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옹정제)

옹정제는 왜 동복(同腹) 동생과 사이가 나빴을까?

중은우시 2014. 4. 4. 10:05

글: 우좌(于左)

 

옹정제의 동생들 가운데 한 사람의 신분이 가장 특수하다. 그는 바로 십사아거(十四阿哥) 윤제(胤禵)이다.

옹정제는 모두 2명의 동모(同母) 동생을 두었다. 육아거(六阿哥) 윤조(胤祚)는 요절해서 윤제만이 유일하게 배같은 동생으로 남았다. 이치대로라면, 형제 두 사람의 관계는 친밀해야 한다. 재미있는 점은 윤제는 팔아거(八阿哥) 윤사(胤禩)와 관계가 아주 좋았고, 오히려 자신의 배같은 형인 사아거(四阿哥) 윤진(胤禛)과의 관계는 냉담했다.

윤제와 팔아거 윤사의 관계가 좋은 것은 무슨 비밀도 아니었다. 황태자 윤잉(胤礽)의 제1차 폐위때, 윤사는 황태자에 오르고자 욕심을 냈으나 부황에 의하여 감금되어, 처분을 기다리게 된다. 윤사와 가까운 몇몇 형제들은 모두 그의 편을 들어서 말을 하는데,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구아거(九阿哥) 윤당(胤禟)이었고, 앞에 나서서 말을 한 사람은 십사아거 윤제였다. 그는 부황의 앞으로 나아가서 이렇게 말한다: "팔아거는 그런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담보하겠습니다."

 

윤제는 평상시에 부황의 총애를 많이 받았다. 그러나 이때는 강희제의 화가 머리끝까지 난 때였다. 즉시 자신의 패도를 뽑아서 직접 윤제를 죽이려고 한다. 다행히 윤기(胤祺)가 곁에서 죽어라 부황을 붙잡고 매달리는 바람에 윤제는 칼을 맞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채찍질은 심하게 당한다. 강희54년 겨울이 되어 윤사는 상한(傷寒)을 얻는데, 강희제는 윤제가 윤사와 친한 것을 알고, 그에게 어의를 데리고 가서 윤사를 보살피고 병을 치료하도록 명한다.

윤제가 앞장서서 팔아거를 위하여 편을 들어주고 있을 때, 그의 나이 겨우 스물몇살이었다. 몇년 후, 윤제는 더욱 성숙해지고 나서는 그도 자신이 팔아거 윤사를 위하여 앞장섰던 것이 얼마나 유치한 일인지 알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황의 마음 속에 윤제 자신의 비중이 팔아거 윤사보다 훨씬 무거웠기 대문이다.

 

강희제는 대노하여 칼을 뽑아 윤제를 향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이 철없고 진퇴를 모르는 십사아거를 혼내줄 생각이었을 것이다. 병이든 어린 아들을 위하여 강희제는 일찌기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친히 찾아가서 보살핀 바 있다.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주 깊었다. 그런데 어찌 지금 칼을 뽑아 윤제를 베겠는가?

 

또 한가지 주장은 이렇다: 강희제는 원래 황위를 십사아거 윤제에게 넘겨주려고 했다. 이런 소문은 아무런 근거없이 나온 것이 아니다.

자신이 죽은 후의 후계자문제에 대하여 노년의 강희제는 분명히 확정된 후보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도대체 사아거 윤진인가 아닌가? 우리는 또 다른 각도에서 추측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 반드시 고려할 요소는 나이이다. 동등한 조건하에서, 강희제는 성숙하면서 젊은 아들을 고르고자 했을 것이다. 형제들을 잘 대해주는 아들을 고르고자 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십사아거는 조건에 부합한다.

 

강희57년, 윤제는 무원대장군(撫遠大將軍)에 임명되어, 군대를 이끌고 처망아라부탄을 토벌하러 간다. 윤제가 출정하기 전에, 강희제는 태화전에서 친히 그에게 대장군인을 수여한다. 윤제는 갑옷을 입고, 대전에 올라 대장군인을 받는다. 출정하지 않는 모든 황자 및 2품이상의 대신들도 모두 망복(蟒服)을 입고 오문(午門)의 바깥에서 기다렸고, 윤제를 배웅한다. 이러한 전투에 나서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다. 강희제는 이 영광을 십사아거 윤제에게 넘겨준다. 강희제에게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실로 너무 무감각한 것이다. 동시에 윤제는 여러 형제들 중에서 돋보였다. 그가 미래에 대하여 야망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더욱 황당하다.

 

강희제는 8살에 등극하고, 황제로 육십여년간 재위한다. 사람을 수도 없이 많이 겪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에 대하여 특별히 신경을 썼다. 윤제는 단지 패자(貝子)였고, 그의 앞에는 십여명의 형들이 있다. 강희제가 그를 골라서 서북으로 병력을 이끌고 가게 하여, 독당일면(獨當一面)하게 한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다. 당연히 아주 깊은 뜻이 있다.

 

병력을 이끌고 전투에 나서는 것은 아이들 장난이 아니다. 청나라때 강희연간에 대청제국의 외부로부터의 위협은 주로 서북에서 왔다. 윤제가 과연 그의 형인 윤진이 말하는 것처럼 멍청하고 막무가내였다면 강희제는 그를 자신의 눈아래 두고 시시때때로 감독했을 것이다. 어찌 그를 먼 서북으로 보내어 이렇게 중요한 임무를 맡겼을 것인가.

 

실제로, 윤제는 서북전선에서의 업무처리에 큰 잘못이 없었다. 강희60년 십월 그는 북경으로 불려온다. 강희제는 직접 그를 만나 얘기를 나눈다. 다음 해 삼월, 윤제는 다시 서북으로 돌아간다. 그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강희제는 돌연 사망한다.

 

옹정은 윤제를 불러들인다. 그러나, 윤제가 거의 북경에 도착할 때가 되자, 옹정제는 그가 북경성내로 진입하지 못하게 막는다. 그에게 경릉(景陵)에서 기다려, 부황의 장례를 치르는데 참가하라고 한 것이다.

 

옹정제의 처리방식은 첫째, 윤제를 그가 장악한 서북군대와 분리시킨 것이다. 그 후에 다시 그가 북경성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또한 그가 다른 황자들과 만나지 못하도록 격리시킨다. 윤제는 경릉에 남아서, 들어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게 된다. 그는 나홀로 장군이 된다. 실제로 윤제가 서북에 계속 머물렀다 하더라도 그의 기회는 크지 않다. 왜냐하면 옹정제는 일찌감치 윤제의 곁에 자기의 사람을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연갱요(年羹堯)이다.

 

윤제는 경릉에서 계속 하릴없이 대기하고 있었다. 옹정제의 말에 따르면, 그로 하여금 수시로 부황의 능묘를 바라보며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도록 하였다. 윤제의 마음 속에는 분명히 원한이 교차했을 것이다. 옹정제에 대한 태도는 분명히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를 옹정제는 하나하나 마음에 새긴다. 그리고 윤제가 "짐의 앞에서 오만방자하고 예의와 분수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고 말한다.

 

옹정제는 먼저 윤제에게 군왕의 작위를 내린다. 그리고 난 후 금방 패자로 격을 낮춘다. 옹전4년부터, 윤제와 그의 아들은 수황전(壽皇殿)에 연금된다. 몇년후, 채회새(蔡懷璽)라는 사람이 몰래 서신을 한 통 써서 윤제가 연금된 집에 던져넣는다. 서신에서는 윤제를 황제라고 불렀다. 윤제는 일을 만들기 싫어서, 서신중의 일부 문구를 잘라낸 다음 보관한다. 윤제는 자신을 감시하는 장령에게 이건 사소한 일이니 임의로 처리해도 되고, 밖에 알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옹정제는 이를 근거로 윤제가 이때까지도 마음을 바로 잡지 못하고, 마음 속으로 패란의 뜻을 품고 있으며, 반성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질책을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옹정제의 이 배같은 동생에 대하여 얼마나 엄밀하게 감시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일이다.

 

건륭제가 즉위하면서 비로소 이 십사황숙은 석방된다. 윤제는 건륭20년까지 살았다. 옹정제와는 동모형제이므로, 윤제는 아치나와 사스헤이가 되지는 않았고, 그들처럼 복질로 감옥에서 죽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