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추근(秋瑾)과 왕정균(王廷鈞)

중은우시 2014. 6. 23. 22:26

작자: 미상

 

 

 

 

추근의 혼인은 집안이 서로 맞았다고 할 수 있다. 그녀와 왕정균은 하나는 호남성 상담현 이금국(세무국) 총판의 딸이고, 다른 하나는 만청의 중신 증국번의 오촌조카이다(추근의 남편 왕정균의 부친 왕불신(王黻臣)은 증국번과 사촌형제간이다. 증씨집안의 장방(帳房)을 지냈고,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큰 돈을 번다). 그들의 결합은 외부인들이 보기에 강강결합이다. 마음과 힘을 합하여 부귀의 길로 달려갈 수 있는 것이다. 왕정균은 용모도 괜찮았다. 하얀 피부에 얼굴은 작다. 척 보기에 가련하고 온순한 청년의 모습이다. 그리고 부끄럼이 많고 예의바르며 선량하고 민주적이었다.

 

세속적인 의미로 보자면, 추근은 시집을 아주 잘 간 편이다. 왕정균이 추근에게 준 것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이다. 그 행복은 어느 정도 온유하고, 어느 정도 마비시키며, 마치 한 입에 깨물어먹을 수 있는 부드러운 분홍색의 달콤한 사탕과 같다. 그 행복은 이상을 실현하는 행복이 아니라, 부잣집 마나님의 행복이다. 마작이나 하고, 친구들과 만나서 수다를 떨고, 시장을 돌아다니며, 치파오를 입고, 먹고 마시는데 걱정이 없이 즐겁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왕정균이 추근에게 준 것은 백유소(白流蘇)가 바라는 행복이다. 안정적인 혼인관계, 장기적인 먹거리, 한 여인이 한 남자를 지키며 살아가면 세상이 바뀐다고 하더라도 이 평범한 한 쌍의 부부는 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추근은 이런 행복에 만족하지 않았다. 막 시집갔을 때, 그녀는 그가 그와 시사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그녀의 정신적인 교류의 갈망을 채워주지 못하여 불만을 가진다. 추근은 편지에서 이렇게 원망한다: "내가 만일 좋은 짝을 만나서, 서로 갈고 닦을 수 있었다면, 이 7,8년간 학업에 정진이 없었겠는가. 분명 다른 사람보다 두각을 나타냈을 것이다. 나는 부모형제의 이름을 날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자를 만나서, 하루종일 고뇌하며 머리만 아프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저 자신에게 재능이 없고, 기개가 없다는 것을 탓할 수밖에 없다. 추근의 남편 왕정균은 유구무언이었다. 그러나 '방미두점(防微杜漸)'을 몰랐다. 추근은 점점 새로운 조류를 따라가나, 왕정균은 여전히 구식이었다.

 

그들은 하나는 상승하고 하나는 침하했다. 하나는 시대의 조류에 따라 춤을 추는 자이고, 하나는 착실하게 편안한 나날을 보내는 자이다. 가정은 갈수록 선구자가 되어가는 추근에 있어서 따스한 비호소가 아니라, 답답한 새장이 되어 갔다. 금실로 만들었지만 재미가 없었다. 1903년, 왕정균은 돈을 내고 호부주사가 된다. 추근은 남편을 따라 북경으로 간다. 시야도 넒어지고, 사교범위도 갈수록 넓어졌다. 추근은 일생동안 자기 하고 싶은대로 했다. 북경에 있던 시기는 그 시작이었다. 그녀는 마음 속에 민족과 국가를 품고 있었고, 자그마한 가정으로는 그녀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마음 속에 품은 큰 뜻은 계속 팽창하는 풍선과도 같았다. 그리하여 가정의 작은 세상과 추근의 사이에는 점점 더 들어맞지 않게 된다. 추근은 괴이한 옷을 입었다. "수계이족화(首髻而足靴), 청포지포(靑布之袍), 약무지분(略無脂粉), 고승가거(雇乘街車), 과거원좌(跨車轅坐), 여차부병(與車夫幷), 수일권서(手一卷書)" 전혀 관료집안 여성의 단아하고 장중한 모습 웃어도 이빨이 보이지 않고, 걸어도 치마는 움직이지 않는 표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또한 남장을 하고 극원으로 희극을 보러 가기도 하여, 왕정균이 동료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 추근은 집안에서 위생에 신경쓰지 않았다. 친구들이 방문하면 그녀는 집안에 "서가에 아무렇게나 서적과 의복을 걸어놓는다. 호박씨껍질, 광리껍질은 집구석에 던져져 있어 이상한 냄새가 났다. 청결에 아주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집안일을 잘 하지 못했다. 추근은 가정의 안정에 만족하지 못했고, 친구와 자신의 가정에 대하여 얘기할 때 그녀는 심지어 이렇게 말하기까지 하였다: "나의 가정은 너무 화목하다. 나는 이런 화목한 것에 항상 만족하지 못한다." "나는 남편이 좀 폭력적이면 좋겠다. 폭력으로 나를 강압하면, 나는 용기를 내서 남자와 싸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추근은 항상 무엇인가에 반항했다. 그녀는 한 때 남장을 입기를 좋아했다. 이를 통해서 남성의 압박에 반항한다. 그저 그녀의 방식대로 여성 자체로 서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극단으로 가서 자신을 남성화한다. 그녀는 남성과 비교해서 강하려고 하였다. 추근은 통치자에 반항했다. 마찬가지로 가장 극단적인 방식을 쓴다. 여협의 하늘은 항한 차갑다. 가장 잊혀지지 않는 추근의 사진에 그녀는 두터운 옷을 입고 있다. 얼굴색은 굳어져 있고, 대의늠름한 모습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녀의 오른 손에 쥐고 있는 날카로운 칼이다. 하얀 빛의 칼날은 강렬하다.

 

왕정균은 이런 추근에 대하여 먼저 인내하고 나중에는 그녀의 뜻에 따라준다. 그녀는 세수장류(細水長流)(가느다른 물이 오래 흐른다)형의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녀가 추구하는 세상이 있다. 그들의 혼인이 파경에 이른 것은 간단하게 항간에서 얘기하는 '가정폭력'때문이 아니다. 두 사람의 사상이 갈수록 멀어졌기 때문이다. 왕정균은 보통의 온유한 남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추근은 강렬한 여성이 되고 싶었다. 아마도 서로 놓아주는 것이 가장 좋은 결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추근이 일본에 유학을 갈 때, 왕정균이 추근을 위하여 설득을 해준다. 그래서 이뤄질 수 있었다. 이전에 왕정균은 추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하여, 그녀와 함께 시장을 구경하고, 연극을 보고, 서화를 사기도 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1907년 추근은 귀국한 후, 혁명사업에 종사한다. 대량의 자금이 필요해지자, 왕씨집안에서 선뜻 내놓는다. 왕씨집안에서 돈을 내놓은 것은 추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함이었다. 남편을 따르고, 자식을 돌보는. 그러나 그것은 추근의 지향이 아니다. 하나의 하늘은 추근이 칼날로 내리쳐서 둘로 갈라지고, 다시는 붙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너는 너 갈 길을 나는 내 갈길을 가게 된다. 추근은 패도를 좋아했고, 술마시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칼과 술은 어쨌든 여자들이 잘 쓰는 물건이 아니다. 추근은 자신의 이름을 경웅(競雄)으로 개명하기도 한다. 그녀는 일생동안 '자복(雌伏)'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왕정균은 추근의 위대한 이미지 뒤에서 고독한 그림자로 남는다. 1907년 추근의 영웅적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사료에 따르면, 추근의 사후 왕정균은 큰 변고를 맞는다. 몇 달간 탕약을 마시고 슬픔이 지나쳐서 몸이 점점 쇠약하고 말라간다. 2년간 병을 앓다가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고 나이 30살에 죽는다. 담음 삼도 사박엽자 당사산 해향으로 묻는다. 추근과 왕정균은 한 때 합장된다. 나중에 추근의 유골은 항주 외서호 서랭교반으로 이장된다. 그들은 살아서도 함께 하지 못하고, 죽어서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