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치아(李治亞)
유비는 대단한 영웅이다. 맨손으로 시작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니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 나중에 군대를 이끌고 성도를 함락시킨 후에 조비가 한나라의 황위를 찬탈하여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여러 신하들의 옹립하에, 황제가 된다. 국호를 대한(大漢)이라 하고, 역사에서는 촉한(蜀漢)이라고 부른다. 모든 준비가 완료된 후, 유선을 황태자로 삼는다.
삼국지에는 이렇게 말한다: 건안24년, 선주(先主, 유비)는 한중왕(漢中王)이 된다. 왕태자를 세운다. 황제에 오른 후, 제갈량을 사신으로 보내어 유선에게 선포한다: 황태자 유선, 우리 대한왕조는 힘든 시대를 만나서, 난신적자들이 속속 신기를 찬탈했다. 국가에 주인이 없어서 여러 사람들이 나를 황제로 옹립했다. 나는 너를 국가의 후계자로 임명하니, 종묘를 승계하고 나라를 정돈하라. 네가 공손하게 승상의 가르침을 받아서, 한 가지 일을 할 때면 여러가지 좋은 이로움을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해라."
그렇다면 유선은 왜 유비에 의하여 황태자에 세워졌을까:
첫째, 유선은 유비의 건재한 큰아들이다. 병황마란(兵荒馬亂)의 시대에 유비에게도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어떤 아들은 적에게 포로로 잡혀가거나 전사했다. 당시 조조가 서주를 공격할 때 이런 기록이 있다: 유비는 원소에게 달려가서 그 처자를 얻었다. 고대에 "처자"는 "처와 자식"이라는 뜻이다. 이를 보면 유비에게는 일찌감치 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은 199년에 발생했고, 유비가 황제를 칭한 221년에서 22년이 떨어져 있다. 유선의 연령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이를 보면 유선이 유비의 큰아들은 아닌 것이다.
둘째, 유선은 어렸을 때 아주 총명했다.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유비가 유선에게 내린 유조에 이런 말이 있다: "제갈량이 사원(謝援)에게 유선의 지혜를 칭찬했다. 사원은 다시 이 칭찬하는 말을 유비에게 말한다. 유비는 기뻐하며 유선에게 열심히 하라고 한다." 제갈량은 당연히 아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유비도 사람을 잘 알아보는 사람이다. 이를 보면 유선은 우둔한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셋째, 유선이 어렸을 때, 유비가 신경써서 길렀다. 나라를 다스리는 재주를 장악하게 하기 위하여 유지는 그에게 <신자(申子)>. <한비자(韓非子>), <관자(管子)>, <육도(六韜)>등의 책을 공부하게 한다. 그리고 제갈량이 친히 이들 책의 사본을 쓴 다음 그에게 읽게 한다: 그리고 이적(伊籍)을 스승으로 삼아 <좌전>을 공부하게 한다. 이뿐만 아니라, 그레게 무술을 배우게 한다. <환우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사산(射山)은 성도현 북쪽 15리에 있다. 유선이 이 곳에서 활쏘기를 배웠다." 유선의 학업성취에 제갈량은 만족했다. 제갈량은 <여두미서>에서 유선을 이렇게 평가했다: "조정의 나이 겨우 18에, 하늘이 내린 자질이 어질고 기민하며, 아랫 사람을 사랑하고 덕으로 대한다." 여기의 기민하다는 것을 보면 유선은 우둔한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제갈량이 고의로 풍자했다는 말이 아닌가.
넷째, 유선이 황제를 칭한 것은 운이 좋은 점도 있다. 유선이 태어날 때, 감부인이 꿈을 꾸는데, "하늘을 바라보며 북두를 삼켰다." 그리고 임신하여 신야에서 유선을 낳는다. 그리고 이름을 "아두(阿斗)"라고 짓는다. 현재의 신야현은 "태자각(太子閣)"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감부인이 유선을 낳은 누각이다. 나중에 문혁때 훼손되었다.
다섯째, 아마도 대지약우(大智若愚)인지, 아니면 다른 무슨 연유때문인지, 어렸을 때, 유선은 아주 말을 잘 들었다. 유황숙도 여러번 "악이 적다고 행하여서는 아니되며, 선이 적다고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친다. 황숙은 아마도 생각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너무 말을 잘듣는 아이는 기실 사상과 주견이 없다는 것을. 국가를 다스릴 때는 자신의 견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여섯째, 유선과 비교하면 다른 아들인 유리(劉理), 유영(劉永)은 비교적 나이가 어렸다. 하물며 유리와 유영은 거의 사회적 배경도 없다. 그들을 태자로 세운다면 여러 신하들이 받들지 않을 것이다. 유선의 모친인 감부인은 유비가 가장 좋아하는 여인이다. 비록 감부인이 큰부인은 아니지만, 형주에 있을 때 아주 사랑을 받았었다.
일곱째, 유선과 비교하면, 유비의 양자인 유봉(劉封)은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큰 공을 세웠다. 아쉽게도 그는 유비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유비는 일생동안 전쟁을 하면서 강산을 차지했다. 당연히 자신의 아들이 승계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핑계를 잡아 유봉을 죽여버린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유봉은 성도에 도착한 후, 제갈량은 유봉이 강맹하여 유선이 황제에 오른 후에 제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여, 유비에게 적시에 그를 죽여버리라고 권한다.
자식은 자식의 복이 있다. 자식을 소나 말처럼 다루지는 않는다. 유비는 자신의 아들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을 찾아서 그를 보좌하게 한다. 그리고 제갈량과 같은 지혜로운 인물이 그를 도왔다. 아쉽게도 국가는 멸망하고 영토는 빼앗기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다. 보기에 국가대사는 독단적으로 전횡하는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비록 일시를 결정할 수는 있지만, 일생을 결정할 수는 없다. 관건은 민의에 있다. 유선이 후기에 등애의 대군이 성앞에 도달했을 때, 백성들중에서 촉한정부를 위해서 말해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를 보면 유비가 성심성의껏 찾은 황태자가 역시 어쩔 수 없는 아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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