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이연영(李連英)의 진면모: 만들어진 매국노

중은우시 2014. 4. 6. 22:23

글: 천진망

 

중국역사상 가장 유명한 태감은 아마도 이연영(李連英)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李蓮英"이라고 적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이연영이 태후와 공친왕의 사이에 정보를 전달하여, 정변을 성공시키는데 공헌을 했다고 한다. 그후, 그는 궁중에서 아주 신속히 승진하여 39세에 이품정대(二品頂戴)를 받는다(지금의 차관급).

 

궁중에서뿐아니라, 궁외에서도 이연영의 명성은 혁혁했다. 특히 광서20년(1886년) 사월 순친왕을 모시고 여순, 연태로 가서 북양수군을 검열한 것은 가장 빛나는 일막이다.

 

서태후는 원래 이연영을 파견한 것은 그에게 감군(監軍)의 역할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시동생 순친왕이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도록 보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하의 간언도 신경쓰지 않은 것이다. 이연영도 그 뜻을 잘 이해했다. 그래서 군중에 1개월 머물면서, 아주 조용히 지낸다. 순친왕이 장수나 관리를 만나면, 그는 뒤에 시립해 있으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만일 회견이 없으면 그저 왕야를 따라 방안에 머물러 있었고, 따로 손님은 한 명도 만나지 않는다.

 

갑오전쟁(청일전쟁)에서 중국측이 참패하고, 일본과 <마관조약(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한다. "사백만인동일곡(四百萬人同一哭), 거년금일할대만(去年今日割臺灣)"(사억의 동포가 같이 곡을 한다. 작년 오늘 대만을 떼어내 주었기 때문에.) 이 일과 이연영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어사 안유준(安維峻)의 주절을 보자: "중외의 신민들이 이를 갈며 통한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홍장(李鴻章)의 살을 씹어먹고자 한다. 그리고 또 화의는 황태후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태감 이연영이 실은 이를 좌우했다. 이연영이 어떤 자이기게 감히 정사에 관여한단 말인가. 만일 사실이라면, 조종의 법제에 따라 처벌해야 할 것이고, 이연영은 다시 용납할 수있을 것인가?" 이 주절의 중심사상은 황제에게 이홍장의 목을 베라는 것이고, 말이 나온 김에 이연영도 끌어들인 것이다.

 

주절이 올라오자 서태후는 대노한다. 그때는 이미 황제에게 정무를 돌려준 때였으므로 광서제에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고, 안유준에게 "함부로 입을 놀려 망언을 하고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고 엄히 질책하고, 감히 황제와 황태후의 사이를 이간질하다니, '바로 삭탈관직하라'고 명령한다.

 

서태후의 유지가 내려지자, "직성만천하(直聲滿天下)"하게 된다. 안유준이 변방의 군대로 유배가기 전 며칠동안 축하객이 문에 가득했고, 사람들이 둘러싸서 가는 길을 막을 정도였다. 돈이 없는 사람은 시문을 써서 보내고, 돈이 있는 사람은 노자돈을 보내주었다. 가는 길에 차마음식의 비용은 모조리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냈다. 어사는 이렇게 영광스럽게 군대로 유배간다. 그러나 가련한 이연영은 이때부터 일백여년동안 오명을 뒤집어 쓴다.

 

만일 정말 매관매직하고 법을 농단했다면, 그는 억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질책하는 제대로된 증거를 내놓지는 못하고 있다. 만일 광서6년에서 8년까지에 어사는 "사실을 열거해서" 태후에게 이연영을 고발한다. 태후가 그 글을 읽고 대노하여, 즉시 이연영을 데려오라고 하고, '몽둥이를 준비시키라"고 명령한다. "좌우의 궁녀들은 모두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얼굴색이 하앴다." 이연영이 도착했는데, 얼굴색은 담담했고,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 태후도 그와 말하지 않고, 그저 항제를 모시는 궁녀인 영모(榮某)를 몽둥이로 막 때려서 죽게 만든다. 일이 다 끝나자 이연영에게 말한다. 어제 누군가가 너를 고발했다. 주로 경제와 생활에서의 작풍문제이다. 너는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음 날, 이연영은 변호장을 올려서 하나하나 반박한다:

 

이연영이 스스로 변명한 것을 요약해서 보도록 하자.

 

제1조, 아들 조카가 그의 명함을 들고 각 성으로 가서 돈을 긁어모았다는 것에 대하여. 변명하여 말하기를: 일이 있어서 외관과 연락할 때면 명함을 쓴다. 그러나 명함은 모두 스스로 직접 친필로 쓰고, 사유를 열거하고, 서명을 붙인다. 만일 아들과 조카가 나의 명함을 가지고 곳곳을 다니면서 사기를 쳤다면, 고발인은 물증을 제시해달라. 어느 명함에 내가 나의 아들과 조카게게 외관에게 사기를 친 일이 있는지 보자.

 

제8조, 거액의 재산의 내력이 불명하다는 것에 대하여, 변명하여 말하기를: 집안에 확실히 자사니호(紫砂泥壺), 옥취백채(玉翠白菜), 비취연호(翡翠煙壺)같은 진귀한 골동품이 있다. 혹은 내가 유리창에서 사온 것이고, 혹은 태후께서 하사하신 것이다. 전자는 영수증이 있고, 후자는 조서가 있다. 어째 재산의 내력이 불명하다고 할 것인가? 지안문내(地安門內) 황화문대가(黃花門大街) 동쪽입구 주초국후통(酒醋局胡同)의 주택은 중산계층의 집보다 조건이 약간 좋을 뿐이다. 만일 "그것이 예제를 벗어난" 호화주택이라고 한다면 사실이 아니다.

 

제9조, 그가 '널리 처,첩을 거둬들였다"는 것에 대하여 변명하여 말하기를, "나는 처가 1명뿐이다. 14년전, 집안의 자잘한 일들을 처리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친구 이보산(李寶珊)의 소개로 자녀도 없고, 재산도 없는 과부 묘씨(苗氏)와 결혼했다. 나와 결혼하고나서, 그녀는 거처할 집을 가지게 되었고, 수절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분명히 "절의양전(節義兩全)"의 조은 일이다 어찌 내가 '나쁜 마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말인가.

 

제10조, 각성의 고관들이 경성을 드나들면, 나는 반드시 그들에게 수천 내지 수만의 돈을 뜯어냈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변명하여 말하기를, 이렇게 중대한 "의탁현훼(擬度懸揣)"의 말일 뿐이다. 단 하나의 증거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고발인에게 명백히 지적해달라고 하고 싶다. 언제 누가 나에게 얼마의 돈을 주었는지.

 

변호장을 올리자, 서태후는 사람을 보내어 하나하나 조사한다. 그리고 이연영의 자아변호가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다. 이 일은 이렇게 끝이 난다. 그러나, 이연영은 항상 욕을 먹었다.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청나라말기에는 "양당제(兩黨制)"였다. 소위 "제당(帝黨)"과 "후당(后黨)"이다. 제당은 대외적으로 강경하고 대내적으로 급진적인 개혁을 호소한다. 후당은 대외적으로 지중(持重)하고, 대내적으로 점진적인 개량을 강조했다. 오늘날의 말로 하자면, 제당에는 '분청(憤靑)'들이 많고, 후당에는 '정영(精英, 엘리트)"들이 많았다. 제당은 감히 직접 서태후에게 뭐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그저 그들의 마음 속에 서태후가 중시하는 심복을 향해서 칼을 들이밀었다. '청군측(淸君側)'의 게임을 벌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외조의 이홍장, 내정의 이연영이 사람들의 과녁이 된다. 일이 있든 없든 두 이씨를 문제삼는다.

 

이연영은 원래 저자세를 유지한 태감이다. 그런데 고자세의 '매국노'로 여론조작을 당했다. 그로서는 억울하고 비참하기 그지없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