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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옹정제)

옹정제와 상서(祥瑞)

by 중은우시 2014. 5. 30.

글: 문재봉(文裁縫)

 

옹정제는 일생동안 상서를 신봉했다. 그리고 상서에 대하여 많이 얘기한다. 그러다보니 각급관료들도 황제가 좋아하는 것에 맞추어 속속 황제에게 "하늘에서 감로가 내렸다(天降甘露)" "기린이 나타났다" "서지(瑞芝)가 나타났다"는 등의 보기드문 상서에 대한 보고를 올린 기록이 많다. 옹정제때의 사료를 뒤져보면, 이런 류의 기재가 아주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가화(嘉禾)"의 출현. 옹정2년(1724), 순천부는 '서곡일경사수(瑞穀一莖四穗)"(한줄기에 이삭 4개)가 나타났다고 보고한다; 옹정5년, 전문경은 서곡 '일경십오수"라고 보고한다; 옹정5년 어얼쿤투라는 보리가 '일경십오수"라고 보고한다: 옹정7년, 장광사는 귀주에서 보리가 "일수칠백립(一穗七百粒), 매수장지이척다(每穗長至二尺多)"(한 이삭에 700개의 낱알이 있고, 이삭마다 길이기 2척여에 달한다); 옹정7년 순천부에서 '용조곡(龍爪穀)"이 나타났다고 보고한다는 등등의 사례가 있다. 옹정제는 이를 듣고 기뻐했을 뿐아니라, 사람을 시켜 <가화도>, <서곡도>를 그리게 하고 친히 발문을 써서 스스로 태평성세가 되니 하늘에서 상서를 내린다고 자화자찬했다.

 

둘째, '기초(耆草)", "서지(瑞芝)"가 자라다. 이런 일은 주로 동릉(東陵) 지구에서 나타났다. 옹정원년(1723), 마란관총병이 보고하기를 순치제의 효릉에 기초가 자란다고 한다; 옹정7년, 내무부대신이 보고하기를 경릉의 비석누각에 영지가 자란다고 보고한다; 옹정10년, 12년, 마란관총병은 경릉에 영지가 자란다고 보고한다. 이들 기초, 영지는 기이한 상서현상으로 취급되었고 제왕의 공덕이 커서 하늘이 감동해야 세상에 나타난다고 보았다.

 

셋째, 서린(瑞麟)이 태어나다. 옹정10년, 산동에서는 거야(鋸野)의 민가에 소가 서린을 낳았다고 보고한다. 온 몸에 인갑(麟甲)으로 덥혀 있고, 눈이 부시는 광채를 발한다고 했다. 옹정11년, 사천염정은 농가의 소가 서린을 낳았다고 보고하고, 그림을 그려서 바친다. 그들은 옹정제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이것은 '성인이 태어날 때" 비로소 나타나는 상서현상이라고 말하였다.

 

넷째, "봉황(鳳凰)"이 나타나다. 봉황은 원래 전설의 서조(瑞鳥)이다. 현실에서는 아예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옹정8년, 산일대신 상명은 보고하여 말하기를, 방산(房山)에 한 마리의 봉황이 나타났는데 이 봉황은 "오색을 모두 갖추고, 빛이 찬란하다"고 말한다. 고인들은 봉황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래서 옹정제는 보고를 받고는 이를 믿어 의심치 않고 대거 자랑하며 사책에 기록하게 한다.

 

다섯째, "오성연주(五星聯珠)". 오성연주는 행성가운데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의 5대행성이 태양의 한쪽 45도 범위내에 몰려있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이상현상은 수백년에 한번씩 나타난다. 그래서 고인들은 이를 상서의 길조라고 여기고 대거 선전했다. 그래서 옹정3년 이월 초이틀에 나타난 오성연주는 옹정제의 상서를 좋아하는 심리에 딱 맞아떨어졌다.

 

여섯째, 서운(瑞雲)이 나타나다. '서운'은 기실 오색구름을 말한다. 이런 오색구름이 나타난 시간은 옹정원년 구월 초하루이다. 이 날은 옹정제의 부친 강희제, 모후 효공인황후를 경릉의 지궁에 매장한 날이다. 강희제와 효공황후의 관이 지하에 매장될 때 어떤 관리가 돌연 보고를 한다. 경릉의 보정 서북방향에 오색구름이 나타났다고. 옹정제는 즉시 하늘에 감사인사를 하고 만면에 눈물을 흘린다. 대신들은 즉시 황상(옹정제)가 효순하고, 대행황제(강희제)의 공덕이 융성하여 이런 상서가 나타났다고 아부한다. 옹정제는 즉시 사람을 시켜 이를 사서에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게 한다.

 

옹정제는 비록 상서를 숭상했지만, 걱정도 있었다. 후인들이 그를 비웃을까봐. 그래서 그는 상유(上諭)에 이렇게 썼다: "짐은 원래 상서를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욕개미창(欲蓋彌彰), 자기기인(自欺欺人,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다)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