 방법이 안되자 또 다른 방법을 쓴다. 그는 사람에게 공차(攻車)를 만들게 하여, 성벽에 충격을 가한다. 공차가 가는 곳은 무너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위효관은 그 모습을 보고 이약극강(以弱克强)의 방법을 채택한다. 사람을 시켜 포필(布匹)로 장막을 만들어, 그것이 향하는 곳에 펼쳤다. 공차가 부딛쳐도 장막이 공중에서 힘을 받아서 충격력은 순식간에 약화된다. 성벽은 전혀 손괴되지 않았다.

 

 위효관은 총명한 장군이지만 고환도 보통내기는 아니다. 그는 동위군에게 말린 소나무가지, 껍질벗긴 삼대를 긴 작대기에 묶고, 기름을 부어서 불을 붙이고는 이것으로 장막을 불태워 옥벽성루까지 한꺼번에 불태워버리려고 한다. 위효관도 임기응변하여, 군사들에게 날카로운 갈고리칼을 긴 장대에 묶어서, 화간(火杆)이 공격해오면, 갈고리칼로 이를 잘라버렸다. 그러면 불붙은 소나무가지, 껍질벗긴 마대는 모조리 잘라져 버렸다. 연전연패하는 고환은 전혀 기죽지 않고, 땅굴파는 방법을 바꾸어, 공성사병에게 성의 사방에 땅굴 20개를 파게 시킨다. 나무기둥으로 지탱하게 하고, 기름을 부어서 불을 붙여 나무기둥을 쓰러지게 하여, 성벽을 무너뜨린다. 다만 위효관도 일찌감치 준비하고 있었다. 성벽이 붕괴된 곳에 즉시 난간으로 막았다. 동위군이 성내로 진입할 수 없게 한다. 고환은 병력을 이끌고 50일간 공성하면서, 사병이 7만명이나 죽었다. 힘이 빠지고 쓸 수 있는 방법을 모두 썼지만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철군한다.

 

기실, 수성의 방법은 만일 '상대방이 수법을 쓰면 그 수법을 파해한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쨌든 이것은 소극적인 방어의 범주이다. 수성술의 최고경지는 '반기도이행지(反其道而行之)'이다. 대담하면서도 세심하게 '비상규(非常規)'의 방법을 쓰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나라때 이광필이 병력을 이끌고 '태원보위전'을 벌일 때, 그가 채용한 방법중에는 '토행손(土行孫)'의 방법이 있어, 실로 탄복을 금할 수 없게 만든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땅굴을 파는 것은 공성하는 측의 행위이다. 이광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을 보내여 적극적으로 땅굴을 파서 성밖으로 연결시킨다. 그 후에 반군이 성밖에서 욕을 하며 도전할 때, 당군을 보내어 그가 막을래야 막을 수가 없도록 하여 땅굴로 끌고 와서 성위로 끌고 올라가 참수한다. 이렇게 하여 반군은 간담이 서늘해진다. 길을 걸을 때도 고개를 숙이고 땅을 보게 된다. 반군이 운제(雲梯, 구름사다리)와 토성쌓기를 통하여 공격할 때, 이광필은 다시 역발상을 해서 당군으로 하여금 성아래에 미리 땅굴을 파두게 한 다음, 반군이 성벽에 가까이 다가올 때 돌연 무너뜨려서 그들을 생매장한다. 어찌된 일인지, 이광필은 특히 '땅굴전'을 좋아했다. 이이는 전쟁예술을 등봉조극의 경지로 끌어올린 것이다. 가장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것은 그가 먼저 거짓투항의 수단으로 반군에게 성을 나가서 항복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암중으로 사람을 보내어 땅굴을 반군의 군영 아래까지 판다. 먼저 나무로 지탱시키고, 약정한 날이 되었을 때, 이광필은 부장으로 하여금 수천명을 이끌고 나가서 거짓으로 투항하게 한 다음, 반군이 거짓인줄 모르고 군영밖으로 움직일때 돌연 군영이 무너져서 천여명이 죽고, 돌연 혼란에 빠진다. 당군은 그 기회에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맹렬이 공격하여 반군 만여명을 섬멸한다. 이런 신출귀몰하면서도 '법칙'이 없는 수성술로 반군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최종적으로 빛나는 승리를 거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