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풍학영(馮學榮)
청나라조정의 붕괴는 무창의거때문이다. 혁명당인은 만청왕조의 멸망에 확실히 주요한 추진역량이었다. 다만, 사람들이 경시하는 점이 있다: 청나라조정이 무너진 과정에서 기실 '금전'이라는 것이 '윤활제'의 작용을 잘 했다는 것이다. 금전은 확실히 이 역사발전을 추진한 하나의 숨은 동력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원세개와 혁광(奕劻), 나동(那桐), 소덕장(小德張)의 금전게임을 보도록 하자.
모두 알고 있다시피, 신해혁명의 전화 가운데, 조정에서 융유태후에게 퇴위하라고 극력 권한 사람들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은 이 몇 사람이다: 혁광, 나동, 소덕장. 이 세 사람은 사실상, 모두 원세개가 기른 대리인들이다.
이렇게 말하는데 무슨 근거가 있는가? 아래에서 천천히 얘기해보도록 하자.
민국시대에 혁광의 세 아들이 분가를 한다. 분가할 때, 재산분배가 공정하지 못하여, 삼형제가 서로 싸웠다. 이때 부지불식간에 부친 혁광이 신해혁명을 전후하여 원세개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은 역사가 폭로되었다. 이 점에 대하여 우리는 만청귀족 부가(溥佳)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 부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기억하기로 민국초기, 경친왕 혁광이 죽은 후, 그의 세 아들인 재진(載振), 재박(載搏), 재륜(載掄)은 나의 부친에게 그들의 분가를 주재해달라고 청했다. 재박은 그에게 나눠준 현금이 너무 적다고 생각해서 나의 부친에게 말했다: "신해전에 각 방면에서 보내온 금은보화는 말하지 않더라도, 신해혁명때, 융유태후가 <양위조서>를 계속 미루고 내리지 않고 있자, 원세개는 그녀를 겁주어 빨리 조서를 내리게 하기 위하여, 조부(혁광)과 총관 장란덕(張蘭德, 즉 소덕장)에게 한 사람당 300만냥은자를 보내주었다. 그런데 어찌 요만큼만 나누어준단 말인가. 이를 보면, 뇌물을 받는 것이 확실히 그들 권력자와 태감들이 돈을 버는 방법이었다..."
이 자료는 문사자료출판사의 <만청궁정생활견문>의 부가의 <청궁회억>에 있다.
재박이 화가나서 한 이 말은 부지불식간에 아래와 같은 놀라운 사실을 드러낸다:
1. 신해혁명때, 원세개는 혁광에게 300만냥은자의 뇌물을 주었다;
2. 같은 때, 원세개는 대태감 소덕장에게도 300만냥은자를 뇌물로 주었다:
3. 원세개가 돈을 보낸 동기는 혁광, 소덕장에게 융유태후의 퇴위를 권하도록 부탁하기 위함이다.
어떤가? 이 역사는 재미있지 않은가?
부가가 기록해놓은 재박의 말에 대한 증거가 이것 뿐이라고 생각하지는 말라. 이 일에 대한 증언은 그외에도 많다.
마지막 황제 부의는 그의 저서 <나의 전반생> 제2장 <나의 동년>의 제4절 <육경궁독서>에서 혁광이 원세개의 돈을 받아 융유태후에게 퇴위를 권하고, 이로 인하여 대청강산이 멸망한 사정을 기록하고 있다. 부의의 증언의 원화(原話)는 다음과 같다:
"....나(부의)는 당당하게 말했다: '혁광이 원세개의 돈을 받아, 태후에게 나라를 넘기도록 권했다. 대청의 이백여년 천하는 혁광의 손에 끝장났다. 어찌 좋은 시호를 내릴 수 있겠는가. 단지 이런 것을 내릴 수밖에 없다: 추(醜), 류(謬)."
부의의 이 말에서 얘기하는 것은 부의의 부친인 재풍이 이미 사망한 혁광에게 시호 즉 영광스러운 칭호를 내리자고 얘기했을 때, 부의가 반대한 것이다. 반대이유는 바로 부의의 생각으로는 바로 이 혁광이 원세개로부터 뇌물을 받아 융유태후에게 퇴위를 건의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혁광에게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시호를 내리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이뿐아니라, 부의는 같은 장절에서, 만청유신 양정분(梁鼎芬)의 시강일기(侍講日記)에서의 다음과 같은 글도 인용하고 있다:
".....선통9년 정월 초칠일. 경친왕 혁광이 사망했다. 초팔일 유절(遺折)을 올렸다. 내무부대신은 시호로 '철(哲)'을 건의했다. 황상은 불가하다고 하였다....초십일, 세독, 소영, 기령을 접견했을 때 황상이 말하기를, '혁광은 재물을 탐하여 나라를 망쳐서 조상에 죄를 지었다. 나의 대청이백여년의 천하가 그의 한 손에 망쳐졌다. 시호를 내릴 수 없다! 그래서 시호를 '밀(密)'이라고 하였다. 시호를 내리는 법칙에 따르면 예전의 잘못을 보완하는 것을 '밀'이라 한다. 혁광은 원래 큰 죄를 지어 천하가 그를 미워하고 있다. 황상이 이런 말을 하였다는 것을 듣고는 충신의사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정말 영명한 군주로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인용된 위의 글에서 만청유신 양정분의 이런 생각을 엿볼 수 있다:
1. 혁광이 재물을 탐하여 대청강산을 망쳤다.
2. 부의는 혁광에게 시호를 내리는 것을 거절했고, 이것은 영명한 결정이다.
우리는 계속하여 더 많은 증인들의 증언을 듣자.
이어서 나올 증인은 이름이 운보혜(惲寶惠)로 만청시기 육군부 주사이다. 운보혜는 이렇게 생각했다: 원세개가 혁광, 나동, 소덕장을 매수하여, 이들 세 사람이 융유태후를 설득하여, 융유태후가 퇴위결정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운보혜의 원화는 이렇다:
".....혁광의 영혼은 일찌감치 원세개에게 매수되었다....혁광, 나동의 부정부패 뇌물수수는 일찌감치 유명했고, 외부에 소문이 널리 퍼졌다. 그들을 '경나회사(慶那公司)'라고 불렀다. 원세개가 융유태후에게 선양을 핍박할 때까지, 또한 거금으로 내감 장란덕(소덕장)을 매수하여, 위협과 이익으로 유혹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운보혜의 이 증언은 <청말귀족의 명쟁암투>라는 글에 나온다. 문사자료출판사 <만청궁정생활견문> 제65-67페이지에 있다.
다시 또 한 명의 증인을 보자: 만청귀족 재윤(載倫)이다. 재윤은 남들이 잘 알지 못하는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하여, 역시 이렇게 생각한다: 원세개는 혁광, 나동, 소덕장을 매수하여, 이 세사람이 융유태후를 설득하여 결국 융유태후가 퇴위결정을 하게 되엇다고 한다. 우리는 재윤의 원문을 읽어보자:
".....융유태후는 혁명군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태후의 지위를 누리지 못할까봐 두려워했다. 처음에는 역시 싸우자는 것이었다; 나중에 장란덕이 원세개의 뇌물을 받아, 융유에게 공화를 권한다. 공화는 단지 섭정왕의 직권만을 없애는 것이고, 태후의 존엄과 이익은 여전히 똑같이 누릴 수 있다고 한다. 융유태후는 이를 믿어서 황위에서 물러나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융유와 재풍은 모두 나라를 다스릴 인재가 아니다. 혁광, 나동등의 사람은 부정부패하고 뇌물을 받는 무리이다. 원세개는 이를 잘 알아서, 혁광, 나동 그리고 장란덕의 3명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고, 그들에게 대거 뇌물을 뿌린다. 이를 통하여 그들의 재물욕을 만족시켜준다. 그는 한편으로 장란덕을 통하여 융유를 속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혁광, 나동을 통하여 재풍을 견제한다...."
재윤의 이 증언은 <융유와 재풍의 모순>이라는 글에 있다. 문사자료출판사 <만청궁정생활견문> 제77-78페이지에 있다.
또 한 명의 증인이 있다: 재도(載濤)이다. 재도가 누구인가? 재도는 마지막 황제 부의의 숙부이다. 친작은아버지이다. 재도의 이 일에 대한 견해는 상술한 증인들의 말과 들어맞는다. 원세개가 혁광, 나동, 소덕장을 매수하고 이 세 사람이 융유태후를 설득하여 융유태후가 퇴위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재도 증언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그(재풍)이 섭정을 한 후, 눈앞에 있는 것은 원세개였다. 군기대신의 요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혁광은 원(세개)가 돈을 대주어 먹여살리는 자였고 완전히 원세개에게 지배당하고 있었다....원세개는 다시 혁광, 나동이 평소에 탐욕이 크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대량의 금전으로 그들의 마음을 산다. 혁광이 무슨 돈이든 받는다는 것은 아는 사람이 다 알았다. 소문에 의하면, 원세개가 직예총독으로 있을 때, 경왕부의 크고 작은 생일에 필요한 것, 그리고 시집장가보낼 때의 혼수품등을 모조리 공급해부었다고 한다. 혁명이 일어나자, 십월 십칠일 북경의 신문에 혁광의 사적으로 가진 금은보화의 가치는 현금으로 억냥이상이라고....혁광과 나동, 나동과 원세개는 서로 혼인으로 얽혀 있다. 그래서 관계가 밀접했다. 그들의 삼각결탁으로 원세개의 음모는 실현된다....원세개는 이 줄을 따라 사람을 보내어 장(소덕장, 장란덕)과 연락한다. 그에게 거액의 금전을 주기로 약속하고, 그로 하여금 융유태후에게 위협과 이익제공으로 유혹하는 수단으로 원세개가 얼마나 충심을 지니고 있는지 얘기하게 했다. 다만 각 성이 속속 독립하고 외채는 기대하기 어려워 군자금을 댈 수가 없게 된다. 만일 민당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서 혁명군대가 북경으로 쇄도해 들어오면 태후의 생명도 보장할 수 없다; 그들의 요구에 따라 황위를 물러나더라도, 우대조건은 이렇고 저렇다. 여전히 편안하게 궁안에서 살 수 있고, 영화부귀를 누릴 수 있다. 원세개가 모든 것을 담보한다는 등등의 말이었다. 혁광, 나동은 원래 돈만 알지, 청나라조정의 봉건통치가 무너지는지 여부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들 두 사람은 장란덕과 내외에서 내통하여, 융유를 그들의 함정 속으로 끌어들인다....이런 '선양'의 계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모조리 혁광, 나동, 소덕장 세 사람의 손에 의해서이다..."
재도의 이 증언은 문사자료출판사 <만청궁정생활견문> 제79-83페이지에 잇는 재도의 글 <재풍과 원세개의 모순>에 있다.
이제 마지막 증인의 말을 들어보자: 부전(溥銓)이다. 부전이 누구인가? 부전은 대탐관 혁광의 손자이다. 부전은 혁광의 손자로서, 조부의 부정부패와 매국행위를 감추지 않고 말했다. 부전의 말은 이러하다:
"....경자(庚子)이래로, 혁광은 원세개와 한통속이 되었다. 그가 원세개와 접근한 것은 비록 상호이용하자는 뜻이었지만, 그가 혼용무능하고, 이익만 따지기 때문에, 실제로는 계속 원세개에게 이용당했다..."
부전의 말은 문사자료출판사 <만청궁정생활견문> 제275-276페이지 부전의 글 <나의 가정 '경친왕부' 편단>에 있다.
이미 수집한 8명의 증인은 다음과 같다: 부가, 재박, 부의, 양정분, 운보혜, 재윤, 재도, 부전.
이 여덞명의 말을 종합하면, 우리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1. 신해혁명의 포화 가운데 원세개는 혁광, 나동, 소덕장에게 뇌물을 준다;
2. 혁광, 나동, 소덕장은 뇌물을 받은 후, 융유태후에게 퇴위를 권하여, 성공한다.
즉, 청나라조정을 무너뜨린 이 과정에서 '금전'은 윤활제의 작용을 하였고, 이 역사를 추진한 하나의 숨은 동력이었다.
독재로 살고, 부패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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