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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옹정제)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 역사상 궁정내막을 가장 많이 폭로한 기서

by 중은우시 2013. 11. 10.

글: 유계흥(劉繼興) 

 

 

 

청나라 옹정7년(1729년), 옹정제는 증정(曾靜) 반청사건으로 <대의각미록>이라는 책을 간행한다. 책은 4권(卷)으로 되어 있으며 옹정제가 흠정편찬한다. 그 안에는 옹정황제 본인의 10건의 상유(十道上諭), 심문기록과 증정의 진술 47편, 장희등의 진술 2편, 그리고 뒤에는 증정의 <귀인설(歸仁說)>을 붙인다. 목적은 반청복명(反淸復明) 사상을 지닌 한족지식인들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중국역사상 유일하게 지존황제와 평민죄수간에 진행된 대변론의 책이고 사상 궁정내막과 비밀을 가장 많이 누설한 어제국서(御製國書)이다.

 

<대의각미록>의 간행은 호남의 증정투서(投書)사건으로 인하여 쓰게 된다.

 

증정이라는 사람은 성격이 고루했고, 도학(道學)을 담론하기를 즐겼으며 반청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청나라때 유명한 서생 '혁명가'이다. 그는 1679년에 태어났고, 1741년에 죽는다. 호안 영흥 이어당진 사람이다. 어려서 부친을 잃고 모친이 그를 양육했는데, 집안사정은 아주 빈한했다. 그는 일찌기 공명에 뜻을 두었으나 여러번 과거에 떨어지면서, 과거를 통해서 관직에 오르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고향에서 문을 걸어닫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자주 학생들에게 반청언론을 산포했다.

 

옹정5년, 증정은 성성(省城, 장사)에서 청나라초기 걸출한 사상가, 시인 겸 시정평론가인 여유량(呂留良)의 글을 읽게 된다. "기중수유수십년(其中雖有數十年), 천황지탑비인간(天荒地非人間)"(그중에 비록 수십년이 있었지만, 하늘은 황폐해지고 땅은 무너져 인간세상이 아니었다). 그는 완전히 탄복을 하고, 여유량이 황제지재(皇帝之才)를 갖추었지만, 황제지명(皇帝之命)은 없었다고 여기게 된다.

 

앙모의 정으로, 증정은 아끼는 제자 장희(張熙)를 절강으로 보내어 여유량을 배알하도록 한다. 그러나 당시는 이미 여유량이 사망한지 40여년이 흐른 뒤였다. 여유량의 아들인 여의중(呂毅中)은 장희에게 부친의 일부 저작을 건네준다. 일기찬(日記纂) 1본, 시집(詩集) 1본, 일기초본(日記草本) 4속(束), 초본문집 4본, 산시고(散詩稿) 1속등이 있었다. 이번 방문이 헛되지 않았던 장희는 이들 저작을 가지고 돌아왔고, 증정은 보물을 얻은 것처럼 크게 기뻐한다.

 

'혁명스승' 여유량의 이들 문집을 자세히 연구한 후, 증정은 자신의 반청정치주장을 더욱 굳건하게 한다. 그는 먼저 <지신록(知新錄)>, <지궤록(知錄)>이라는 두 권의 책을 쓴다. <지신록>에서 그는 대담하게 말한다: "지금 팔십여년간 군주가 없었다. 부득이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총명하고 예지있는 사람을 찾아서 군주로 삼아야....", "중원이 침몰하니, 오랑캐가 그 틈을 타서 신기(神器)를 훔치고, 하늘과 땅을 뒤집어 놓았다.", "화이(華夷)의 구분은 군신의 윤리보다 크다, 화와 이의 관계는 사람과 물건을 나누는 것과 같다." 그리고 또 말했다. "춘추시대의 황제는 공자가 햇어야 한다; 전국시대의 황제는 맹자가 했어야 한다; 진나라 이후의 황제는 정자(程子)가 했어야 한다; 명나라의 황제는 여유량이 했어야 한다. 지금은 호강(豪强)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는 옹정제의 '10대죄상'을 집중적으로 열거했다: '모부(謀父)", "핍모(逼母)", "시형(弑兄)", "도제(屠弟)", "탐재(貪財)", "호살(好殺)", "후주(酒)", "음색(淫色)", "주충(誅忠)", "임공(任控)"등이다 옹정황제는 역사상 보기 드문 폭군이라고 하였다.

 

증정은 "화이지분(華夷之分)"의 이론으로 만주족을 배척했다. 그리고 사방에 선전했다. 군중들이 단결하여 만주족통치에 반항하고 한족이 기업을 광복하도록 고무시켰다. 그는 "모두 취해 있는데 나 혼자 깨어 있다(衆人皆醉我獨醒)"의 계몽사상가같은 자세였다.

 

옹정6년, 증정은 천섬총독(川陝總督) 악종기(岳鍾琪)는 두번에 걸쳐 경성으로 가서 황제를 배알할 것을 청했으나, 황제가 거절했다는 말을 듣는다. 악종기는 악비(岳飛)이 후손이고, 악비는 여진의 송나라 침략으로 억울하게 죽은 것이므로, 악씨집안과 만주족간에는 집안원수사이라고 생각한다. 증정은 제자 장희에게 그의 서신을 데리고 서안으로 가서 악종기를 만나서 만청거병을 책동하도록 한다. 증정의 서신에는 옹정제를 욕하는 내용으로 가득했고, 악비가 항금했던 사적을 들어 악비의 후손인 악종기를 종용했다. 그에게 창끝을 돌려서 금나라의 후예인 만주족을 쳐서 송,명 두 왕조의 복수를 하라고 부추겼다.

 

악종기는 악비의 21세손이다. 무장세가출신이다. 조부인 악진방(岳鎭邦)은 일찌기 좌도옥, 소흥총병을 지낸 바 있다. 악종기 본인은 강희 말년에 서장의 난을 평정할 때 전공을 세워 사천제독이 된다; 그후 옹정2년(1724년), 연갱요(年羹堯) 대장군을 따라 청해로 들어가 나복장단진(羅福藏丹津)의 난을 평정하는데 전공이 탁월했다. 게다가 연갱요가 발호하다가 옹정제에게 숙청되는 바람에, 악종기가 연갱요의 천섬총독 자리를 이어받는다. 일시에 성은이 가득하고, 봄바람처럼 득의만면할 때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천섬총독이라는 자리는 만주족 귀족자제들이 독점해온 자리이다. 악종기가 비록 한군팔기 출신이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질투와 중상의 대상이 되었다. 일부 사람들은 뒤에서 몰래 옹정제에게 그를 험담하는 밀고를 보내어 악종기가 반심을 품고 있다고 말했다. 옹정제가 나중에 얘기한 바에 따르면, 한 바구니에 담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이런 시기와 비방은 모두 전혀 근거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바로 1년전인 옹정5년(1727년), 노한민(盧漢民)이라는 사람이 돌연 성도의 길거리에서 크게 소리쳤다: "악공야(岳公爺)가 천섬병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서성문밖에 흑점을 열었고, 사람을 죽이려 한다!" 당시 유언비어가 곳곳에서 나왔고, 인심이 황황했다. 당연히 이 노한민은 나중에 바로 체포되었고, 조사를 해본 결과 정신질환자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래서 관련부서에서는 급히 처결하고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노한민사건"이 발생한 후, 악종기는 급히 조정에 인구사직(引咎辭職)을 신청한다. 다만 옹정은 이 일에 대하여 별 일 아니라고 여긴다. 그는 악종기를 질책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악종기로 하여금 '정신을 가다듬어서 짐을 도와서 일을 잘해, 무궁한 복을 만들어 자손들에게 남겨라!"고 한다.

 

성상이 이처럼 자신을 관대하게 대해주니, 악종기는 자연히 감격해 눈물을 흘린다. 청나라조정에 대하여 충성심은 확고했고, 반란을 일으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기회가 있으면 황상에 보답하려는 생각을 가졌다. 이번에 장희가 와서 악종기에게 모반을 권했는데, 이는 악종기가 황제에게 충성심을 보일 좋은 기회였다. 사정이 중대하므로, 악종기는 사람을 보내어 이 서신을 가장 빠른 속도로 옹정에게 밀보하고,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를 요청한다. 밀지는 금방 내려왔다. 옹정은 유지에서 분노하여 말했다. "이런 괴믈을 만나면, 부득이 기이한 방법으로 요리해야 한다"며 심문을 엄격히 하라고 하였다. 옹정은 그리고 앞장서서 건의한다. 원래의 간단한 폭력적이고 거친 고문은 안되고, 인사출동(引蛇出洞)의 방법으로 진술을 유도하여 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라고 말한다.

 

그래서, 악종기는 옹정의 밀지에 따라, 비밀리에 장희를 심문한다. 장희는 약간 기개가 있었다. 죽어도 말하지 않겠다고 한다. 악종기는 궤계를 쓴다. 거짓으로 앞에는 그를 시험한 것이라고 하면서 그와 피를 뽑아 맹세를 한다. 악종기는 장희를 보고 이미 자신의 함정에 빠진 것으로 보고, 자신도 일찌감치 반란을 생각했는데 자신의 곁에 제갈량, 유백온과 같은 모사이 없어서, 일시에 손을 쓸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장희는 그 말을 듣고는 속았다. 자신의 스승인 증정이 영명하고 예지가 있으니 그 중임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뿐아니라, 장희는 득의만면하여 악종기에게 말한다. 그들은 호광, 강서, 양광, 운귀의 6개성에 이미 군중을 발동하여, '한번만 부르면 끝난다'고 하면서 반청사업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때, 악종기는 비로소 증정이 막후조종자라는 것을 알았다. 악종기는 진실한 상황을 파악한 후 바로 옹정제에게 보고한다. 장희가 이미 내부사정을 얘기했으므로 증정도 실제상황을 감출 수 없었다. 그들과 절강 여의중, 여유량부자 그리고 제자 엄홍규(嚴鴻逵)등의 관계를 진술한다. 그후, 옹정은 즉시 형부시랑 항란록(杭欒祿), 부총통 당라해(黨羅海)가 호남순무 왕국동(王國棟)과 함께 공동으로 증정을 붙잡아 심문했다.

 

옹정제는 증정의 황당한 거동이 여유량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난 후, 일찌기 여러해 전에 죽은 여유량을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하게 된다. 여유량은 이전에 조수자중(操守自重)하며, 청나라의 관직을 받지 않고, 제자를 모아서 공부를 가르쳐 명성을 얻는다. 순치제때, 그는 과거에 참가하는데, 나중에 산림에 은거한다. 지방관은 여러번 '산림은일(山林隱逸)'로 그에게 관리로 나서라고 요청하였지만 그는 모두 거절했다. 여유량은 제자를 모아서 가르치면서, 사람들에게 한민족의 입장을 견지하고, 오랑캐정권에 봉사하지 말도록 호소했다. 그의 언어와 문자에서, 한번도 청정부를 합법적인 정권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강희제때, 어떤 사람이 여유량을 '박학굉사(博學宏詞)'로 선발에 참가할 것을 추천했지만, 그는 참가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마침내 삭발하고 화상이 된다. 강희 22년에 병사한다. 여유량이 산림에 은거하였지만, 저서입론(著書立論)한다. 그러나 그의 청나라배격사상과 기개 그리고 학식이 연박(淵博)하여 대강남북에 남아 많은 후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옹정제는 증정과 죽은 여유량은 엄격하게 구분했다: "증정은 그저 짐을 조롱했다. 그러나 여유량은 성조(聖祖), 황고(皇考)의 성덕을 모함했다. 증정의 비방은 유언비어를 잘못 들은 것때문이지만, 여유량은 자신의 억측에서 요망한 말을 만들어 낸 것이다. 여유량의 죄는 극악하고, 증정보다 몇 배나 심하다."

 

그래서, 용안대노한 옹정제는 엄중한 성지를 내린다: "대역 여유량의 모든 문집, 시집, 일기 및 서적중 이리 간행되거나 초록된 것은....1년내에 모조리 불태워 없애라."

 

청나라관리는 한편으로 호남에서 증정, 장희를 체포하고, 한편으로 절강에서 여유량의 가족을 박해했다. 여의중과 심재관(沈在寬, 엄홍규의 제자)은 주살되고, 죽은지 여러해가 된 여보중(呂中, 여유량의 아들)도 묘에서 끌어내어저 육시(戮屍)의 처분을 받는다. 여, 엄 두 집안의 직계가족으로 16세이상인 남자는 모조리 처결되고, 15세 이하의 모, 처, 자매는 간살되거나, 공신집안의 노비로 보내어 졌다. 실로 참절인환(慘絶人)이었다. 여유량의 '역서(逆書)'를 간행한 차정풍(車鼎豊), 차정분(車鼎賁)도 무도 가을이 지난 후 참수된다. 공용극(孔用克), 주경여(周敬輿)는 금서를 사적으로 소장하고 있어, 역시 '참감후(斬監侯)'된다.

 

옹정은 증정, 강희를 살아있는 증인으로 삼아서 그들을 인내심을 가지고 '개도(開導)', 연화(軟化)시킨다. 그리하여, 강골이 아닌 증정은 반청에서 극력 여유량을 견책하고, 청왕조를 찬양하고 또한 <귀인설>을 써서 이론적으로 청왕조통치의 합법성을 진술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청왕조에 '귀인(歸仁)'하라고 한다. 증정은 동시에 자신이 여유량의 사설(邪說)을 믿은데 대하여 가슴을 치며 참회했고, 무슨 "죽어도 능지처참을 당할 죄는 모조리 여유량의 말에 현혹된 탓"으로 영명한 군주를 오해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옹정에 대하여 대거 가공송덕(歌功頌德)한다. 무슨 "황상은 연충지인(淵衷至仁)하고, 천성지효(天性至孝)하며, 발려지성(發慮至誠)하고, 수기지경(修己至敬)한다. 도덕의 순숙(純熟), 학문의 심연(深淵), 역련(歷練)의 진밀(縝密), 처사(處事)의 정상(精詳), 그리고 일리(一理)의 혼연(渾然)이다." 그리고, "우리 황상은 또한 이처럼 도덕을 모조리 겸비하여 천고를 뛰어넘는다"고 찬미한다. 옹정제가 "수천년만에 태어난 일대 성인"이라고까지 한다.

 

나중에, 옹정은 증정을 특별히 우대한다. 처벌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옥식금의(玉食錦衣)를 다 주어서 편안히 생활하게 해준다. 그는 지방관리에게 증정을 호남관풍정속사(湖南觀風整俗使)로 부임하게 한다. 그리고 혁록(奕祿)에게 명하여 그를 데리고 강녕, 항주, 소주등 각성 학부로 가서 직접 얘기하게 한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얘기하고, 옹정제에 관하 유언비어를 막고, 옹정이 인자하고 효성스러우며 근면하고 애민한다는 각종 공덕을 널리 알리게 했다. 이를 통하여 전국의 문인들의 반청정서를 없애고자 했다.

 

증정을 심문하면서 옹정제는 동생 윤사(允祀), 윤당(允)등의 충실한 부하들이 각지에서 그가 불법적인 수단으로 황위를 찬탈한 내막을 선전하고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증정, 여유량 및 제자 엄홍규의 반청관점에 대하여 청왕조가 중국을 통치하는 것의 합법성에 관하여 변론하고, 증정의 진술 및 <귀인설>을 묶어서 <대의각미록>이라는 4권의 책으로 간행하여 천하에 뿌린다. 이 책이 첫머리는 옹정이 만언장유(萬言長諭)가 있고 그 뒤에는 증정등의 사람이 옥중에서 심문을 받은 진술이 있고, 마지막에 증정의 <귀인설>이라는 글을 붙였다.

 

4권의 <대의각미록>은 증정의 문자옥에 대한 역사기록이며, 아주 높은 역사사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옹정제는 증정투서안이 끝난 후, 친히 이 책을 편찬하고 간행했다.

 

<대의각미록>이 간행된 후, 옹정제는 전국의 모든 학당에 반포하여, 교관들에게 선비들이 진지하게 보고서 이해하도록 하고, 학습을 소홀히 하는 자는 치죄했다. 1730년 4월 4일, <대의각미록>의 첫번째 각본이 완성된다. 1차로 500책을 인쇄하여, 경성의 문무대신들에게 나누어준다. 제2쇄는 간행후 각성의 고급관리에게 배포한다. 각성의 독무(총독,순무)는 1세트를 받은 후, 성의 인서관에서 이를 범본(范本)으로 하여, 새로운 목판으로 간행해서, 본성의 많은 하급관리들에게 배포하다. 후자들은 다시 현, 진 내이 독서인들에게 전해주었다.

 

강역이 광활한 대청국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글을 몰랐다. 옹정제는 재능과 도덕이 모두 신뢰할 만한 문인을 뽑아서 서북으로 보내어 <대의각미록>의 종지를 강연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오랫동안 유학경전과 권력투쟁에 머리를 박고 있던 경성의 관리들이다. 번화한 도시를 떠나 인적이 드문 시골로 갔다. 그들은 가는 곳에 임시 '용정(龍亭)'을 만들고, 향을 피우며, 장엄한 분위기를 내려 노력하면서, 큰 소리로 <대의각미록>을 강연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난주의 한 강연에는 강연자가 정선보였는데, 개략 1만명이 사병과 백성이 모여 경건하게 들었다고 한다. 당연히 사람이 적어야 할 주천에서도 1만명이 청중으로 왔다. 전국의 기타 각지에서도 <대의각미록>의 강연은 끊이지 않았다. 

 

옹정10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증정투서사건은 윤사의 추종자 및 여유량의 후손을 엄정하게 처벌하고, 증정, 장희를 관대하게 석방함으로써 종결된다. 옹정은 말했다. "짐이 천하를 다스리는데, 개인적으로 좋아한다고 그 사람에게 상을 내리지 않고, 개인적으로 노한다고 그 사람을 처벌하지 않는다." 그리고 명을 내려 말한다. "증정은 짐이 특사한 사람이다." 증정을 석방할 때, 옹정제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짐의 자손은 장래 짐을 폄훼한 것을 가지고 책임을 추궁하고 주살하지 말라."

 

그후, 옹정의 계승자인 건륭은 옹정제와 이 사건에 대한 견해가 달랐다. 심지어 그와 배치된 조치를 취한다. 옹정이 죽은 후, 새로운 황제 건륭은 등극한지 43일만에, 증정, 장희를 걸형(刑)에 처하고, <대의각미록>을 회수하여 없애도록 엄명하고 금서로 정한다. 만일 민간의 누군가가 이 책을 사적으로 소장하거나 읽으면, 일률적으로 처형했다. 이때부터 <대의각미록>은 세계에서 보기 힘든 황제가 편찬한 어제국서로 이백여년동안 햇볕을 보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은 그 책의 신비한 색채를 증가시켰다. <대의각미록>은 지금 옹정연간이 내부원각본(內部原刻本) 및 외성번각본(外省飜刻本)이 있고, 그외에 광서말년 홍공인사서국(仁社書局) 연인본(鉛印本)이 있고, 해방후 중화서국의 배인본(排印本)도 있다.

 

건륭이 옹정의 증정모반사건 처리방식과 전혀 다르게 한 이유는 그 나름대로의 면밀한 고려가 있었다. 그는 청년시대에 이 문자옥의 진행경과를 보았다. 그는 명백히 깨달았다. 부왕은 비방을 천하에 공표하여 자신이 청백함을 밝히려 했지만, 완전히 반대되는 작용을 했다. 증정모반사건과 여유량문자옥사건의 공개심리와 비판에 대하여 실제로는 부왕이 자신을 심판대에 올린 셈이다; 옹정의 "화이지별'에 대한 새로운 해석, 10대죄상에 대한 스스로의 변명, 황궁의 비사와 추악한 일들을 세상에 드러내고, 황자들간에 서로 속고 속이며, 문무대신간의 명창암전(明槍暗箭)등등이 모조리 상세하게 <대의각미록>에 실려 있어, 만승지존인 황제의 이미지에 불리했고, 국조(國祚)와 궁정의 절대기밀을 폭로하는 것이 되어, 역선전작용을 하게 된다. 근본적으로 신민의 '각미(覺迷, 미혹을 깨닫게 하는 것)'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그저 사람들의 반청배만정사를 증강시켰을 뿐이다. 청나라통치에 아주 불리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단사상이 만연하는 것을 막고, 그 해독을 숙청해야 했다. 동시에 이 두 명의 중범죄자를 세상에 남겨서 반면교사로 삼도록 하고자 해도, '감화' 교육의 작용은 나타나지 않는다. 아예 죽여버리는 것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