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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옹정제)

여사낭(呂四娘)이 옹정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왜 지금까지 전해지는가?

by 중은우시 2013. 4. 16.

글: 포강객(浦江客)

 

TV드라마 <견환전>이 인기리에 방영되면서 청나라역사붐을 이룬다. 그중 옹정제의 죽음에 대한 수수께끼는 <견환전>에서 내용을 두찬(杜撰)한 것으로 인하여 이 역사의 미해결이슈는 더욱 오리무중이 되었다.

 

<견환전>의 내용은 이렇다. 섭란의(葉瀾依)는 옹정이 윤례(允禮)를 사사한 것에 원한을 품고 거짓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아 암중으로 옹정이 난정향(暖情香)을 사용하게 하고, 그를 속여서 만성독약이 포함된 단환(丹丸)을 먹게 한다. 그리하여 옹정제는 여색에 빠져 병을 얻고 피를 토한다. 견환은 고의로 옹정이 새로 총애하게 된 손답응과 시위가 사통한 일을 살을 덧붙여 옹정에게 말해준다. 옹정은 화를 참지 못하나 병이 심하여 일어날 수가 없었다. 섭란의는 마지막으로 소위 장생불사의 금단을 황제가 먹게 하여 병세를 더욱 악화시킨다. 옹정의 임종직전에, 견환은 혼자서 그의 곁을 지키며, 모든 진상을 얘기해준다. 옹정은 분노로 격분하여 사망하고 만다. <견환전>의 이 내용은 당연히 예술적 허구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원인으로 이 허구의 이야기가 예술의 합리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옹정13년(1735년) 팔월 이십삼일 새벽, 옹정제는 돌연 원명원 이궁에서 급사한다. 당시 공식발표를 보면, 그는 돌연 발병하여 사망한 것이다. 그러나 옹정의 병세와 사인을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관서부재(官書不載)"와 선명하게 대비되는 것은 민간에 전해지는 옹정의 죽음에 대한 여러가지 기이하고 곡절있는 이야기이다. 비록 민간의 소문이고, 계속 와전되었지만 그 중에는 적지 않은 합리적인 요소도 들어있다고 볼 것이다. 이를 통하여 엄격한 사학가들도 쉽게 부인하기 어렵게 된다.

 

옹정의 사인에 관하여, 주로 3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관서에 기재한 병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급사의 이상현상에 대하여는 해석을 내놓지 못하여 여러가지 의문이 솟아나게 만들었다. 둘째는 자객에 의하여 암살되었다는 설이다. 셋째는 단약중독으로 죽었다는 설이다. 이것은 그저 추론이다. 그중 암살사망이나 중독사망(일부 청사학자들은 중독사망의 관점에 서는 경우가 많다. <견환전>도 이 견해를 차용해다)이 널리 전해진다. 그리고 민간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옹정이 여사낭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민간에 널리 알려졌을 뿐아니라, 일부 서적에도 많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만청외사>, <청궁유문>, <청궁십삼조>등이 그것이다. 모두 여유량(呂留良)의 손녀인 여사낭이 옹정제를 죽였다는 것이다.

 

여사낭이 어떤 사람인가. 왜 옹정제를 죽여야만 했을까? 이야기는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여사낭이 협녀라는 것이다. 옹정은 젊어서 검법을 좋아하여 천하의 검객들과 사귀기를 좋아했다. 그와 문경지교를 맺은 검객이 13명이었다. 옹정이 등극하면서부터 해내의 무림고수를 모두 장악한다. 그러나 유독 승려 하나가 따르지 않고, 산중에 은거한다. 하루는 옹정이 그가 숨은 곳을 찾아내어, 무림고수들에게 붙잡아오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그 승려는 검으로 자결한다. 1개월후, 그 승려의 제자인 여사낭이 비검으로 옹정의 머리를 잘라버린다. 또 하나는 여사낭은 여유랑의 손녀이다. 여유량은 청나라 전기의 유명한 문인인데, 옹정6년(1728년), 이미 사망한 여유량은 증정사건에 연루되어, 조정에 의하여 묘가 파헤쳐지고 육시한다. 옹정10년(1732년) 십이월, 여유량의 아들인 여보중, 여의중이 처결당한다. 그의 가족들은 모두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 손자대는 노비로 만들어 변방에 보낸다. 전설에 따르면 여유량은 도망쳐서 깊은 산에 숨는다 거기서 스승을 모시고 검법을 배우고 비첨주벽(飛檐走壁), 비검술을 익힌다. 나중에 궁내로 잠입해 들어가 궁녀의 신분으로 황궁에서 황상을 모신다. 그리고 기회를 보아 암살한다. 옹정13년(1735년)의 어느 밤, 원명원에 잠입해 들어가 옹정의 머리를 잘라버려, 그의 집안을 멸문시킨데 대한 복수를 하였다.

 

이 전설이야기는 너무나 기이하다. 청사연구에서 계속 의문이 제기되었다. 기실,오늘날 우리의 견해로 보면, 여사낭이 옹정을 죽였다는 것은 그저 전설이야기일 뿐이다. 과거에 "패관야사"로 분류했다. 현대의 분류법에 따르면, 그것은 민간문학류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고대이건 현대이건, 아무도 이것을 역사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여유량살옹정"의 이야기를 사람들은 좋아하는가. 문학가들이 계속 이를 쓰고,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것일까?

 

전설이야기는 민간문학범주이다. 마찬가지로 현실생활의 반영이다. 이는 인간의 머리 속에서 허구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모두 탄생배경과 원인이 있다. 여사낭이 옹정을 죽였다는 것도 예외는 아니다. 필자의 생각에 대체로 아래와 같은 3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사건 자체가 오리무중이다. 민간전설이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청조야사대관.세종안가지이문>에는 이렇게 적었다: "세종이 급사하면서, 전설과 이설이 많았다. 어떤 사람은 암살되었다고 하는데 그 설도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후에 다시 여유량의 손녀가 조부의 복수를 한 전설을 싣는다. 동시에 그 글에서는 <악이태전>을 고증했다. 악이태는 옹정이 급사했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입궁했다말이 나온다 그리고 '의문'을 남긴다. "당시는 천하가 태평하고, 장군이 대통을 잇는데, 무슨 위기가 있어서 이렇게 당황했을까? 이는 암살설이 단순한 무고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기실, 이 글에서 특히 <악이태전>에서 우리는 옹정이 피살당했다는 근거를 찾을 수는 없다. 그저 민간의 상상일 뿐이다. 다만, 옹정은 황제로서 죽음이 명확하지 않았다. 그리고 궁정에서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자연히 사람들의 소문과 추측이 따르게 된다. 민간전설에서, 먼저 옹정을 죽인 사람을 옹정과 깊은 원한이 있고, 몸에 절기를 지닌 사람을 찾아야 했다. 자연히 여유량의 후손인 여협 여사낭이 나타난 것이다.

 

둘째, 전설은 민간의 여유량사건에 대한 불만을 보여준다. 옹정의 "문자옥" 폭정에 대한 극도의 반감도 보여주다. 중국은 봉건시대부터 문자옥이 있었다. 옹정조와 건륭조때 가장 심했다. 옹정8년 십이월부터 10년 십이월까지, 옹정은 여유량사건에 대하여 연이어 성지를 내리고 살계를 펼치고 연루되어 죽은 자가 아주 많았다. 처형당한 사람만 백여명이었다. 여유량 및 그 아들인 여보중은 비록 이미 죽었지만 부관참시당한다. 아들 여의중은 참형에 처해진다. 여유량의 손자대는 사람이 많았다. 모조리 영고탑으로 보내어져 피갑인의 노비가 된다. 여유량의 제자인 엄홍규는 능지처참당하다. 그의 조부, 부친, 자손, 형제, 백부형제의 아들 남자로 16세이상은 모조리 참수된다. 모, 처, 첩, 자녀는 공신의 노비로 보내고, 재산은 국고에 넣는다. 나머지 각서인, 여유량과 교분이 있던 사람, 여유량의 책을 소장하고 있던 사람도 모조리 참수했다. 여유랑을 존경한 사람 예를 들어 같은 고향사람 주진기, 광동연주지주등은 모두 엄한 심문을 받는다. 여유량사건을 보면 옹정이 얼마나 잔혹하고 살인여마(殺人如麻)했는지 알 수 있다. 연루된 사람의 후손들은 옹정을 뼛속까지 미워하게 된다. 일반백성들도 이에 대하여 지극히 반감을 지녔다. 바로 여류량 사건이 억울한 사건이므로, 그의 후손인 여사낭이 옹정을 죽였다는 전설이 나온 후 신속히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셋째, 사건이 가진 문학적 색채의 서술이 민간문학창작에 풍부한 소재를 제공해 주었다. "여사낭살옹정"은 하나의 전설이야기이다. 그것이 널리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그 핵심은 반드시 존재한 사람의 존재했던 이야기여야 한다. 옹정은 확실히 존재한 사람이다. 옹정은 확실히 비명에 죽었다. 다른 하나는 이야기가 문학창작의 요건에 부합했다는 것이다. 옹정은 피살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렇다면 누가 살해했을까? 살해수단은 어떠했을까? 살해과정은 어떠했을까? 왜 반드시 죽여햐할 정도의 원한을 가졌을까? 이 전설이야기는 어느 정도 유명하지도 않은 민간문학작가의 입을 통하여 전해진다. 거기에 살이 덧붙여 생동감을 지니고 더욱 재미를 갖게 된다. 그리하여 당대문학가, 예술가들도 이를 제재로 하여 파고들어 이야기를 가공해낸다. 그리하여 수도 없는 전기소설, 영화, TV드라마, 희곡, 연환화등의 작품이 나온다.

 

"여사낭살옹정"의 전설이야기가 이백년이나 전해질 수 있었고, 시종 사람들이 즐겨 이야기하게 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바로 그중에 무시할 수 없는 사회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여사낭살옹정"의 전설이야기는 옹정이 비병에 죽은 것을 가지고 살을 덧붙여 만든 것이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비통함을 풀어주려는 의도가 있다. 잔혹하 황제에 대한 불만을 표하고 폭군을 죽인 영웅에 대한 찬송이 있다. 이렇게 일반백성의 원한과 애정을 발설한 것이다. 민간의 폭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심리와 불요불굴의 민족정신을 나타낸 것이다. 전설이 나타내는 것은 바로 민심의 향배이다.