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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의화단(義和團)은 왜 반란을 일으켰는가?

by 중은우시 2013. 12. 4.

글: 풍학영(馮學榮)

 

이 세상이 문제는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절대다수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말해서 경제문제에 다름아니다. 겉으로 드러나든 아니든간에. 의화단은 "부청멸양(扶淸滅洋)"의 기치를 내걸고, 거기에는 아마도 서양인에 대한 원한의 감정도 들어있겠지만, 사료를 보면, 의화단이 이 운동에서 한 여러가지 행위에서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의화단의 난의 많은 참여자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그들의 강렬한 '경제적 요구사항'이 있었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먼저 1899년 의화단 초기에 서양선교사와 싸울때 내놓은 담화조건이 무엇인지를 보자.

 

1899년 겨울, 의화단은 하북성 경현 송문진 서양교회를 포위공격한다. 청왕조의 지방관은 자신의 관할구역에서 사건이 벌어지고, 자신의 오사모(烏紗帽)가 날아갈까 겁을 내어, 급히 사람을 보내어 포위망을 풀도록 권유한다. 당시의 서양신부는 Léon-Ignace Mangin이고 중문이름은 임덕분(任德芬)이다. 의화단은 임덕분에게 서양교회와 화해하는 3개조건을 내세웠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조건: 서양선교사는 의화단에게 연회를 베풀어라.

둘째 조건: 서양선교사는 의화단에게 희극을 보여줘라.

셋째 조건: 서양선교사는 의화단의 신단에 와서 절을 하라.

 

이를 보면, 첫째, 둘째 조건은 모두 경제적인 요구사항이다. 밥을 먹고, 극을 본다.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이다. 이것은 농민 청년들에게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요구사항이다.

 

우리는 다시 의화단의 두 수령의 출신을 보자.

 

수령1: 조복전(曹福田). 청병(淸兵) 출신. 퇴역이후, 일자리를 찾지 못한 백수청년이다.

수령2: 장덕성(張德成). 선부(船夫) 출신. 외국인의 여객운송선이 그의 일거리를 빼앗아 가자, 그는 실업자가 된다. 이것은 아마도 장덕성이 서양인을 미워하게된 주요원인일 것이다.

 

이를 보면, 의화단의 두 명의 저명한 우두머리는 모두 '실업청년'이다. 우리는 다시 그 중의 장덕성이 마지막에 어떻게 죽었는지를 보자. 이것은 아마도 문제를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천진성이 팔국연합군의 공격에 함락된 후, 장덕성은 "왕가구(王家口)"라는 곳으로 피신한다. 현지의 왕씨성의 한 염상(鹽商)을 공갈협박한다. 그 왕씨성의 염상은 공갈협박에 응하지 않고 촌민들을 불러모아서 다 함께 손을 써서 장덕성을 체포한다. 그리고 장덕성을 죽여버린다.

 

의화단의 이 중량급 우두머리는, 서양인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라, 중국의 한 부자의 손에 죽은 것이다. 그리고 살신지화를 불러온 것은 바로 장덕성의 공갈협박행위이다.

 

아래에 우리는 다시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의화단이 기독교의 여신도를 붙잡은 다음 무엇을 하였는지 보도록 하자.

 

1900년 음력 오월 초닷새. 하북성 패주현, 의화단의 공격하에, "성약슬회(聖若瑟會)"의 서양수녀는 22명의 여자고아들을 데리고, 고안현(固安縣) 경내로 피신하나, 의화단에 발견되어 붙잡힌다. 의화단은 각 농촌에 광고를 붙인다: "우리는 22명의 황화규녀(黃花閨女)를 붙잡았다. 어느 집 아들이 부인을 구하지 못했으면, 와서 향유전(香油錢)을 내면, 하나를 데리고 갈 수 있다."

 

답은 아주 분명하다: 의화단은 수녀를 잡은 후 그녀들을 팔아서 이익을 취한 것이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의화단이 서양인을 잡아서, 많은 경우는 직접 죽였다. 돈과 재물을 약탈한 것이 아니라. 다만, 사실상, 의화단이 서양인을 죽이면 청정부가 상금을 주었다. 청정부는 11국에 선전포고한 후, 북경의 길거리에 서양인을 죽이면 현상금을 준다는 관방 고시를 붙인 바 있다:

 

"양귀(洋鬼) 1명을 죽이면 은50냥을 상으로 내리고, 양부(洋婦) 1명을 죽이면 은40냥을 상으로 내리며, 양동(洋童) 1명을 죽이면 은30냥을 상으로 내린다."

 

이제 여러분들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의화단이 왜 외국인을 죽였는지. 현상금이 있기 때문이다.

 

언급할 만한 점이라면 당당하게 의화단이 재물을 강탈한 각종 악행을 기록한 것은 외국인의 글이 아니라 청나라정부의 공식문건이라는 점이다. 그중, "경자국변(庚子國變)"중 서태후의 '호가(護駕)'에 공을 세운 회래현 현령 오영(吳永)은 그가 저술한 <경자서수총담(庚子西狩叢談)>에서 분명히 의화단의 성격과 출신을 적고 있다. 이렇게 정의했다: "권비(拳匪, 의화단)는 많은 경우 시정의 무뢰배, 그리고 협박받거나 돈에 유혹당한 시골 농민이다."

 

사료 <서순회란시말(西巡回鑾始末)에는 여러 곳에 의화단이 재물을 강탈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필자는 그 중에서 두 곳만 소개하기로 한다:

 

<서순회란시말. 요양권비자사기(遼陽拳匪滋事記)>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초닷새. 부도통 진창(晋昌)이 친히 병권(兵拳)을 데리고 심양의 각 교회를 공격했고, 서양선교사 수이을 죽이고, 교민 수백명을 죽였다. 서양상점 십여곳을 강탈하였고, 칼을 휘두르니 전국이 미친 것같았다."

 

여기의 문자기록은 아주 명확하다. 청나라군 장군인 진창이 이끄는 이들 의화단과 청병은 서양 선교사를 죽인 후, 이어서 한 일이 바로 '서양상점'을 강탈하는 것이다. 당시의 '서양상점'은 누가 열었는가? 바로 중국인이 연 것이다.

 

아래는 두번째 사레이다: <서순회란시말.동무원위수초비기(東撫袁慰帥剿匪記)>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권비 두목 중에 왕옥진(王玉振)이라는 자가 있다. 청화모촌과 원한이 있어, 특별히 이번 기회에 그 일당 화상 서복, 그리고 주서공, 주사화, 진광훈, 형전오등이 각각 수백명의 일당을 거느리고, 이월 초아흐레, 사평, 박평, 사가영 일대로 들어가고, 청평현경의 허장에 침입하여 사람을 포로로 잡고 돈을 뜯어냈다. 청평령 매여정은 병력을 이끌고 추격하여 체포하려 했다. 비적은 이미 고당의 원왕장으로 들어간다. 십일일 저녁, 다시 하진의 사제장으로 들어가고, 약탈을 계속했다.

이 사료는 아주 분명하게 기록한다: 의화단은 산동성 청평현에서 약탈과 공갈협박으로 돈을 모은다. '허장'을 약탈하고, 다시 '사제장'을 약탈한다. 결국 사방을 돌아다니며 약탈했다는 말이다.

 

의화단사건이 북경에서 발발한 그 해, 국자감의 관원인 나돈융(羅惇曧)은 그가 저술한 <경자국변기>에서 이런 내용을 적어놓았다:

 

"동군(董軍), 무위군(武衛軍)과 권비가 혼합하여 마음대로 약탈을 자행했다. 패자 부륜(溥倫), 대학사 손가내(孫家鼐), 서동(徐桐), 상서 진학도(陳學荼), 각학 이곡(貽谷), 부도어사 증광란, 태상 진방서는 모두 붙잡히나, 몸만 풀려난다. 서동, 이곡은 모두 권비에 부화했으나, 역시 피하지 못했다. 부륜, 적기는 영록을 고발했으나, 영록이 제어하지 못했다. 백성이 거주지, 시장은 수리가 모조리 약탈되고 불에 타서 폐허가 된다."

 

이를 보면, 중앙관원인 나돈융도 전혀 감춰주지 않고 의화단과 청병이 서로 결탁하여 '부청멸양'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실제로 한 일은 청정부고관을 공갈협박하는 일이었다. 나돈융의 글에서 아래의 청나라조정 고위관리가 의화간에게 재산을 빼앗겼다;

 

1. 패자 부륜

2. 대학사 손가내

3. 대학사 서동

4. 상서 진학도

5. 각학 이곡

6. 부도어사 증광란

7. 태상 진방서

 

이것만이 아니다. 의화단은 몇 리나 이어진 북경의 주민들의 집을 모조리 약탈했다. 그리고 불을 질러 잡을 폐허로 만들어 버린다.

 

그중, 감군(甘軍, 청나라군의 한 갈래) 사병은 의화단과 결탁하여 대학사, 예부상서 손가내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약탈을 한다. 손가내의 아들은 짧은 소매옷만을 남기고 모조리 벗겨서 가져간다. 병비(兵匪)들은 총으로 손가내의 허리를 찌르며, 금은보화를 내놓으라고 핍박한다. 손가내는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집안의 금은보석을 모조리 내놓는다.

 

그해에 형부에는 "이희성(李希聖)"이라는 관리가 있었다. 그도 같은 제목의 <경자국변기>를 쓰는데, 이 자료에서, 이희성은 청나라고관 나동(那桐), 허경징(許景澄)등이 의화단에게 약탈당한 사실을 기록했다.

 

이런 류의 기록은 부지기수이다. 사료는 이미 명백히 기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청멸양'을 기치로 내건 의화단은 서양인을 약탈했을 뿐아니라, 대청국의 백성을 약탈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의화단이 심지어 청정부의 고관들까지도 약탈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부청'이라는 기치하에 벌인 일이다.

 

의화단운동을 친히 겪은 일본인 식송양삼(植松良三)도 같은 기록을 남긴다: "당시, 의화단의 단원은 대부분 농촌에서 왔다. 견식이 모자랐다. 그들중 많은 사람들은 '금'과 '동'을 본 적이 없다. 당시의 천진성 내에는 영국 태고공사와 장사를 하는 상점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연무호(聯茂號)"였다. 의화단은 '서양인과 결탁'했다는 죄명으로 '연무호'를 모조리 약탈해버린다. 당시, '연무호'의 벽에는 많은 동패가 상감되어 있었는데, 구리빛이 반짝였다. 의화단은 구리를 본 적이 없어서 이를 금이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들 동패를 모조리 가져가서 자신의 것으로 한다.

 

애국의 기치를 내걸고 사고를 치고, 불 속에서 밤을 집어간다(火中取栗). 거기서 약탈하여 부자가 되었다. 이런 사정은 민간의 일부 깡패, 무뢰배들의 눈을 벌겋게 만들 일이었다. 의화단이 되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성,천징 일대에 우후죽순처럼, 많은 짝퉁 의화단이 나타난다. 그리고 의화단 수령중 하나인 장덕성이 조사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사료 <천진일월기>에 따르면, 의화단 수령중 하나인 장덕성은 일찌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천잔에 가짜 의화단이 너무 많다. 내가 특별히 조사하여 붙잡아야 겠다."

 

예를 들어, 당시의 하북 역주에는 "장옥산(張玉山)"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의화단의 명칭을 쓰면서 자형관의 부호 장지화(張芝華)를 강탈했다.

 

그외에 많은 평민백성들은 의화단으로 가장하여, 개인적인 복수를 하기도했다. 이런 기회를 틈타서 자신의 원수를 죽인 것이다.

 

심지어 청군사병도 의화단 의복을 입고, 의화간을 가장하여 백성의 재산을 강탈하는 대열에 뛰어들었다.

 

왜 반란을 일으켰는가? 답안은 왕왕 구호에 있지 않고, 실제로 무엇을 하였는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