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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좌종당의 성격

by 중은우시 2014. 5. 30.

글: 문재봉(文裁縫)

 

 

 

 

비록 좌종당(左宗棠)이 어려서 생활이 힘들었지만, 그가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에 참가하고, 업적을 쌓으려는 결심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3살부터, 좌종당은 글을 읽는다. 그가 4살때, '사서오경'을 줄줄 외웠다, 그가 9살때 좌종당은 스스로 문장을 만들 수 있었고, 친히 팔고문을 썼다.

 

같은 시기에 책을 외우지도 못하고 '양상군자'마저도 참지 못하고 그를 '폐물, 무능'이라고 욕했던 증국번과 비교하자면, 필자는 좌종당은 독서의 천재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아쉬운 점은 좌종당이 '천재'이지만, '범인' 특유의 운은 없었다는 것이다.

 

청나라 도광6년(1826년), 14살의 좌동당은 그 해의 동시(童試)에 참가한다.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일거에 1등을 차지하여 그는 수재(秀才)가 된다. 나중에, 좌종당의 가족들이 차례로 죽으면서, 도광12년(1832년)때 좌종당은 비로소 향시(鄕試)에 참가한다. 그리고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된다.

 

알아야 할 것은 이번에 향시에 '의외'로 합격한 것은 좌종당에게 가희 일파삼절(一波三折)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제1차로 성적을 평가할 때, 좌종당의 답안지는 합격자에 들지 못했다. 다만 제2차 재심사때 좌종당의 시험지는 다시 주고관(主考官)에 의하여 선택된다. 그는 이렇게 하여 행운스럽게 합격한다. 호남제18명으로 거인에 합격한다.

 

마치 그 이후부터 좌종당의 운은 모조리 없어진 듯하다.

 

거인에 합격한 다음 해,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하여, 도광13년(1833년) 봄, 21세의 좌종당은 큰 뜻을 품고 부친, 계모와 부인(막 결혼한)을 떠나 혼자서 고향을 떠나, 호남성성 장사로 간다. 거기의 가장 유명한 서원인 악록서원(岳麓書院)에 들어간다. 그는 이곳에서 새로운 전투를 시작해야 한다.

 

좌종당이 악록서원에 들어간 다음 해, 즉 도광14년(1834년) 봄, 이미 24세가 되고 수재(좌종당보다 1등급 아래임)칭호를 얻은 증국번도 이 곳에 와서 좌종당의 사제가 된다.

 

좌종당과 증국번, 이 미래 전체 중국을 바꾸고 심지어 전체 세계를 바꾸는 "대청제국의 두 별"이 이렇게 극적으로 악록서원에서 같이 공부하며, 이곳의 대유학자 구양후균(歐陽厚均)의 제자가 된다. 다만 아쉽게도, 그들은 비록 같은 서원의 동문사형제이지만, 그들은 서로 한번도 만난 적이 없고, 한번도 교류한 적이 없다. 이것은 절대로 유감이다.

 

집안에 어느 정도 자산이 있던 증국번과 비교하자면, 좌종당은 비록 '종학십년(從學十年)의 결심을 했지만, 집안이 가난하여 이런 귀족학교의 학비를 실로 부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겨우 1년만 공부하고, 증국번이 막 입학할 때, 좌종당은 어쩔 수 없이 악록서원을 떠나서 이름도 전해지지 않는 공립학교로 옮겨가서 자신의 새로운 학습여정을 시작한다.

 

당연히, 좌종당이 악록서원을 떠나기는 했지만, 그는 하나의 전설을 남기고, 좋은 친구 하나를 얻는다.

 

죄종당의 전설은 1년동안 7번의 모의시험에서 좌종당이 모조리 1등을 차지한 일이다. 이런 성적은 전무후후하며,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은 기록이다.

 

죄종당이 사귀게된 좋은 친구는 바로 미래 '상군'의 창시자중 하나이자, 증국번의 '제일막료'인 곽숭도(郭嵩燾)이다.

 

이런 인물을 사귀었으니, 좌종당이 증국번과 가까워지는 것은 쉬운 일이다. 다만 아직은 모두 어떤 관직을 맡지 않았고, 과거에 우선 합격해야 한다. 3번만에 과거에 합격하여 한림이 된 증국번과 비교하자면, 좌종당은 비록 아주 노력하였지만, 그의 운은 향시때 이미 다 써버린 것같다. 이제는 '악순환'의 고리에 들어갔다.

 

1933년, 1835년, 1838년 좌종당은 연속 3번이나 과거시험에 참가하지만, 모두 실패로 끝난다. 좌종당의 실패원인은 아주 웃긴다. 시험관들은 그의 팔고문의 실력이 모자란다고 본 것이 아니라 그가 쓴 글자가 너무 엉망이라고 하여 불합격시킨 것이다.

 

이것은 좌종당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알아야 할 것은 무수한 사정이 우리에게 말해준다. 글자를 잘 쓰는 것은 주군에게 잘 보일 수 있고, 승진이 빨라진다. 어쨌든 상사는 공문을 볼 때 보기 싫은 글자를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알아야 할 것은 그 컴퓨터도 나타나지 않았던 시기에 글자를 보는게 그 사람을 보는 것같다. 글자를 잘 못쓴다면 진정한 '신동'이라고 하더라도 방법이 없다.

 

과거에서의 계속된 실패는 한때 좌종당으로 하여금 고향에서 부친의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그의 내심에 고통을 주었을 뿐아니라, 그의 심령에 거대한 상처를 남긴다. 더욱 심한 것은 좌종당의 집안이 가난하여, 그가 20살때 상담의 대갓집규수 주(周)씨와 결혼할 때 좌씨집안은 혼례를 치를 돈이 없어서, 좌종당이 데릴사위로 주씨집안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믿는다. 오늘날에도 이런 '데릴사위'라는 여자의 집에 들어가는 행위는 남자로서는 난감한 일이다. 하물며 남존여비사상이 심하던 당시에 남자는 반드시 성가입업(成家立業)해야했다.

 

이처럼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거인에 대하여 좌종당의 장인,장모는 그를 백안시했다. 이것은 오만한 좌종당으로서는 더욱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나날이 견디기 힘들어지자, 그는 대들보에 목을 맬 생각까지 한다. 다행히 좌종당의 부인 주씨는 단장현혜하며,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렸다. 그녀의 도움하에, 좌종당은 비로소 이 견디기 힘든 나날을 견뎠던 것이다.

 

"화폐복지소의(禍兮福之所倚), 복혜화지소복(福兮禍之所伏)"  누가 알았으랴, 비록 과거시험에서는 연이어 실패하여, 좌종당의 신심에 큰 상처를 주었지만, 돌연한 '거변'은 좌종당의 인생에 또 다른 휘황한 성취를 주게 될줄은. 나중에 좌종당은 매번 그 어려웠던 세월을 회고할 때마다 그는 항상 '새옹지마'라는 느낌을 드러내곤 했다.

 

이 돌연한 '거변'은 바로 홍수전이 이끄는 태평천국의 난이다.

 

함풍2년(1852년), 홍수전은 태평군을 이끌고 광서방어선을 돌파한다. 그들의 군대는 호남으로 밀려들어오고 일거에 호남의 성회도시 장사를 포위한다.

 

이것은 절대로 져서는 안되는 전투이다. 좌종당은 곽숭도의 호소(號召)에 응하여, 출산하여 '장사보위전'에 참가한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명성을 떨치고, 이때부터 자신의 건공입업, 광종요조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나중에 호남순무 장량기의 추천으로 좌종당은 정식으로 자신의 '사제'인 증국번을 만난다. 그때 모친상을 당하여 수효(守孝)하고 있던 증국번은 이때부터 멋진 파트너로서 수십년간 긴밀히 합작하는 시작점이 된다.

 

이때부터 이미 사십여세가 되도록 아무런 성취도 얻지 못하고 아무런 명성도 거두지 못했던 좌종당은 마침내 자신의 만복경륜(滿腹經綸), 일강열혈(一腔熱血)에 의존하여, 마침내 자신이 두각을 나타내는 첫걸음을 디딘다. 그리고 양관대도, 전도무량한 관료사회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누가 알았으랴 어러해동안 '데릴사위의 신분으로 매년 과거에 떵러지던' 경력을 지닌 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은 비범하다고 여기고 제갈공명이 다시 세상에 내려왔다'고 자부하던 좌종당은 극도의 자비(自卑)와 극도의 자존(自尊)이 한 몸에 모여서, 좌종당으로 하여금 봉망필로(鋒芒畢露), 구무차란(口無遮란), 강직격렬(剛直激烈)한 개성을 기른다. 그리고 좌종당은 말을 하면서 한번도 결과를 신경쓰지 않았고, 남의 감정따위는 더더구나 신경쓰지 않았다.

 

이런 성격은 당연히 쉽게 다른 사람의 원한을 산다. 호림익(胡林翼)은 일찌기 그를 이렇게 비판한 바 있다: "강렬이근어교격(剛烈而近於矯激), 면절인과(面折人過), 불소관가(不少寬假)". 즉, 너는 자주 다른 사람을 면전에서 비판하는데, 조금도 봐주지 않는다. 이것은 잘못되었다. 사람들이 너를 원망할 것이다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다만, 호림익의 이런 비판에 대하여 좌종당은 그저 원래 하던대로 계속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생각때문에 자신을 바꾸는 법이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를 잘못되었다고 평가하더라도 그것을 신경쓰지도 않았다.

 

개성있지만, 너무 개성이 강했다. 알아야 할 것은 청말의 그 만마제암(萬馬齊暗), 사기침침(死氣沉沉), 함혼화기(含混和氣)의 분위기하에서 죄종당의 이런 군계일학같은 개성은 절대로 당시의 독특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여기서 예를 하나 들어보기로 하자. 좌종당의 성격이 불같았다는 것은 들어보았을텐데, 도대체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기로 하자:

 

좌종당이 아직 보통막료로 있을 때, 한번은 호남순무 장량기(張亮基)를 따라 회의에 참석했다. 그런데 정식 군사회의에서 그는 영주진총병(永州鎭總兵) 번섭(樊燮)과 말다툼을 벌였다. 쌍방은 갈수록 말싸움이 격렬해지고 말은 점점 더 세졌다.

 

결국 마지막에 죄종당은 화가 난 나머지 자리에서 튀어 올라, 번섭에게 발길질을 한번 날린다. 그리하여 번법은 그 자리에 뻗어버린다. 이제 좌종당은 큰 화를 불러오게 되었다. 번섭이 어찌 이런 일을 당하고 가만히 있겠는가. 그는 신속히 일어나서, 칼을 뽑아들고 싸울 준비를 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한꺼번에 달려들어서 두 사람을 떼어놓아야 했다.

 

모두 싸움을 말리는 동안 좌종당은 비록 한번 발길질로 우세를 점했으면서도 말로도 지지 않았다. 그는 번섭에게 큰 소리로 말한다: "왕빠단, 꺼져라!!" 이 말로 번섭과 좌종당 간에는 원한은 확실하게 맺어지게 된다.

 

나중에 분노를 금치 못하던 번섭은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났다. 당당한 국가의 2품고관이 하급의 소소한 사야(師爺)에게 얻어맞다니, 정말 이를 참으면 더 참을 게 뭐가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자, 번섭은 즉시 상소를 올려 좌종당을 탄핵한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교만하기 이를 데 없으며, 일개 포의신분으로 국가의 중요관리를 상처입었다. 이것은 반란이며, 반드시 엄벌해야 한다. 그를 능지처참해서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해야할 것이다."

 

함풍제의 처음 의견은 "소소한 서민을 어찌 총병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를 죽이면 된다." 그러나 나중에 호림익, 증국번등이 전력으로 도와준 덕분이 이 일은 "대사화소(大事化小), 소사화료(小事化了)"(큰 사건을 작은 사건으로 만들고, 작은 사건은 흐지부지한 사건으로 만들다)하게 된다. 좌종당은 목숨을 부지한다. 가련한 번섭은 괜히 한 대 맞았고, 더 말도 못하게 되어버린다.

 

나중에, 이 불공정한 대우로 인하여, 변섭은 결연히 관직을 박차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일을 자신의 일생에서 최대의 치욕으로 여긴다. 나중에, 변섭은 좌종당이 그를 "왕빠단, 꺼저라!"고 욕한 6글자를 자신의 가족패위에 새겨서 조상의 영전에 세워두고 자신의 후대자손들에게 나중에 한림이 되면 좌종당보다 더 높은 관리가 되면, 원한을 갚고 복수를 한 것으로 쳐서 이 목패를 불살라도 좋다고 하였다.

 

이런 일을 볼 때마다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변섭. 당신은 얼마나 마음이 상했는가?" 

 

이것이 바로 좌종당의 사람됨이다. 비록 그는 박학다식, 다재다능하지만, 그는 자신의 재주를 믿고 오만했으며, 그런 분야로는 독보적이었다.

 

이런 성격때문에, 좌종당이 결정한 일은 소 열마리가 와도 되돌리지를 못했다;이런 분세질속(憤世嫉俗)의 성격으로 좌종당은 관료사회의 허위를 그냥 보아넘기지 못했다.

 

자신을 길러준 증국번에 대하여, 좌종당은 그의 노모심산(老謀深算), 처처근신(處處謹愼)의 본성을 그낭 보아넘지지 못했다. 그래서 나중에, 좌종당과 증국번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된다. 심지어 서로 조화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리고 사람됨이 원만하고 복잡다변한 이홍장에 대하여 좌종당은 더더욱 콧방귀도 뀌지 않고, 무시했다. 나중에 이홍장과는 각종 문제에서 어사망파(魚死網破), 양패구상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좌종당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가혹하게 대했고, 어떨 때는 자기 마음대로 했다. 조소하고 냉소하는 측면에서 좌종당은 가히 천재적이다. 그의 수하에서 일을 한 사람은 모두 이런 '조금만 잘못하면 욕을 잔뜩 얻어먹게 되는' 그의 성격을 견디지 못해서 모두 그를 떠나버린다. 당연히, 이것은 당신이 재능이 있는 경우의 말이다. 재능이 없다면 아예 무시를 당할 것이다. 욕조차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